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5/12/09 12:53:35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7]시작에 앞서 기다리는 끝.



  술이 얼큰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겨울 밤거리. 감당하기엔 조금 벅찰 만큼 마신 덕에 내 발걸음은 조금씩 꼬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나만큼이나 헤메고 있는 벌건 얼굴의 친구 한 녀석. 돈이 없어 이 추운 날 택시를 못 타는 것도 아니고 늦은 시간이라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걷는다. 모임이 끝나는 시간에 나와 이 녀석이 끝까지 남아있는다면 으레 당연한 것 마냥 걷는다. 언젠가 한 번 물어봤던 기억으로는 술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우는 담배가 자기는 제일 맛있다더라. 그 날도 그랬다. 반이 조금 안되게 걸어왔을 때 즘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서 그가 내게 말했다. 어디엔가 붕 뜬 듯한 목소리. 그는 분명 뭔가에 설레고 있었다.

“올해도 이제 다 끝이구나.”

  그냥 연말이라 어느 누구나 느끼는 작은 설렘일까. 혹은 후회였을까. 뒤돌아보자면 내가 올 해 들어 그를 만난 날이 많지가 않아 짐작은 힘들지만 적어도 지금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럭저럭 100점 만점에 50점은 줄 수 있을만한 시간을 보내온 듯 하다. 스스로 자신에게 눈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칭하는 이가 친구 앞이라고 괜히 감상에 젖어 한 해를 흘려 보내는 눈물 따위 보일 리가 없다. 그렇다고 환하게 웃지도 않는다. 언제나 조금은 흐린 시야로 앞을 보던 그 얼굴 그대로다.

“그러게나 말이다. 시간 참 빠르지.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끝이다.”

  그가 손에 든 담배가 반쯤 타버렸을 때 나 역시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통상적인 짧은 대화를 마치고 왔던 거리만큼을 더 걸어 도착한 서로의 집 중간에 위치한 놀이터에서 우리는 잠시 멈췄다. 놀이터의 벤치는 계절 모르고 여기저기 어지럽게 가지를 뻗은 담쟁이 덕에 바람이 덜 들이쳤다.

“그런데 있잖아. 넌 시작을 기억하냐, 끝을 기억하냐.”

  그가 다 피운 담배를 모래밭에 파묻고서 다시 물었다. 꽤 긴 침묵을 지키다 갑작스레 받아들인 그의 질문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처음과 끝. 애매한 질문이다. 잠시 생각을 하다 문득 내 습관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글쎄. 난 굳이 따지자면 끝을 기억하는 것 같다. 아니 끝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뭔가 생각을 하면 일단 한 막이 끝난 부분부터 기억해내는 것 같아. 그러면서 이것 저것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 하나 기억을 맞춰가는거고.”

  그가 어떤 대답을 할 진 몰랐지만 확실히 난 그랬다. 흔한 일로 책방에서 책을 빌릴 때 단행본들을 뒤적이다 막상 어디까지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으면 아무 권이나 꺼내서 끝을 뒤적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건 봤었지 하며 다시 집어넣고 다음 권을 꺼내 그것의 처음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내가 기억하는가. 그것이 내가 읽었던 책과 읽지 않은 책을 골라내는 방법이었다.

  “너랑 나랑은 그거 하나는 비슷하구나.”

  그와 나는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해 다른 것이 참 많았다. 사소한 일로 다툰 일도 많았고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 종종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 받은 일도 가끔 있었다. 그가 나에게 그것 하나 비슷하다고 하는 연유는 분명 반가워서 일 테다. 나 역시 그랬다.

“사람들 대부분 하는 말이 그러더라. 첫 인상을 제일 많이 본다고. 그 말이 맞긴 하지. 분명 처음 봤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음 만남에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달리지기도 해. 아니면 아예 다음 번 만남이 없을 수 도 있지.”
“근데 왜 너랑 나랑은 계속 만나냐.”
“장난은 잠시 접어봐. 형님이 오랜만에 뭔가 얘기하려고 하면 대강 눈치채고 입 닫고 있는 센스 정도는 갖춰라.”
“놀고 있네.”
“난 말이야….”

  그는 내 비아냥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는 일에 있어 시작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느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이와는 어떻게 만났더라 하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에 비해 그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 무엇을 했는지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물론 기억이 기록되는 시간상의 순서는 처음이 훨씬 앞서기에 그 때문에 그것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치부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끝을 기억해 냄으로서 그것으로 시작을 기억해내고 지금의 만남을 이어나간다. 즉 진행형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시작이 아닌 끝이라는 말. 끝은 진실로 끝이 아니라 시작의 연장임을 그는 하얗게 허공을 채우는 입김을 내뿜으며 한 참을 떠들었다.

“추억…같은 것도 말이야. 나는 그것들이 끝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일들은 일찌감치 인연이 다해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시간의 조각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걸 계속 기억할 거란 말이지. 살다 보면 분명 그 추억으로 또 다른 인연이 생기는 일이 있을 거야. 그래서 기억하는 거야. 진실로 끝난 일이라면 내 돌 같은 머리로 무슨 재주로 기억하겠냐. 다 잊었지. 난 시작만 기억해.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끝…만 남아있어.”
“난 언제 니 머릿속에서 지워지냐.”
“죽기 전에는 안 지워. 냅두고 계속 갖고 놀아야지. 그래서 이래 살기 힘든 세상 작게나마 사는 낙이라도 있지.”
“좋댄다…”

  그는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끝은 곧 시작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동의합니다.”
“좋다. 그거다 동생아.”
“근데. 다른 사람은 나의 무엇을 기억할까. 사람이라는게 다 같을 순 없어. 너랑 난 진짜 몇 천만분의 일 확률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거고. 다른 사람은 굳이 꼭 시작과 끝이 아니더라도 나와의 중간 부분만 기억할 수도 있어. 이것 저것 다 잘라내고 중간 부분. 제일 재밌었거나 아니면 가장 기분 나빴던 경우…”
“제일 재밌었던 기억은 나도 없다.”
“다물고. 그런 거 생각하면 왠지 행동에 제약이 생겨. 이런 일로는 기억되기 싫은데…하고 말이야.”
“그 정도야 누구나 다 따져가면서 행동하지. 너무 얽매일 필요도 없어. 그러려니 해. 그런 거 생각하면서 어느 새 살아. 우린 그냥 끝만 기억하면 되."

  그렇게 말하고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집 앞까지 나와 그는 놀이터로 걸어오기 전 까지 그랬던 것 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파란 색 대문. 그의 집 앞에 다와서야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말 한 마디를 꺼냈다. 그는 대문의 손잡이는 슬며시 밀며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우리의 끝은 누가 기억해주지?”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것도 잠시였다. 대답이 돌아오기 까지 걸린 시간은 내가 시린 손을 비비는 시간만큼 짧았다.

“넌 내가 기억하면 되고. 난 네가 기억해주면 되. 끝을 기억해 줄 사람은 많을 필요도, 그래서도 안되. 희소성이 떨어진단 말이야.”
“그건 나랑 다르군.”
“그러니까 사람이지. 나 간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짧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 그는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그리고 나도 등을 돌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끝. 그리고 나의 시작. 그것을 기억해주는 이가 나는 많았으면 한다.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에게 화자되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유명인…이 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겠지만 그런 흔한 일 보다는, 내가 이뤄낸 성과로서 언급되기 보다 나라는 사람 자체를…나라는 인간만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조금은 걸어가는 길을 좁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 하겠는가. 나 좋자고 사는 세상. 그렇게 만들어봐야지. 일단은 살면서 이뤄내야 할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고. 지금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다. 너무 어렵게 묶어둘 필요는 없다. 나도 모르는 어느새 하나 하나 이뤄낸 내 열매들을 보며 기뻐할 내일만 생각하련다. 그러면. 이렇게 차갑기만 한, 가쁜 숨으로 사는 세상 조금은 살 만하겠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유신영
05/12/09 14:57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사람이겠죠.. 그 말이 입에서 맴도네요..
05/12/09 15:37
수정 아이콘
연재하시는 수필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뒤로 넘어간 페이지에서 읽느라 이번이 처음 다는 댓글인 것 같네요.
댓글 수에 넘 신경쓰지 마시고 계속 건필해주세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Nada-inPQ
05/12/09 16:48
수정 아이콘
후~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진심으로 출판을 하셔도 좋으리라는 생각이...왠지 글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kiss the tears
05/12/09 18:29
수정 아이콘
오늘 yoRR님의 글을 읽고 책을 한권 살려고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달에 책 한권 사자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이거 왜 이리 힘들까요...
아케미
05/12/09 19:22
수정 아이콘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죠! 연말에 무척 잘 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Juliett November
05/12/10 02:1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9009 최연성을 이겨야...???? [54] 정테란4704 05/12/09 4704 0
19007 [yoRR의 토막수필.#7]시작에 앞서 기다리는 끝. [6] 윤여광4068 05/12/09 4068 0
19006 [잡담]유수와 같은 세월 [6] Jay, Yang4746 05/12/09 4746 0
19005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와라, 그 자리는 저그의 영역이다 -마재윤, 냉소의 일갈 [29] 5824 05/12/09 5824 0
19004 인스네어가 유닛 공격속도에 미치는 영향 [28] 지포스16847 05/12/09 16847 0
19003 드디어 오늘입니다! 신한은행 2005~2006 스타리그 개막전이 열리는 그날이! [25] SKY923954 05/12/09 3954 0
19002 꿈......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9] BluSkai3346 05/12/08 3346 0
18999 [잡담]끝을 향해가는 팬픽공모전.. [5] 못된녀석...4021 05/12/08 4021 0
18998 마재윤 선수의 화려한 비상을 기원합니다 [25] 헤르세4598 05/12/08 4598 0
18997 05년..내친구의 이별. [27] 컨트롤황제4041 05/12/08 4041 0
18996 이윤열. 강민 선수들의 플레이 [17] 끝판대장3872 05/12/08 3872 0
18994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재윤아! [20] 호수청년4342 05/12/08 4342 0
18993 몇몇 분들이 궁금 하시던 점-_-.. 테란 자원채취 [20] Yaco3654 05/12/08 3654 0
18992 경기 후 악수에 관하여 [134] 종합백과4636 05/12/08 4636 0
18990 대기업들이 스폰서를 할수 있을까요? [13] J.D3593 05/12/08 3593 0
18989 최연성이기에 바라는 것 [24] 비갠후에3426 05/12/08 3426 0
18987 볼륨 좀 줄여줘요..ㅠ.ㅠ [7] 네로울프3626 05/12/08 3626 0
18986 [MSL 승자조 4강] 우리는 우승만을 상상한다. [97] 청보랏빛 영혼5239 05/12/08 5239 0
18984 [퍼옴] 황우석 교수님과 관련된 사태에 대해서.. [43] 기억상실3754 05/12/08 3754 0
18982 <PD수첩> 한학수 PD의 사과문 [49] lennon5012 05/12/08 5012 0
18981 여러분의 살림살이는 나아졌습니까? [10] 순수나라3783 05/12/08 3783 0
18980 기사-펌]"프로게임단 기업 이미지 4배 높다" [13] 게으른 저글링3609 05/12/08 3609 0
18979 올해 최고의 게이머와 다른것들을 뽑는다면... [30] 멧돼지콩꿀4059 05/12/08 4059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