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5/11/06 04:21:04
Name DeaDBirD
Subject Hero.

한 번 더 추게의 스카티님이 쓰셨던 "Boxer's army, 황제의 마지막 라운딩"이라는 글을 보고 왔습니다. 'Hero'는 더 이상 흘러 나오지 않습니다만.

생애 처음으로 일부러 시간 내어서, 경기 장소에 다녀왔습니다. 서른 다섯. 무언가에 열광할 나이는 지나야 한다고들 하는 나이. 남들 눈도 있고 해서, 최대한 젊은 옷 입고 18시 반 쯤 도착하도록 집에서 나섰습니다. 오늘만은 혼자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조급함이 더 컸을 겁니다. 김광석 님 콘써트 한 번 두 번 미루다가 결국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서태지 님 콘써트 한 번 두 번 미루다가 은퇴 소식 듣고 화들짝 놀랐었습니다. 나는 열정과 사랑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 여유 속에 사람들이 떠날 수 있다는 걸 너무도 뒤늦게 깨닫곤 했습니다. 박서, 솔직히 다음 기회 없다는 생각에 후회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주섬주섬 챙겨 인천행 전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솔직히 4강만 통과해서, 시드만 받아주길 바랬습니다. 박서는 사실 어느 상대와 대결하든,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안정감이 부족합니다. 몇몇 절대강자들에 비해 물량이 부족하다는 얘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결승 홍보 속에서 12회 리그 진출 중 6회 결승 진출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나름대로 올드게이머 팬이라 생각해 왔지만, 박서가 결승 무대까지를 반타작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아스러웠습니다. 리치와의 결승 이후 한 동안의 슬럼프가 그만큼 컸었나 봅니다.

며칠 전 '올드게이머' 님의 고백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돌았습니다. 사실 저 역시 작년 에버 때 박서의 눈물을 보고, 뭔가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뭐야, 저 자식 우는 거야? 진짜로 우는 거야?' 울어선 안된다는, 여기서 울면 정말 엄청나게 까일 거라는 생각 속에서도, 한 편으로 이해 가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오늘, 체육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덕대게 차량을 통해 밖에 쭈그리고 앉아 결승전을 보았습니다. 경기 다 끝나고 사람들 빠져 나가는 와중에, 끝까지 앉아 있던 한 분의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울지 마라 임마,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분명 말도 안되는 억지이긴 하지만, 잠시 온게임넷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사람 욕심이 끝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4강 때 나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시드를 받아서, 그 치열한 예선 거치지 않아도 한 번 더 박서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결승 무대에 직접 가겠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 삼 세 번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 역시 3이라는 숫자와 황금마우스의 마력에 잠시 빠져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불현듯 '나다와 줄라이보다 먼저'라는 못난 마음을 가졌나 봅니다. 어느 샌가 '최선을 다 하는 박서를 볼 수만 있다면 좋다'라는 애정으로부터, '이기는 박서가 좋다'라는 집착으로 빠져 버렸었나 봅니다.

사실 박서는 게이머로서 더 바랄 것 없이 성공한 선수입니다. 수많은 열혈 팬들(과 번듯한 연인까지)이 있고, 안정적인 스폰서와 억대 연봉도 받고 있으며, 나름 대로의 관리를 통해 같은 선수들 속에서도 인정 받고 있습니다. 반면 제로벨은 무스폰 팀에서 연봉도 없이, 이른바 초특급 테란 유저와의 안정적인 연습 게임도 없이, 정말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선수입니다. 오죽하면 조정웅 감독님의 첫 말씀이 "선수들이 안정적인 여건에서 게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였겠습니까. 제로벨의 우승은 2002년 월드컵 4강에 버금 가는 기적같은 일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피땀 흘린 노력은 누구 못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박서의 패배에 아쉬워 하는 나를 곰곰히 생각합니다. 아마도 막다른 골목에서야 튀어나오는 박서의 승부 근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코카콜라배 5경기 때의 올인 3 드랍쉽, 815 대첩, 작년 에버배 4경기 때의 테테전 바이오닉, 오늘 3, 4경기 노멀티 올인 러쉬.

......

잠시 최면에 걸리 듯 무언가에 취해 있었던 욕심으로부터, 다시 평온한 BoxeR's army로 남을 수 있겠습니다. 다음 리그에서 3패 탈락한들, 듀얼 2패로 PC방 예선으로 간들, 그리고 몇 시즌을 쉬고 군대가서 서서히 잊혀진다고 해도, PC방 예선의 그 한 게임의 승부욕을 찾아 다니는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7년 사귀어 오던 친구가 떠나는 데 크게 일조했던 박서이지만, 이 승부 근성만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습니다. 단 한 게임을 하더라도 이것은 누가 뭐래도 박서의 게임이다라는 각인을 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오늘 승리하신 제로벨이나, 결국 모든 프로게이머 분들이 그러했으면 합니다.

오늘 꽤 우울했지만,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서 돌아본다면, 이 시간들이 정말 행복한 날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서, 당신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나에게 있어 거대한 영웅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풍류랑
05/11/06 04:55
수정 아이콘
어? 임요환 선수 애인이 있으셨군요;

역시.. 무적의 솔로부대가 아니라서...

(물론 농담입니다^^;)

갑자기 월드컵 4강보다는 그리스의 유로 2004 우승이 떠오르네요..
05/11/06 16:45
수정 아이콘
BoxeR's army

뭔가 뭉클한 표현이군요...
마다마다다네~
06/01/12 15:12
수정 아이콘
^^ 좀 시간이 지났지만- 역시나 그날의 결승은 아직도 가슴이 아프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8133 4대천왕은 결승이 슬프다...(역대결승전) [13] 몽상가저그4549 05/11/06 4549 0
18131 축구를 할때 여러분들의 포지션은 어디인가요 ? [45] 아트오브니자5201 05/11/06 5201 0
18130 까들이여 왜 인정하지 않으려는가? [63] 라이포겐5878 05/11/06 5878 0
18129 So1 스타리그 맵별 최고의 명경기는? Part 4 815 [41] 꿈을드리고사5129 05/11/06 5129 0
18128 So1 스타리그 맵별 최고의 명경기는? Part 3 알 포인트 [36] 꿈을드리고사4437 05/11/06 4437 0
18127 So1 스타리그 맵별 최고의 명경기는? Part 2 네오 포르테 [35] 꿈을드리고사4013 05/11/06 4013 0
18126 So1 스타리그 맵별 최고의 명경기는? Part 1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 [33] 꿈을드리고사4439 05/11/06 4439 0
18125 친구의 4가지 유형.. [5] 성의준3502 05/11/06 3502 0
18123 단 하나뿐인 그 분. [12] 폐인아님3820 05/11/06 3820 0
18122 조금 때늦은 결승 경기 분석 [11] 4thrace3672 05/11/06 3672 0
18119 의류업체의 스폰에 관한 저의 생각 [18] 박서야힘내라4020 05/11/06 4020 0
18118 원희룡의원님..순간 임요환선수와의 관계를 의심했었습니다.^^ [62] 김호철6532 05/11/06 6532 0
18117 SO1 OSL 총정리 (진기록 모음집) [8] 초보랜덤4111 05/11/06 4111 0
18116 이번 시즌의 숨은 공로자. [35] Sulla-Felix5762 05/11/06 5762 0
18113 Hero. [3] DeaDBirD4628 05/11/06 4628 0
18112 황제가 제로벨에게 패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14] Kai ed A.7030 05/11/06 7030 0
18111 가려져버린 줄라이와 옐로우의 탈락.. [18] 벙커링4283 05/11/06 4283 0
18110 지금 밖에는 추적추적 새벽비가 내리네요 [10] 풍류랑4148 05/11/06 4148 0
18109 오영종선수의 우승으로 플러스에게도 스폰서가? [20] MinaM[CPA]3876 05/11/06 3876 0
18108 이번시즌은 오영종선수의 시즌 다음시즌은 SKT T1의 시즌? [34] 초보랜덤4578 05/11/06 4578 0
18107 임요환..가을의 전설의 진정한 주인공?? [16] 김호철3984 05/11/06 3984 0
18106 제가 오영종선수를 왜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13] EclipseSDK3590 05/11/06 3590 0
18105 우리 옐로우에게도 관심을... [12] 3915 05/11/06 3915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