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5/12/12 13:51:34
Name phoneK
Subject [공모] Fly High -3화- '영혼'
<3편> -영혼-

진호와의 약속장소로 가는 사이, 강민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다지 말도 없이 약속장소에 도착한 뒤 그제서야 신중하게 입을 떼는 그였다.

"사람은 누구나 혼백이 살아있다고 하지. 아니, 어쩌면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무생물에게도 혼은 있을지도 몰라."

"혼백이 뭐지, 형?"

"보통 무언가를 태울 때 남는 재를 혼에 비유하고, 날아가는 연기를 백에 비유를 하곤 해.혼은 그 사람의 가장 진하고 진실된 부분이고, 백은 그의 가장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는 부분이라 할 수있어. 말하자면 백은 본능에 가깝다고 할까나."

강민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태어난 지 한달되는 아기에게도 혼백은 있어. 하물며 태어난지 5년이 넘은 녀석에게 혼백이 없을 리 없지."

"그럼 그 녀석은 역시 혼백일까?"

혼백은 유령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용호는 갑자기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유령,유령. 말을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줄이야.

"녀석은 스타란 게임을 종식시킨다 했어. 그러면 우리도 더 이상 게이머가 아니게되지."

"그럼 어떻게 해야되지?"

"어떻게 하긴. 막아야지. 우리는 게이머잖아. 귀신잡는 해병대 몰라?"

용호는 으쓱대는 강민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형이 해병대 출신이었나? 육군아니고?"

"임마, 난 유보트 출신이잖아."

그렇게 점차 가벼운 이야기로 돌아설려는 찰나, 홍진호가 도착했다. 용호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진호를 만난 것이었다. 못본 사이 진호는 많이 변해있었다. 여전히 간지나는 패션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진호형, 뭐야 그 옷차림은."

"아, 오늘 면접시험이 있다고 해서."

반갑게 웃는 진호의 옷차림은 그야말로 아스트랄이었다. 말숙한 정장차림에 양아치틱한 귀걸이를 하고, 신발은 번쩍번쩍 빛이 나는 백구두였다. 그것은 아무리봐도 면접시험에 응시하는 사회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나마 그런 옷차림이 진호의 짙은 피부색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게 불행중 다행이랄까. 강민과 용호가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진호는 양쪽 귀걸이를 비벼대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용호야. 그러고보니 아직 은퇴안했구나."

바쁜 모양인지, 진호는 용호의 결승경기를 못 본듯했다. 용호는 한편으론 섭섭하고 또 한편으론 다행스런 기분이 들었지만 분명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강민형이나 진호형은 벌써 사회에 진출하여 저렇게 레어 하이브로 업글을 했는데 자기는 아직 해처리상태라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롯데리아는 좀 심한거아냐? 강민 네가 쏘기로 한거구나!"

"내가 돈이 어딨어? 이번에 전기세가 올라서 살림이 장난이 아니야."

"그러게 이벤트경기라도 우승해두지 그랬어. 오늘은 내가 살테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고기먹으러 가자."


셋은 고기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진호는 처음에는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지만, 용호와 강민의 진지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기시작했다. 그리고 강민의 집에 같이 가서 녹화된 자료화면을 보고난 뒤에는 용호의 말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점심을 먹고오는 동안, 더이상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사건이 한 번 더 발생했다. 진행진의 말에 의하면, 또다시 채팅창이 열리고 누군가가 메세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주최측도 이젠 위기를 의식했는지 화질좋은 증거화면을 보란듯 내보내고 있었다.

용호는 그 메세지의 글자체를 알고있었다. 그 날 밤 처음으로 메세지를 남겼던 그 글자체와 동일했다.

"그런데 저런 글자체가 나올 수가 있나? 컴퓨터에 저장된 글자체로 쓴 글은 아닌 것 같은데."

"모르지. 새로 생긴 글자체인지도.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긴 해. 정말 이대로가면 스타방송은 전혀 못하게 되는거아냐? 우린 괜찮지만, 용호 너는 정말 은퇴를 생각해야할지도 몰라."

"진호야, 좀 천천히 말해. 알아듣기 힘들잖아."

"이건 농담이 아니잖아. 아무리 내가 은퇴했다해도 한번 게이머는 영원한 게이머아닌가? 요즘도 가끔 스타보는 맛에 세상사는데 이러면 배신이야 배신!"

진호는 흥분했는지 안그래도 좁은 강민의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강민은 침착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턱을 고인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용호는 둘의 사이에서 채팅창의 글자에 주목하고 있었다.

'정정당당하지 않으면 게임이 아니다.'

"고집이 센 녀석인가. 모든 게이머가 김주혁과 같은 줄 아는가보군."

"이 녀석은 지친게 아닐까, 형? 세상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공존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흠, 멋진 생각이야. 하지만 역시 고집일 뿐이야.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으면서 그러길 두려워하는... 마치 아이같은 느낌이야."

강민은 녹화된 테이프를 되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 테이프는 내가 다시 한번 검토해볼게. 그리고 진호 너는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하지않았나?"

"아 참. 그러고보니 여자와 만날 약속이..."

방 안을 빙빙돌며 흥분해하던 진호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좀 더 있고 싶지만 안되겠군. 아무튼 용호야, 다음 결승에선 반드시 이기는거다 응?"

용호는 대답대신 억지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어보였다. 결승경기를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격려하는 모습이라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걸로도 족했다. 목표가 있다는 건 언제나 즐거울 따름이니까.용호는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기분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배웅할거라며 강민은 용호와 잠시 함께 걸었다.

"진호녀석, 여전해."

"응. 여전히 간지가.."

"아니, 솔직하지 못한 거 말이다. 네 결승날, 우린 같이 티비앞에 앉아 누가 이길지 내기를 걸었지. 진호는 너한테 걸었고 나는 김주혁에게 걸었었다. 무척 분해하더군, 진호가. 그 5경기 말이야..."

용호는 머릿속에서 별이 반짝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별빛으로 이루어진 따뜻한 바다일런지도 몰랐다. 길을 걸을 때마다 출렁여서 두 눈가로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민이형, 다음에는 내게 걸어주지 않을래? 나, 분명히 이길테니까."

"너, 내가 내기에 지는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열심히 안하면 혼날줄 알아?"

그렇게 용호는 오랜 벗들과 헤어졌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들의 많던 꿈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가슴팍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강민이 용호에게 준 미션은, 그 녀석(강민은 편의상 'K'로 지칭하고 있었다)이 언제고 용호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녀석에 대한 데이타를 빠짐없이 모으는 것이었다.

용호는 이미 그가 게임상에 존재하는 유닛과 비슷한 느낌이라는 걸 알고있었다. 게임 중에 유닛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라던가, 지상타격치가 항상 150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것, 공중유닛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 등이 모든 것이 그의 실체가 게임속에 유닛화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게임 속에 침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녀석과 직접 만나지 못하는 이상, 절대 승부를 낼 수는 없을테니까. 용호는 K가 나타난 2번의 경우를 떠올리고 그 공통점을 생각해보았다. 어떻게든 녀석을 한 번 더 만나야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건 용호들만이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협회측이 비슷한 시기에 수사를 개시한 것이다.





"모두들 오랜만에 모이셨습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뵙자고 한 것은,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들어 일어난 3건의 방송사고 때문입니다."

의장은 심각한 얼굴로 협회의 임원들을 바라보았다. 협회의 임원은 전부 50명, 전부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창단 이래 처음이리라.
보통은 화상채팅으로 회의를 진행하곤 했지만 이번엔 안건이 안건인 만큼 직접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부채꼴 모양의 강당에 꽉 들어찬 임원들을 살피며 의장은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 우선 이 자료화면을 주목해주십시오."

의장의 뒤편으로 커다란 영상이 떠올랐다. 확대한 스타크래프트 화면에 크게 채팅메세지가 잡히고 있었다.

"이것이, 처음 그가 나타난 때입니다. 아직 정체가 명확하지 않기에 '그'라고 부르기엔 뭐하지만 앞으로는 편의상 ‘K’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K는, 스타경기 중에 갑자기 채팅메세지를 띄우며 의도적으로 게임을 중지시키고 있습니다. 벌써 3번, 게이머들의 귀중한 경기가 무효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심각성을 깨닫고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알려진 데이타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뒤에서 두번째 줄의 임원이 손을 들어 물었다.

"알려진 데이타는 오직 채팅 메세지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채팅메세지의 특수성과, 김주혁 선수의 이름을 거론하였다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채팅 메세지의 글자체 말입니다."

의장은 막대기로 메시지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전혀 볼 수 없는 글자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낙서한 것같기도 합니다만, 아직까지의 글자체 검색 결과로는 정체불명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김주혁은 어떻습니까? 김주혁을 알고있다는 것은, 그와 원한관계에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는 K의 정체를 대강이나마 분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의장은 좌우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번, 이것은 해킹에 의한 현상이다. 2번, 이것은 바이러스에 의한 컴퓨터이상이다. 3번,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방송사의 연극이다."

"전 1번 같습니다만."

"2번은 좀 무리가 있는 것같습니다. 바이러스가 김주혁이란 이름을 거론할 수 있을까요?"

"3번은 좀 허무맹랑하군요. 분명 시청률은 높아지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소동이 계속된다면 아무도 스타를 보려하지 않을겁니다. 말그대로 스타크래프트는 사장되는 것이지요."

그 때 저마다의 의견을 듣고있던 한 청년이 손을 들었다.

"정답은 아무래도 9번이 아닐까요. 어차피 4번에서 8번까지는 의장의 평범한 생각들로 채워져있을테니까요 하하."

그 말에 모든 임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뒷자석에 앉아있던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두 정장차림을 하고있는데 혼자만 가죽잠바 차림에 덥수룩한 머리를 그냥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장은 잠시 침묵한 뒤, 가장 평범한 어투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 9번의 의견은 어떤 것인가 기욤 패트리군?"

"4번부터 8번까지도 궁금하네요 저는."

여전히 그는 의장을 장난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은 귀여워보이는 그 푸른 눈동자는 이미 모든 협회 임원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의장은 그러나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기욤군.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아. 협회의 임원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분위기 파악은 안되겠지만 지금은 분명 위급한 시기다."

"그렇게 바쁘셔서 평소에는 얼굴보기도 힘들거로군요. 아무튼 저도 시간이 없어서 간단히 결론만 내고 가겠습니다."

기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그리고 의장의 막대기를 건네받은 뒤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은 귀신의 짓입니다."

"기욤군, 장난칠 생각이라면 그만둬주게!“

"기다려주세요, 의장님. 저도 협회의 임원입니다. 게다가 의견을 물은 것은 그 쪽이라구요."

처음으로 의장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기욤은 아이달래듯 웃어보일 뿐이었다.

"자, 여러분은 컴퓨터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단순한 전자계산기에서 출발한 이 컴퓨터란 기기는, 시간이 갈수록 진화를 거듭하여 무척 복잡한 기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의 몸과 비슷할 정도로 조직이 세분화되었죠. 시각에 해당하는 그래픽카드, 청각에 해당하는 사운드카드, 지능에 해당하는 시피유라던가, 기억능에 해당하는 메모리라든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건가 대체?"

"생물과 가장 유사한 무생물을 꼽으라면 바로 이 컴퓨터일 겁니다. 실로, 인간의 자기복제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컴퓨터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인간외에 혼의 존재를 생각해본다면, 바로 이 컴퓨터 안일 겁니다."

거침없는 언변에 눌린 채 모두 입을 다물자, 기욤은 조금 숨을 가다듬은 다음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원래 컴퓨터 안에 존재하는 혼이, 혹은 다른 인간의 혼이 스타란 게임 속으로 들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이 혼은 아직 어린 혼일게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왜지?"

이마의 주름살로 소리없는 불쾌함을 표시한 의장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컴퓨터 안의 "게임"은 인간의 "놀이"에 해당합니다. 컴퓨터의 다른 프로세서를 건드리지 않고 유일하게 '스타크래프트'를 건드린 것은 그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원한다면 컴퓨터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는데 유독 스타에 집착한다는 건 그런식으로 해석가능합니다 여러분."

기욤은 육군장교처럼 막대기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마무리를 했다.

"그럼,  다른 질문은?"


기욤은 그렇게 회의장을 들쑤셔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의장은 그가 사라지자 체면치레라도 하려는 듯 남은 부분을 마저 설명했다.

"으음, 기욤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1,2,3번의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게 우선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류를 일으켰던 모든 컴퓨터는 분해되어 정말검사에 들어갔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임원과 블리자드의 임원도 참여하여 함께 공동작업을 할 것입니다. 만약, 컴퓨터의 문제로 인해 이번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면, 분명 무슨 문제가 있겠지요."

"하지만, 시체를 해부한다고 해서 혼이란 게 나타날지는..."

"쎄터 마우스! 비 콰이언트! 노 코멘트!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시오! 여러분, 지금이 몇세기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21세기 어른입니다."

의장은 끝내 속내를 드러내며 회의장을 떠났다. 그의 뒤로 임원들의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욤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다더니 정말이군 그래."

"협회의 실질적인 브레인은 기욤이 맞잖아, 지금까지의 실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이번 안건도 기욤에게 맡겨지겠군, 협회장님의 결정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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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미
05/12/12 15:38
수정 아이콘
기욤 선수가 정말로 협회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잠시 생각했습니다. ^^
미이:3
05/12/12 23:58
수정 아이콘
앗 아케미님 저도 ^^;
진호선수가 백구두 신으신 모습 왠지 보고 싶네요 =ㅗ=;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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