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프랑스 월드컵, 우리가 멕시코에서 1:3으로 허무하게 패하기 전만해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한국 국가대표팀을 세계적인 강팀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피파 랭킹은 놀랍게도 10위권이었고, 아시아 예선을 압도적으로 통과했다. 친선경기에서도 지는 경우를 거의 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지금처럼 케이블, 인터넷 채널이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매니아들이 아니고는 수준 높은 유럽 축구를 접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물론 당시 피파 랭킹 산정 방식이 상당한 헛점이 많았으며, 아시아 축구 수준은 지금보다도 더 처절했고, 강팀과의 친선 경기는 해본 적이 없었으니 패한 적도 없었던 것임을 나중에 깨달았지만 말이다.
이런 나의 착각을 더욱 크게 해준 것은 다름아닌 우리 언론사였다. 제대로 된 스포츠 언론 하나 없이 모든 스포츠는 연예 섹션과 묶였던 시대였다. 그런 황색 언론에서 정론인 마냥 기사를 쓰면 정론이 되었던 시대였다. 그들에 의하면 벨기에는 이미 맛이 간 팀이었고, 멕시코는 단연코 1승 제물이었으며, 네덜란드 만이 그나마 강팀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언론에서 떠들어 대던 우리나라의 16강 진출 시나리오는 네덜란드와 비기고, 멕시코는 무조건 잡으며, 벨기에와의 결과에 따라 2승 1무 혹은 1승 2무의 진출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올 일이다. 마침 직전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 독일을 상대로 선전했던 것도 우리의 설레발에 한 몫을 했다. 그렇게 소수인 유럽축구 매니아들을 제외하고는 일개 초딩인 나 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축구팬들이 당시 국대가 대한민국 역대 최강급 국대이며, 16강 혹은 최소 1승을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신문 기사, 98년 네덜란드 국대는 히딩크 감독이 4강에 가고도 물러나야 했던 역대급 멤버였거늘...>
그렇게 말도 안되게 높았던 기대감에서 치른 98년 월드컵이 끝난 후, 우리에게 남은 건 크나큰 상처뿐이었다. 선수 시절, 감독 시절 모두 한국 축구의 영웅이었던 차범근 감독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전세계 초유의 ‘조별리그 도중 귀국’을 겪어야만 했다. 아마 당시 외신들이 보기에 기가 막혔을 것이다. 한국이 멕시코에게 1-3, '역대급' 네덜란드에게 0-5로 패배한 것은 지금 보면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물론 국제 경험이 일천했던 탓에 대표팀이 평소보다 못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충격적인 결과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그 때의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해외에 도피중인 탈세자의 검거 현장 마냥 차범근 감독 귀국 현장은 살벌했고, 차범근 감독은 국민들에게 사죄를 했다.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볼리비아 전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표 스트라이커이었지만 커리어 내내 욕을 먹어야 했던 황선홍과 함께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월드컵 최약체 국가가 스페인과 비기고, 독일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은데다, 그 팀의 스트라이커는 독일을 상대로 멋진 칩샷을 성공했는데 자국에서 역적 취급을 당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한국의 ‘착시’ 현상은 공교롭게도 02년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 06년 독일 월드컵의 원정 첫 1승과 아까운 16강 진출 실패, 10년 남아공 월드컵의 원정 첫 16강이라는 좋은 성적 때문에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만난 알제리는 많은 해외 축구 전문가과 국내 팬들이 ‘다크호스’로 꼽았지만 그래도 언론에선 전통의 강호가 아니므로 '1승 제물’이자 조편성은 '역대급 꿀조'였다. 우리도 기성용과 손흥민이 있고, 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멤버가 건재한 데 꿀릴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14년 남아공 월드컵은 결과보다는 허술한 준비 과정 때문에 비난을 더 많이 들었으니, 이쯤부터는 우리의 ‘착시’는 어느 정도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이제 18년 러시아 월드컵이 다가왔다. 그 동안 한국팀은 월드컵에 개근하여 1승이 간절한 국가에서 세월이 무상하게도 나름 좋았던 순간, 아쉬운 순간을 모두 경험한 팀이 되었다. KBS위성채널에서나 안습 화질로 녹화 중계만을 볼 수 있었던 유럽 축구는 이제 인터넷으로,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으로 생중계로 시청이 가능하다. 생중계를 놓친 경기도 하이라이트가 아닌 ‘풀경기’로 언제 어디서나 시청이 가능하며, 더 이상 느린 속도와 외국어의 압박을 받으며 외국 언론사를 뒤척이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해외 축구 소식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좋아진 환경 덕분에 아무리 어떤 언론사에서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착시’를 유도해도, 더 이상 국민들은 속지 않는다.
아마 이렇게 낱낱이 파악된 현실 때문에, 월드컵 열기가 예전보단 차분한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오히려 국민들이나 선수들 모두 차분하게 월드컵 자체를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 된 것 같다. 매체들을 보더라도 예전 같으면 F조 상대팀들의 약점만(우리의 입장에선 전혀 아닌) 집요하게 보도하며 ‘비장한 국뽕 주입’ 및 ‘16강 가능성’ 식의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언더독임을 인정하니 특집 방송들도 예전보단 편안한 분위기 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전만해도 국민들에게 금기어시되던 축구인들의 흑역사들도 최근 예능들을 통해 회자되며 국민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주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이다. 세계인의 축제이고, 그깟 ‘공놀이’뿐인데 그 동안의 월드컵들은 과열된 기대감과 긴장감 속에서 모두가 너무나 비장했고, 끝나 후의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예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많은 졸속과 선수들의 정신력 부재 및 졸전, 그리고 선수들의 재능으로 봤을 때 분명 지금의 전력보다는 훨씬 더 좋은 팀이 될 수 있었던 기회들을 놓친 것은 매우 아쉽고, 많은 비난을 해왔다. 그러한 점들은 분명 월드컵이 끝난 후에 객관적인 문책과 정확한 사후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는 대회가 코 앞으로 다가왔고 아쉬움을 잠시 뒤로한 채, 예전보다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러시아 월드컵을 즐길 생각을 하니 개막이 다가올수록 점점 설레는 마음이 크다. 한국팀의 ‘16강 진출’ 아닌 ‘선전’을, 또 이번 월드컵은 어떤 선수와 팀들이 멋진 활약을 할지를 기대하며 월드컵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