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5/18 16:43:16
Name Night Watch
Subject [15] 신라호텔 케이크 (부제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수정됨)

희한하게 눈물이 많아졌다.

얼마 전, 점심에 사무실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으면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별안간 펑 하고 눈물이 터져버렸다. 아들이 '슈퍼 히어로'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어릴 적부터 자녀들에게
엄한 모습만을 보여 왔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 덕분에 사이가 틀어진 자식들. 우리 아버지도 꼭 그런 사람이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내가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자 "매일 아침 7시부터 축구공을 차면서 뒷산을 매일 올라갔다
오면 축구부에 들여보내 주겠다"라는 일화라던가, 무언가 내가 갖고 싶은 게 있을 때는 '그 물건이 갖고 싶은 이유, 가격,
다른 제품과의 차이점, 효능, 그 제품을 가졌을 때 기대 효과, 내가 얼마나 그 제품을 갖고싶은지에 대한 피력, 그 제품을
갖기 위해 무엇을 노력했는지' 등을 나열하여 프레젠테이션 하게 했다. 때만 쓸 줄 알던 어린 시절의 나에겐
아버지의 요구들은 너무 가혹한 것들이었고 결국 나는 아무 것도 가져보지 못한 채, 고압적이던 아버지와의 사이만
더욱 멀어진 채로, 나는 그렇게 성년이 되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 세계관 NO.2 엔데버가, 그렇게 엄한 아버지였던 엔데버가 아들인 토도로키에게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은 얼마간 꼭 틀어 막혀있던 내 눈물꼭지를 터트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씹고 있는 게 밥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네.

얼마 전에는 아버지 생신이었다. 서른 둘 먹도록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해드린 기억이 없어 맘을 크게 먹고 용돈 조금과
케이크를 준비했다. 무려 190통의 전화 끝에 예약해 낸 신라호텔 케이크. 아버지 생신 당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예약하기 어려웠던 만큼이나 비싼 값을 하는 케이크를 신라호텔에서 수령한 후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들어와서 아빠 나이 만큼의 초를 케이크에 꼽았다. 초를 꼽는 손이 덜덜 떨렸던 이유는
내게는 엄두도 못 낼 비싼 금액의 케이크인 탓이었다. 초를 케이크에 꼽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소원도 빌었다.
각기 취향이 다 다른 우리 가족이 꼭 하나 맞는 것이 있다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인데, 그 날도 영화를 보며 케이크를
접시에 덜어 먹을 참이었다.

아니 근데 웬 걸? 모든 일에 냉소적인 동생이 '이거 그냥 제과제빵 브랜드 매장에서 사온 케이크 아님?' 하며 운을 띄웠다.
원래 저런 놈이니 하고 나도 맛을 봤는데, '그러게'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맛이 별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맛이 없지는
않으나 비싼 값에 비해 뭔가가 조금 부족한 거 같은 정확히 딱 그 정도인 케이크. 나는 얼굴이 벌개져 내가 케이크를 예약하기
까지 거쳐야 했던 지난한 노력과 케이크를 안아 들고 아버지 집으로 오기까지의 순간에 대해 열변을 토했으나 동생의
놀림감이 될 뿐이었다. '그럴 거면 돈으로 주지' 하는 엄마의 장난기 섞인 비아냥도 조금 있었던 거 같고.

다음 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KTX 안에서 한 달에 전화 한 번도 할까 말까 한 사람의 이름이 핸드폰 액정에 비춰졌다.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반응해 객실칸을 나서 전화를 받았다. 평소 칭찬은 커녕 늘 나의 모자람과 잘못에 대해 꾸짖음만
늘어놓고 세상이 다 자기 위주로만 돌아간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생일 챙겨줘서 고맙다고, 서울까지 시간 내서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요런 말들을 늘어놓는데,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너무 어색하고 오글거려서 '기차 안이라 전화 오래 못 받는다.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을 돌리며 끊으려고 하는데,

"근데 그 케이크.. 아빠는 맛있더라."

그 때 그 묘했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만화 속 그 장면이 아빠의 저 발언과 겹쳐서 보였던 탓일까.
밥이 너무 짜서 물을 한 껏 들이켜야 했다. 아빠랑도 전화를 좀 자주 해야지.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22 01:1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파란무테
22/05/18 17:24
수정 아이콘
좋네요.
엄한아빠가 어쩌다보니 계속 지속되는데,
목욕탕이라도 한번 갈라치면
아버지 등이 참 작아보일때가 오더라구요
그 엄한 아버지 등이 이리도 작았나. 싶은..

저도 옛생각이 나서 끄적여봅니다.
Night Watch
22/05/18 22:39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정말 세월이 무상하기는 한가봐요
저희 아버지도.. 저에게는 한없이 무섭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양반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 말에 대꾸도 못하고
지 애비 어떻게든 이겨먹으려는 자식 놈에게 고분고분 져 주시는 거 보니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더라구요...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밀크티
22/05/18 20:2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패스트리부티크 참 전화 안받죠 ㅠㅠㅠ 여담이지만 다음에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차라리 신라호텔 프론트에 전화해서 ‘제 이름은 ooo고 전화번호는 oooo인데 패스트리부티크에 연락이 안되니 전화달라고 메시지 전달 부탁드려요’라고 하시면 한두시간 후 짬날때 전화 옵니다. 그 편이 연락하기 쉽더라구요.
Night Watch
22/05/18 22:39
수정 아이콘
앗 이런 꿀팁을!
다음에는 꼭 여친에게 바칠 케이크를 공수해보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정회원
22/05/19 12:38
수정 아이콘
나이 드셔도 본인만 믿으시던 분인데, 노환 치매가 오니 아무 소용없네요. 아무튼 진정으로 화해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상 외로 제 마음이 무덤덤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을 내려놓는 방법을 꼭 배우길 스스로 다짐합니다.
Night Watch
22/05/19 21:45
수정 아이콘
무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댓글이네요..
스스로를 내려놓는 방법, 저도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수도 없이 고민했던 생각인데도 문득 문득 아버지를 닮은 모습들에 섬짓하곤 하는데
저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판을흔들어라
22/05/20 00:39
수정 아이콘
가족 생일 때 예전에는 그냥 파리바게트나 일반 제과점 케이크를 하다가 어느 순간 나름 유명한 딸기 케이크 집들(쇼콜라윰, 달콤한 거짓말)에서 케이크를 사왔는데 확실한 반응은 아니라도 그 다음날 남는 케이크 양이 다르더군요. 맛있는 케이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24/01/29 18:27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네요.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저도...
지난 연말 누가 사온 신라호텔 흰색 트리모양 케이크랑 동네 빵집 생크림케이크 같이 먹는데
신라호텔 케이크 정말 싸구려맛이었습니다. 아래 깔린 초콜릿 베이스는 싸구려 초콜릿 먹을때 느껴지는 기름 따로노는 식감과 케익은 퍼석했으며 크림은 부드럽지 못했네요 크크
리스 제임스
24/01/30 09:34
수정 아이콘
정확히 저랑 같은 식감을 느끼셨네요 흐흐 요즘엔 빵이며 케이크며 워낙 잘 나와서 실망을 많이 했더랍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645 교육에 대한 개인적인 철학 몇 개 [23] 토루14341 22/12/23 14341
3644 (pic)2022년 한해를 되짚는 2022 Best Of The Year(BOTY) A to Z 입니다 [42] 요하네14253 22/12/21 14253
3643 설득력 있는 글쓰기를 위해 [30] 오후2시14369 22/12/21 14369
3642 요양원 이야기2 - “즐기자! 발버둥을 치더라도!” [4] 김승구14160 22/12/15 14160
3641 빠른속도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일본의 이민정책 [33] 흠흠흠14573 22/12/14 14573
3640 [풀스포] 사펑: 엣지러너, 친절한 2부짜리 비극 [46] Farce14327 22/12/13 14327
3639 팔굽혀펴기 30개 한달 후기 [43] 잠잘까15876 22/12/13 15876
3638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걸 [20] 원미동사람들12491 22/12/12 12491
3637 사랑했던 너에게 [6] 걷자집앞이야11946 22/12/09 11946
3636 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벗어나기 [14] 나는모른다13071 22/12/08 13071
3635 [일상글] 나홀로 결혼기념일 보낸이야기 [37] Hammuzzi12043 22/12/08 12043
3634 이무진의 신호등을 오케스트라로 만들어 봤습니다. [23] 포졸작곡가13782 22/12/08 13782
3633 현금사용 선택권이 필요해진 시대 [107] 及時雨15247 22/12/07 15247
3632 귀족의 품격 [51] lexicon14028 22/12/07 14028
3631 글쓰기 버튼을 가볍게 [63] 아프로디지아13649 22/12/07 13649
3630 아, 일기 그렇게 쓰는거 아닌데 [26] Fig.113580 22/12/07 13580
3629 벌금의 요금화 [79] 상록일기15552 22/12/04 15552
3628 배달도시락 1년 후기 [81] 소시15534 22/11/27 15534
3627 늘 그렇듯 집에서 마시는 별거 없는 혼술 모음입니다.jpg [28] insane13286 22/11/27 13286
3626 IVE의 After Like를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봤습니다. [7] 포졸작곡가13015 22/11/27 13015
3625 CGV가 주었던 충격 [33] 라울리스타14061 22/11/26 14061
3624 르세라핌의 antifragile을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16] 포졸작곡가14077 22/11/25 14077
3623 토끼춤과 셔플 [19] 맨발14183 22/11/24 1418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