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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1/10/24 00:19:52
Name Farce
Link #1 행사 공식 홈페이지: https://becausewearehere.co.uk/we-are-here-about/
Subject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수정됨)

[42초 부터 여성분, "자기가 죽은 사람이래요. 죽어서 여기 있대요."]

53초에 손에 쥐어준 쪽지: 알버트 로스웰 상병. 맨체스터 연대 17대대 소속. 
1916년 7월 1일 솜에서 전사. 향년 (손가락으로 가려 보이지 않음)세

"#우리가 여기 있다."

2016년은 1차 대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났던 전투인 솜(Somme)전투가 1916년 7월 1일에 시작된지 딱 100년이 된 년도였습니다.
'14-18 NOW'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어떤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예술가들은 1500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았습니다. 
이들은 미리 사전에 협약을 맺어둔 영국 곳곳의 극단과 국립극장에서 한달간 연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현대 영국의 곳곳에 나타났습니다. 마트, 지하철, 버스정류장,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말을 걸어도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이따금 때가 되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 1차 대전의 참호 속에서 군인들이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영상에서는 47초부터 시작).
한국 사람들에게는 '작별'이나, 옛 애국가로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이라는 곡의 음을 따서 부르는 간단한 노래였습니다.
가사는 한 줄 밖에 없었습니다. 'We're here because'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이
무한히 반복되는 서글픈 노래였지요.

두번 반복한다면, 'We're here because we're here'.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라는 허무개그 문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웃지 못하고, 영상처럼 울음을 섞어서 불렀지요.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유튜브 영상에 포함된 녹음은 1915년의 것으로, 이걸 녹음한 병사 역시 1916년에 전사했습니다.

1916년은 1914년에 침공한 독일군에 대한 맹렬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가득찬 해였습니다.
7월 1일에 시작된 솜 전투는, 6월 말부터 계속되던 준비사격과 폭약매립이라는 철저한 작전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온전히 버티고 있는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로 더 많은 사람을 보내서 요충지를 점령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독가스는 제한적이었고, 전차는 개발 중이었으며, 비행기는 막 도입된 정찰기를 다른 용도로 개량해보는 중이었습니다.
1918년에는 기술적인 성취와 더 많은 죽음과 절박함이 이 끔찍한 전쟁을 끝낼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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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16년에는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참호를 넘어서 올라갔고, 오전 7시 30분에 시작된 공세는 
오후 10시 30분에 중단되었습니다. 하루 사이에 전상자가 57,470명, 그 중에서 전사자가 19,240명이었습니다.

상부의 지시는 분명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포격을 하였다. 적들의 방어선은 무너졌을테니
보병은 전진하여 점령만 하면 된다'라는 것이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장군들에게는 전술의 시행착오였고,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솜에 있던 독일군의 참호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상태로,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총알을 뿜어냈습니다.

영국의 병사들은 만 하루 동안 6 km의 전선을 2 km 전진시켰습니다. 
영국의 언론은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전사자들을 묻을 공간조차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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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이미지는 상단의 링크에 제가 남긴, 행사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맡은 전사자의 인적사항이 담긴 쪽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끔 그 이상한 노래를 불렀지요.

이들은 일주일 동안 나타났습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요.
매번 하루의 행사가 끝나고, 내일 다른 장소에서 나타나기 전에

이들은 행군하듯이 한 장소에 모여서 빙빙돌면서 그 이상한 노래를 마지막으로 다같이 불렀답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리고는 마지막에 외마디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외치고는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죠. 
울분이었을까요? 도대체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면 그 많은 영국인들은 왜 참호에 있어야했던 것이었을까요?

1차 대전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 1917를 보시고, 게임 발리언트 하츠를 하시면서, 
도저히 맨 정신으로 할 수 없었던,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던 미친 참호전을 보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감히 비극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종류의 비극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말로 이야기를 끝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비슷한 행사를 해볼 수는 있겠지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한국전쟁의 군인들 역시 자원봉사자들이 시대에 맞는 군복을 입고 우리의 삶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이 불러야하는 군가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나눠주는 카드에는 어떤 전투가 적혀있을까요?

블록버스터로도 만들어졌던 인천상륙작전일까요?
처절했던 낙동강 전선의 이야기여야 할까요?
아니면 국민방위군?

허망한 참호전과 신생국가를 지키기 위한 이념의 전쟁은 분명 다른 종류의 노래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어야겠지요.

이 행사를 준비했던 예술가 제레미 델러 (Jeremy Deller)는 인터뷰에서,
행인들이 이 군인들과 같이 셀카를 찍고 싶어할 것이고, 
SNS와 유튜브에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온 영국에 솜 전투를 환기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밝혔습니다.

Selfie-generation-chester-city-centre-photo-by-Mark-Carline-small

그가 생각하기에, 행인들이 이 행사를 '즐기고', '재밌는 것 보듯이' 할 이유는 
당연히 행사에 등장하는 군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상의 파괴와 이질적인 긴장감을 주는 것이 의도였지만, 동시에 또한 재밌는 코스프레 행사처럼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1차대전을 살아서 경험한 사람은 이제 남아있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아직 살아계신 분들의 전쟁이 있는 나라에서,
나이드신 '참전용사'뿐만이 아니라, 산화한 역사속 젊은이들을 환기시켜주는 이런 '바이럴'행사는
상처입으신 분들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열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을 준비해봐야할까요.

한번 저랑 같이 고민해주시겠어요?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9-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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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1/10/24 01:29
수정 아이콘
아무것도 아닌 영상에 눈물이 납니다. 예비역을 이미 마친 전 병장 출신으로

한국 전쟁의 참화 속에서 목숨을 바친 순국 선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
21/10/24 17:47
수정 아이콘
38선은 하나의 일방적인 분계선이었지요. 그걸 피를 통해서 한국사람들은 진정한 선으로 만들었습니다. 아프고도, 확실히 갈라진 선...
참으로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은 멋진 전투 뿐만이 아니라, 솜이 그랬듯이 끔찍한 일들에서도 꽃피었지요.

그리고 이 끔찍한 선은 2021년 지금 아직도 누군가가 피를 흘리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피들에 대한 살풀이를 대한민국은 언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징병제가 폐지되고 100년 후에야 논의라고 시작할까요?
노익장
21/10/24 16:34
수정 아이콘
어마어마한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1/10/24 17:4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닙니다 아닙니다, 유튜브의 추천 영상을 보고, 검색어를 찾아서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고, 관련 인터뷰 기사를 하나 짜집기한 글에 불과합니다. 이보다도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글을 저는 피지알에서 많이 봤습니다.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칼라미티
21/10/24 16:57
수정 아이콘
노래가 참 먹먹하네요...
21/10/24 17:57
수정 아이콘
훈련소에서 나눠주는 멋진 군가도 좋지만, 정말 야전에서 불러지는 노래는 저런게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차대전에 관련해서는 이런 곡을 모아놓은 앨범이나, 후대의 연주가 많은데, 6.25에 비공식적으로 불린 노래에 관련해서는 검색해도 관련자료가 잘 안 나오더군요. 그나마 '전우야 잘자라'가 가장 가까운 존재로 보입니다.
12년째도피중
21/10/24 17:13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이 나라는 대체 무엇인가 이 신생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지 않던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한 고민이었기 때문에 더 어려웠지요. 사피엔스와 같은 빅히스토리 스타일의 책은 더 이 고민을 깊게 했습니다.
1차 대전. 이미 표면적으론 사형선고를 받은 이념들의 대결장이었기에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산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할 수 잇는 행사가 아닐까요?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저런 행사를 할 수 있을까요? 좌익과 우익 모두가 희생자라는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현재 입장에서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반일과 반공으로 형성된 존재인건가요? 그러면 그 하나가 무너지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요?

일 하다 pgr하면 꼭 이런 생각이 많이들더라구요. 그리고 글이 길어지면 "아 뭐하니 일해야지"하고 돌아가고. 크크크
이맛에 피지알 합니다.
욕심이지만 부디 Farce님은 떠나지 말고 있어주세요.
21/10/24 17:44
수정 아이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원래 이 글을 제가 쓰게 된 이유는, '이런 행사를 국방부에서 해줄리는 없지만, 한국의 의문사 장병들 이름을 가지고서 민간에서라도 했으면 좋겠다'라는 더 독기 넘치는 글을 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참호전이랑 뭐가 다른가? 죽으려고 그곳에 간 것인가? 다른 방법은 없던 것인가?'라고 글을 마구 써서 내려가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적어주신 것처럼, 대한민국의 국체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섞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6.25 행사는 매번 '과거의 비극', '참전용사에 대한 위문'에 방점을 두고, 가장 뜨거운 주제인, '현대인에게의 한국전쟁'은 꽤나 두리뭉술하게 다룹니다. 저는 가끔 6월 25일의 행사들이, '전승절'이 되어서 '세계의 선진국을 지켜낸 승리의 날'로 기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런 방어전쟁과 수호의 미사여구는 '북한과의 통일을 염원하는' 입장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거부당하겠지요. 북한에 대한 담론도 현재진행형이니, 한국전쟁 역시 결론이 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나봅니다.

며칠전에 제가 모시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세계적인 담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일본'이라는 키워드를 들으신 당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사람? 봤지. 본적있지'. 잠시 멈추시고, '일정시대에 우리 논에서 쌀 뺏어가던 놈들. 그렇게만 봤다'. 다시 멈추시고. '북한 사람이랑 똑같아. 인민군만 봤어. 애들 꼬셔서 밥 빌어먹던 놈들. 그리고는 나중에 후퇴한다고 동네 언니들이 정들어서 쫒아간다니까 개머리판으로 얼굴 때렸지.'

이런 나라에서, 글로벌 담론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추천해줘서 이런 글을 써봤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댓글 감사합니다.
21/10/25 00:46
수정 아이콘
전쟁의 참화를 겪으신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그리고 그 전쟁의 대상이 아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죽은 자들을 기억하자는 이벤트이지만 사실 이벤트 자체는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죠.
[참호 밖으로 나가면 틀림없이 죽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달리 다른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같은 감성에 공감을 이끌어내기란 어찌 보면 상당히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긍정적인 효용이 꽤 크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게 가능한 것은 말 그대로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겠죠.

참전용사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개개인의 성향이 어떻게 다를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텐데, 전쟁이 뭔지조차 모르는 애송이들이 그분들을 어떻게 상처입힐지 예측하기가 그렇게 힘들텐데, 살아계신 용사들께 예우를 다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면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싶습니다.

...써놓고 보니 못 할 말 한 것 같긴 한데...
21/10/26 16:58
수정 아이콘
에구구, 2차 접종으로 축난 몸을 추스리고 좀 뒤늦게 덧글을 답니다...

넵 저도 말씀하신 것에 동의합니다. 저건 확실히 6.25가 역사로 편입된 이후에나 가능할 행사라고 봅니다. 하지만, 제가 꼬집고자 하고 싶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아계신 분들을 모시면서 사는 대한민국이, 이런 요소에 '엄근진'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그 분들의 상처를 배려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참전용사분들께서도 원치 않으시는 일이겠지만, 한국전쟁에 관련된 날이 아니여도 이렇게 기습적으로 한번 행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군-
21/10/25 01:16
수정 아이콘
625를 재평가하려면 앞으로 50년은 더 있어야 할걸로 보여요. 비교적 최근일인 천안함이나 연평도까지 가지고 오면, 사실상 625는 현재진행형이죠...
21/10/26 17:03
수정 아이콘
참으로 긴 전쟁이군요. 하긴, 1차 대전도 이제 역사에 편입된지 몇년 안되었으니, 모든 전쟁은 참전용사들이 스러질 때까지 100년은 봐야하는 일일까요...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지금도 현실인 의문사와 부조리를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자체가 6.25에 갇혀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그게 역사적 사건이 되는 일은, 수백년이 걸릴지도, 대한민국이라는 국체 자체가 바뀌거나 사라진 이후일 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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