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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3/25 14:56:52
Name 짱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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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유머] [유머] [롤갤문학] 뼈아픈 후회 . txt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中



민기는 텅 빈 허공을 노려보았다.

3월 중순.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추운 어느 날의 오후.

숙소 인근의 공원 벤치에 민기는 홀로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건웅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넌 아무 잘못도 없뎌. 매댜야. 아니, 나를 제외하면 프로스트 모두가 깨끗해. 나먄 떠나면 돼. 나만…….’


잘못? 깨끗함? 모든 것이 건웅의 책임?

이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그들은 팀이 아니었던가. 한 명의 실수는 모두의 실수고, 한 명의 성취 또한 모두의 것.

그것이 팀이고, 또한 자신들 프로스트 아니었단 말인가.


‘프로스트는……가됵이니까…….’


그렇게 말해놓고서 떠났다. 장건웅은, 이제 막 AD Carry로서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을 때쯤 휑하니 떠나버렸다.

사실 민기는 알고 있었다. 건웅이 떠난 진짜 이유는, 팀의 부진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윈터 결승의 패배가 클끼리의 우장창창 때문인지 민성래피드스타정의 띄어쓰기 때문인지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건웅만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아니, 건웅은 원딜을 시작한 이후로 팀의 모든 패배와 실책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다.

도대체 왜였을까. 탑솔러일 때의 건웅은 그렇지 않았는데. 늘 당당하고, 거만하고, 실수 따위 개의치 않고 호쾌하게 웃던 그런 남자였는데.

“어이, 과부! 여기서 처량하게 뭐해?”

돌아보자 어느새 왔는지 벤치 뒤에는 함장식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피캔이 두 잔 들려 있었다. 민기는 따라 웃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왜 다들……떠나는 걸까.”

나란히 앉아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커피만 홀짝이길 10여 분. 민기가 무겁게 입을 뗐다. 장식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로코도, 건웅 형도……내가 서포트했던 사람들은 모두 내게서 떠났어. 왜일까. 혹시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민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조용히 자신의 커피를 다 마신 장식은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너는 너무 상냥해서 문제야.”
“상냥해서 문제라고……?”
“그래. 너무 착하고 다정해서.”

장식은 룰루성애자 페도필리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중한 목소리였다.

“건웅 형이 처음 원딜을 잡았을 때, 솔직히 좀 못했잖아. 툭하면 짤리고, 딜 넣는 것도 엉성하고 포지션도 엉망이고. 그때 네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
“내가……어떻게 했는데.”
“한 번도 건웅 형을 탓하지 않았어. 괜찮아요 형, 잘할 수 있어요, 형 잘못 아니에요, 남들이 하는 말 신경쓰지 마요, 다음부턴 더 잘할 거예요…….”

장식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민기는 숨이 막혔다.

“와드를 안한 제 잘못이에요, 여기선 제가 짤릴 테니 형은 귀환하세요, 제가 마크를 잘못 했어요, 제가 스킬을 실수했어요, 제가 딜계산을 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형은 잘하고 있어요.”

뚝, 장식의 말이 끊겼다. 장식의 눈매는 평소의 룰루 다키마쿠라를 어루만지던 그 눈이 아니었다. 블레이즈의 서포터 러스트보이가 적팀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게 민기를 괴롭게 했다.

“너는 건웅 형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지. 하지만 민기야, 건웅 형은 바보가 아니야. 자기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늘 괴로워했지. 너처럼 출중한 서포터가 자신 같은 3류 원딜 옆에서 썩고 있다는 걸.”
“그런…….”

잠자코 듣고 있던 민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건웅 형은 3류가 아니야! 최고의 원딜이라구!”

장식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 더 힘들어했던 거야. 건웅 형은.”
“…….”
“실제로 건웅 형은 점점 더 잘하게 됐고, 해외경기에서는 캐리도 몇 번이나 했지. 하지만 건웅 형은 언제나 네가 과분하다 여겼어. 언제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민기. 장식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건 민기, 네가 짊어진 업보 같은 거야. 그리고 너와 함께 할 원딜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지. 넌 세계 최고의 서포터야. 너와 함께 하는 원딜은 최고가 아니면 안 돼. 스스로의 빛이 바래는 것은 물론이고, 너까지 나락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

장식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움직일 생각도 못하는 민기에게 장식은 덧붙였다.

“나방은 빛에 홀려들지. 타죽을 걸 알면서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야. 타 죽든가, 날개를 꺾고 살아남든가.”

장식은 씁쓸하게 웃었다. 프로스트는 나방 두 마리가 불탔고, 블레이즈는 그리 될까 두려워 빛을 밖으로 내쳤다.

MIG는 결국 이런 팀인 것이다.

“날 춥다. 얼른 들어와. 오늘 헤르메스 온다잖아. 인사는 해야지.”

장식은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민기는 여전히 넋을 놓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언젠가는 해줘야 할 이야기였다. 기왕이면 같은 서포터인 자신이 해주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을 뿐.

“이걸 참, 질투를 해야할지 측은해해야 할지…….”

장식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고,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민기는 밤이 될 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로코와 웅의 얼굴이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조금 울 것 같았다. 둘 다 떠나보낼 때는 태연했는데, 이제 와서야 조금 울고 싶어졌다.

정말로 자신 때문일까. 자신 때문에……모두 망가진 걸까. 자신의 선의와 순수가 파트너를 파괴해버린 것일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언젠가 들어봤던 시구를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뜨거워지는 눈을 손등으로 꾹 누르는데, 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추워 죽겠는데 여기서 뭐하세요?”

놀라서 돌아보자, 쾌활한 인상의 청년이 서 있다.

전에 본 적이 있다. 그래, 분명히……헤르메스, 김강환. 오늘부터 자신의 새 파트너.

그는 민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싱글 잘도 웃고 있었다.

“몰랐는데 은근 시적이시네요! 저 그 시 알아요. 황지우의……그 뭐였더라. 뼈아픈 후회, 였나? 맞죠?”

시적인 건 오히려 강환 쪽이다. 제목까지 꿰고 있다니. 민기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강환은 껄껄 웃으며 손을 휘저어 보였다.

고등학교 때 언어 수업만 좋아해서요! 이런 건 잘 알고 있어요.”
“아, 네…….”
“그나저나 우리, 말 놓죠? 동갑인데.”

태연하게 민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강환이 말했다. 붙임성이 좋은 친구다. 민기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가 급히 그래, 로 정정했다. 강환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대뜸 악수를 청한다.

“천하의 매라신을 서포터로 맞게 되다니, 영광인데? 파트너 된 기념으로 악수 한 번 하자고.”

민기는 어설프게 마주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강환의 손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나는…….”

민기가 무겁게 입을 뗐다. 강환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널 부서지게 할지도 몰라. 내 옆에 있던 사람들, 내 원딜이었던 두 사람 모두 부서졌어. 그리고 어쩌면 너도 그렇게 될지 몰라.”

민기의 목소리에 습기가 찼다. 그는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난……두려워. 파트너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게. 누군가가 또 내 옆에 왔다가 다시 가버리는 게. 이제 좀 이 사람을 알 것 같은데 떠나버리는 게……두려워.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무서워.”

강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누구와도 듀오를 하지 않을 거야?”

민기는 화들짝 놀라 강환을 바라봤다. 강환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상대가 망가질 게 두려워서 함께 하지 않는다구? 떠날 게 두려워서 처음부터 인연을 만들지 않아? 그런 건 헛소리야, 매라.”

그리고 강환은 느닷없이 시구를 읊었다.


북쪽에 어여쁜 사람이 있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위태롭게 하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어찌 경성이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모르리요만
어여쁜 사람은 다시 얻기 어렵도다.


어안이 벙벙해서 멍청하게 바라보자니 강환은 멋쩍게 웃었다.

“나도 복한규만큼은 아니지만 문학소년이거든. 중국 시인 이연년이 지은 시야. 뭐, 결국 경국지색의 여인을 얻기 위해서는 나라가 기울어질 각오를 해야 하는 거고,”

강환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쳐 보였다.

“세계 최고의 서포터를 얻으려면, 원딜 수명이 불탈 각오쯤은 해야 하는 거지.”
“너…….”
“선임 두 분이랑 너랑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나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네 말대로 나도 망가지고 결국 네 곁을 떠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할 문제야. 지금은 아냐.”

강환은 재차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나는 헤르메스. 날개 신발을 신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원딜러시지. 걱정마. 네가 아무리 멀리 가 있어도 금방 쫓아갈 테니까.”

그 자신만만한 얼굴 위로,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이 스쳐간다.

굳어 있던 민기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흘렀다. 아아, 어찌 이리도 자신의 파트너들은 한결같은가.

무모하고, 자신만만하고, 그리고-


-어찌 이리도, 환히 웃는가.


아직도 강환은 손을 내밀고 있다. 민기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손을 잡고, 굳게 악수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그렇다. 진정 뼈아픈 후회는 사랑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는 것에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망가뜨릴까봐 사랑하지 않는 것에서 올 터다.

언젠가는 강환도 자신을 떠날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누가 올지는 모른다. 얼마나 많은 파트너가 자신의 곁에서 불탈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불타러 오는 나방들이 있다면, 자신을 찾는 나방이 있다면,


그래. 있는 힘껏 안아주리라.


아주 오랜만에 매라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곧 스프링 시즌이다.

봄이, 눈앞에 왔다.


---------------

헤르메스가 문학청년됨..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equ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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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25 14:57
수정 아이콘
엄청난 반전과 공포의 롤갤문학이 또있.....
13/03/25 14:59
수정 아이콘
그건 .. 여기에 올릴만한게 아니여서.. 롤갤에서 본걸로만..
아랫길
13/03/25 15:11
수정 아이콘
보고싶습니다! 링크걸기 뭣하시면 쪽지로라도 좀.... 크크크
Paranoid Android
13/03/25 15:17
수정 아이콘
저도좀알려주세요.. 충공깽 을 느끼고싶네요
제 시카입니다
13/03/25 15:28
수정 아이콘
아마 이게 아닐까요.
롤갤문학 행운을 찾아서 상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leagueoflegends1&no=1494741
롤갤문학 행운을 찾아서 하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leagueoflegends1&no=1494751
꼬미량
13/03/25 15:37
수정 아이콘
와..반전
13/03/25 15:57
수정 아이콘
으억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자음연타가 시급합니다.
Starlight
13/03/25 16:45
수정 아이콘
정말 유즈얼밤 서스펙트 네요 푸하하핫
단빵~♡
13/03/25 15:00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살만합니다
13/03/25 15:08
수정 아이콘
아 소름크크 오글오글
제 시카입니다
13/03/25 15:09
수정 아이콘
진지하게 이거 보면서 울수도 있겠네요 흐흐
엘에스디
13/03/25 15:39
수정 아이콘
으악 손발이
사티레브
13/03/25 16:54
수정 아이콘
함장식하고 홍민기는 일단 존대부터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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