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 누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준호야 온양이모부 돌아가셨대..
술기운과 잠이 뒤엉켜 멍하니 그 얘기를 들으며..아무 대답이 없자 누나가 다시 다그쳤습니다.
지금 매형가니까 너도 매형이랑 같이 가..
차를 타고 내려가며 이모부에 대해 내가 무얼 알고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8남매입니다. 삼촌 둘 이모 다섯..그중 가장 첫째가 바로 온양이모입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태어나던해 돌아가셔서 아무 기억도없고 아마 외할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을 전 온양이모에게 느꼈을겁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때까지 방학이 되면 우리 사촌형제들은 다 온양이모집으로 갔습니다. 서울에서만 살다가 가는 그곳은
언제나 신기함이었습니다. 소도 한마리 있고, 수도가 아닌 펌프로 물을 긷고, 가게라도 가려면 역말이라 불리던 버스정거장까지
가야하는 80년대의 시골집이었습니다.
그 곳에 가면 항상 이모가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고 이모부는 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소주를 드시거나
아니면 밭일을 하고 있으셨습니다.
그리고서 하시는 말씀이란게 어..승호 왔냐..하며 허허 웃음이셨습니다. 저 준혼데요..어 그래 그래..허허..
마지막으로 뵈었던 올 봄에도 어 승호 왔냐..하시더군요..
뭐라고 해야하나..이모부는 지나치게 순박하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보면 모자라다고 느껴질만큼 말이죠.
한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사셔서그러신지, 아니면 한 곳에서만 일생을 지내셔서인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가장 손윗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의견을 내놓지도 못하시고
그냥 한켠에서 술을 드시며 허허 웃으시던 모습으로만 기억됩니다.
이제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이기에 많은 주위 분들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사고로 먼저 떠난 친구도 있었고,
병환으로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도 있었고, 노환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있었고 말이죠.
사실 이모부에게 각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유난한 감동도 없었고 살가운 배려도 없었습니다.
이모부의 죽음도 슬프지만 그냥 받아들임으로 끝날 생의 한 단면이었을겁니다.
가서보니 오늘이 발인이었습니다. 어머니도 그렇고 이모도 사촌형도, 아둥바둥 사는 누나와 제게 일해야 하는 평일을 감수하는 수고를 주고싶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3일동안의 수고에 지쳤는지 사람도 몇 없고 이모도 사촌형도 형수도..사촌누나도 다들 지쳐있더군요.
늘 살가운 이모는 그 지친 와중에도 웃는 얼굴로 저를 맞아 주었고 사촌형도 왔냐..그러면서 제 손을 잡더군요.
쉬는날인데 미안하다면서요..
인사를 마치고 이모들이 있던 곳으로 갔습니다. 왜 돌아가신거야?라는 물음에 다들 머뭇대시더군요. 건강하셨잖아..어떻게 된건데..라고 막내 이모를 붙잡고물었더니 자살을 하셨답니다.
일주일전에 이모부가 사라지셨고 사흘간 찾은 끝에 집이 있던 뒷산에서 농약을 드신채 숨져있는걸 발견했답니다.
그 얘길 듣고 아까 흘낏 본 이모부의 영정사진을 다시 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모부의 얼굴을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그러하셨듯 그 어색한 웃음끼를 띈 사진이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며 마음이..참..그랬습니다..내가 알고있던 온양이모가 알고있던 사촌형이 알고있던..그 것보다 더 큰 힘듬이
그 분에게 있었나 봅니다.
뒷짐을 지고 꾸부정하게 역말까지 편식 심한 준호온다고 쏘세지를 사러가던, 쑥쓰러워 처조카인 우리들에게 목장하던 윗집에 가서 손수 우유를 가져다 주시면서도 아무 말씀도 없이 웃으며 이거 한번 먹어봐라..하시던 이모부..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꽤 있네요..
발인직전 예배를 드리느라 분주하던 때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30분쯤 멍하니 담배를 태우고 있으니 곡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리고 나오는 사촌형의 친구들이 든 이모부의 관과 울며 그 뒤를 따르는 우리 가족들..
울지 않아도 슬픔이고 아프지 않아도 괴로움이라는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절절히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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