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8/08 16:28:40
Name 레몬트위스트
Subject [일반] 오래 준비해온 대답
“독립 첫날이구나. 환자를 배정해줘도 되겠니?”
“네”
참 오래 준비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4년 동안의 간호학 공부, 실습, 국가 고시, 병원 입사와 교육, 중환자실로 부서 배치, 그리고 한 달의 중환자실 트레이닝 기간까지. 이미 입사한 동기들에게 소위 ‘태움’과 관련된 얘기를 많이 들어서 실제로 겪게 될 것이 무섭기도 했지만 얼른 똘똘한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트레이닝 기간 후 혼자 담당 환자를 맡아 보는 것을 ‘독립’이라고 일컫는다. 그동안 오래 준비 했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새로운 모르는 것들은 계속 생겼다. 환자들 상태가 좋지 않아 의사는 추가로 처방을 내고 필요한 처치를 하면, 나는, 그 처방을 수행하고 처치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보조해야 했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필기한 수첩도 뒤져가며 시간이 지나는 만큼 어느정도 혼자 일을 할 수 있는 간호사가 되었다.

어느 날 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진 40대 여성이 위급한 상태로 중환자실로 빠르게 입실했다. 중환자실에 입실하게 되면 대부분 보호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필요한 처치를 하고 있는 바쁜 와중에도 걱정이 되는 보호자들은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환자 또는 환자 담당 의료진을 찾는다. 하지만 이 여성은 입실 후 그 어디 찾는 분 하나 없었다.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있는 기계란 기계는 모두 적용중이었고, 담당 교수님도 이 지경이 되도록 왜 지금까지 병원을 오지 않았을지 가여워 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연락이 닿은 보호자는 아들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들은 학교 수업으로 연락을 못 받았다고,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왔다. 다른 보호자는 없다하여 교수님은 학생에게 엄마 상태를 설명했다. 아들은 덤덤히 끄덕였고 의식이 없는 엄마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3일이 지났다. 교수님은 이미 환자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소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아들과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를 작성한 상태였다. 사실, 중환자실에서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환자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예상된 수순대로 환자의 맥박이 느려졌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바깥에서 대기하던 아들을 인터폰 너머 호출하여 임종이 가까워졌다고 안내하고 면회를 시켰다.
이내 맥박이 0이라는 알람이 울렸다. 나는 능숙히 환자가 있는 방에 들어가 알람을 끄는 버튼을 누르고, 아들이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자동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기 직전까지도 아들은 미동도 없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뒤에서 들렸다. 자동문이 닫히기 직전 아들의 포효를. 나혼자 남기고 가면 어떡하냐는 울음이 섞인 포효. 이내 자동문은 닫혔고, 밖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적이 흘렀다.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으면 나는 과연 그 때, 오래 준비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을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전에 써놓고 묵혀놓은 글입니다.
아직도 일을 하고 있지만 가끔 생각나는 여러 일들 중 하나입니다.
글솜씨는 없지만 언젠가 한번 올리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용기를 내네요. 잘못된 문법이나 맞춤법이 발견되더라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일간베스트
23/08/08 16:3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늘 고생 많으신 직업이지요.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그럴수도있어
23/08/08 16:55
수정 아이콘
먹먹해지네요. 이런 힘든 순간들을 감당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3
수정 아이콘
할 일이 많다고 서두르다가 먹먹해져서 잠깐 멈춰 있었던 기억이... 감사합니다.
23/08/08 16:57
수정 아이콘
하아... 저도 제 가정을 꾸리고 나니까 이런 글이 더욱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네요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3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3/08/08 17:01
수정 아이콘
그 직에 종사하는 가까운 사람이 있기에 저도 몇 번 들었지만..
저라면 못했을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고생 많으십니다.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4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람이 또 해야되면 하게 되더라구요.. 허허.. 감사합니다.
23/08/08 17:44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종종 심심하실 때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세요.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인생을살아주세요
23/08/08 17:51
수정 아이콘
남일같지가 않네요ㅠ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보니.. 글 잘 읽었습니다.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5
수정 아이콘
아.. 뒤늦은 토닥토닥.. 감사합니다.
레드빠돌이
23/08/08 17:53
수정 아이콘
5일동안 중환자실 보호자실에서 숙식을 한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레몬트위스트
23/08/08 18:05
수정 아이콘
아이고.. 의식있는 상태로 있으면 너무 힘들어하시죠..
Winter_SkaDi
23/08/08 19:38
수정 아이콘
어떤 마음이실지 감히 상상도 안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화이팅!
작은대바구니만두
23/08/08 20:02
수정 아이콘
정말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이네요. 우리는 언제나 주변을 의식해야 한다는 부담에 억눌려 살고 있죠. 그 아들은 어느 때보다 더 어머니와 진심어린 사랑의 대화를 나눴을 겁니다.
이웃집개발자
23/08/08 23:36
수정 아이콘
부디 건강 챙기시고 좋은 일이 더 많이 오시길..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457 [정치] 잼버리로 인해 벌어진 이슈 정리 [64] 빼사스11524 23/08/09 11524 0
99456 [정치] 잼버리 부지 매립 속도전 위해 농지로 조성, 결국엔 패착 [102] 아이n11730 23/08/09 11730 0
99454 [정치] 윤대통령은 이재명을 만날것인가? [64] 김홍기9231 23/08/09 9231 0
99453 [일반] [노스포] 콘크리트 유토피아 - 2편이 보고싶은 잘만든 영화 [17] 만찐두빵7431 23/08/09 7431 2
99451 [정치] 보직해임 + '집단항명의 수괴’ 혐의로 조사받는 해병대 수사단장의 실명 입장 전문 [57] 겨울삼각형11022 23/08/09 11022 0
99450 [일반] 지금까지 사서 사용해본 키보드 [37] Klopp8431 23/08/09 8431 1
99449 [정치] 예산펑크로 올해 상반기에만 113조원 급전 당겨쓰는 정부 [50] 사브리자나10673 23/08/09 10673 0
99448 [정치] 생각보다 준수했던 여가부(잼버리) [315] rclay18630 23/08/09 18630 0
99447 [일반] 지자체별 태풍 카눈 특보 시작과 종료 예상 시점 [26] VictoryFood11717 23/08/09 11717 5
99446 [일반] 칼에 찔려 대항했더니 피의자로 전환 [86] Avicii16941 23/08/08 16941 23
99445 [정치] 국가행사에 군 장병이 동원되는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51] 깐프13330 23/08/08 13330 0
99444 [일반] 집 IOT 구성기 [16] 그림속동화8971 23/08/08 8971 11
99443 [일반] 새롭게 도약하는 라이프 스타일 - 2012년 [15] 쿠릭7950 23/08/08 7950 1
99442 [일반] 오래 준비해온 대답 [17] 레몬트위스트10642 23/08/08 10642 35
99441 [일반] 롤스로이스 사건 경과 [51] 빼사스13982 23/08/08 13982 0
99440 [일반] 샤니(즉, SPC) 제빵공장에서 또다시 노동자 끼임 사고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수정: 심정지 → 현재 소생하여 수술 대기중) [82] jjohny=쿠마13928 23/08/08 13928 12
99439 [정치] 조선일보: 칼부림은 게임탓 [76] 기찻길13439 23/08/08 13439 0
99438 [일반] 태풍에서 자주 보이는 hPa 는 얼마나 큰 힘일까? [18] VictoryFood12192 23/08/08 12192 0
99437 [일반] 두 초임교사의 죽음, 이 학교에서 무슨일이 벌어진것일까요? [34] nada8213132 23/08/08 13132 4
99436 [정치] 경찰 4명째…"이태원 보고서 삭제 지시 받았다" 줄 잇는 증언 [38] 톤업선크림14938 23/08/08 14938 0
99434 [정치] 해병대 1사단장 수색 압박 혐의 삭제, 국방부 위법 논란 [52] Nacht11929 23/08/07 11929 0
99433 [정치] '잼버리 불만족' 고작 4%? 해외대원 "긍정적 말 해야 한다는 압박받아" [76] Pikachu15756 23/08/07 15756 0
99432 [정치] 우리는 뉴스의 어디까지를 믿어야하는가? (feat. 잼버리) [55] 덴드로븀12882 23/08/07 1288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