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거의 정전이 된 예전에 활동했던 카페에 있던 글 가져와봤습니다. 골수 익스트림 메탈팬들...이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계시거든 함께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길 바라며...
메탈헤드들이나 평론가들은 대체로 보통 헤비메탈이란 장르의 수명은 이미 90년대 중반에 죽었다고 말을 합니다. 확실히 8,90년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해진 셀아웃. 티켓파워를 비롯해 새롭게 등장하는 루키들의 숫자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 무리는 없지만 사실 2000년대 들어서 양극화가 심해졌을 뿐이지 올드스쿨 헤비메탈의 명맥을 잇는 밴드들은 꾸준히 존재해 왔습니다.
데스메탈과 블랙메탈이라는 음악장르가 헤비메탈의 근본적인 정체성인 강렬한 금속음과 과격함, 폭력성, 인간 본연에 내재된 분노, 왜곡되고 뒤틀린 심연의 공포 등의 감정을 극단으로 진화시킨 장르다 보니 사실상 메탈팬들에게도 끝판왕으로 자리잡고 있는데요. 단순히 유튜브 조회수나 앨범 셀아웃, 해쉬태그 링크 횟수 등이 아닌 찐 골수 메탈매니아들을 중심으로 찬사를 받은 21세기 정통 데스메탈 곡들을 몇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Ascended (Finland) - Temple of Dark Offerings (2009)
2006년에 결성되어 5년간 활동하다 해체 후 2014년에 재결성하여 지금도 활동중인 핀란드의 데스메탈 밴드 Ascended의 2009년 EP앨범입니다. 전반적으로 선대 최상급 핀란드 밴드들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을 지녔는데 먼저 프로덕션은 칭찬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너무 밀폐되어있어서 뭉치지도, 너무 광활해서 산만하지도 않은 적당한 공간감에 적절히 강조되어 헤비함을 더해주는 저음역, 그러면서도 다른 음역이 묻히는 일이 없어 트레몰로 음표 하나하나 세밀하게 들립니다. 기타 톤은 가늘지는 않으면서 스웨덴 데스메탈 밴드들의 대표적인 메이저 레이블인 선라이트 프로덕션 특유의 사운드처럼 대놓고 두꺼워서 답답한 것도 아닌 적당한 두께에, 잔향이 오래도록 남아 신비한 기운이 깔리는 듯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스네어 드럼은 자칫하면 깡통 소리처럼 들려 거슬릴 수도 있었으나 다른 악기들과 융화되어 이 앨범만의 특이한 개성 정도로만 느껴집니다. 기타 채널들이 분리가 잘 되어있으면서도 너무 따로 놀지도 않아서 미묘한 트윈 기타 대위법을 상당히 잘 표현해 줍니다. 핀란드 데스메탈 밴드들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에픽한 기타 리드는 일반적인 리프들을 연주하는 기타 채널들이 전체적으로 바닥에 퍼져 있는 것과 다르게 중앙에서 약간 위쪽에 맺히는데, 적당한 에코가 신비함을 더해줍니다.
쓰다보니까 프로덕션 이야기만 엄청나게 많이 쓴 거 같은데 이정도로 얘기해야 할 만큼 프로덕션이 좋습니다. 둠/데스 라고는 하는데 사실상 그냥 느린 데스메탈 입니다. 전체적으로 딱 [핀란드 데스메탈] 하면 생각나는 스타일 중에서도 좋은 부분만을 따와서 느리게 작곡했다고 말하면 잘 설명됩니다. 느리게 꼬여들어가는 트레몰로 리프들이 핀란드 데스메탈의 레전드인 대선배격 밴드인 Demigod과 상당히 닮았는데 데미갓 정도로 모든 리프가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거나 역동적인 구조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보통 데미갓 비슷한류로 언급되는 Depravity보단 훨씬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어두운 분위기를 강조 하는데 어쿠스틱 기타가 사용되는 것도 특징입니다. 선대 핀란드 데스메탈 밴드들까지 다 포함하더라도 탑클래스에 들만큼 상당한 수준의 밴드.
2. Burial Invocation (Turkey) - Rituals of the Grotesque (2010)
이 밴드의 음악을 처음 들으면 바로 생각나는 밴드가 있습니다. 80년대에 활동했던 전설적인 영국의 데쓰/쓰레쉬 밴드 볼트스로워(Bolt Thrower). 이 밴드에게 볼트스로워스럽다는 수식어만큼 잘 들어맞는 표현도 드물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단순히 볼트스로워를 따라하는 수준을 넘어서 볼트스로워에 약간 남아있던 스래쉬적 색채를 완전히 제거하여 순수 데스메탈적인 성분만을 남긴 느낌입니다. 트레몰로 리프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서 곡의 대부분이 트레몰로 리프에 의해 전개되는데, 그 사용이 상당히 섬세하면서 불길한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 트레몰로들이 이루는 리프의 모양 자체도 꽤나 좋습니다. 보통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밴드는 미국 또는 핀란드 출신이 대부분이라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으나 국적을 알고 나서 엄청 놀랐습니다. 그나저나 이 앨범도 상당히 좋은 프로덕션을 들려주는데요, 2000년대 데스메탈을 듣는 묘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트레몰로 리프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표현해 내는 점은 앞서 소개한 Ascended의 음반과 상당히 닮았지만 그 앨범보다는 저음역이 강조되어있지 않아서 그 정도로 압도당하는 듯한 헤비함이 느껴지기 보다는 균형이 잘 잡혔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전체적으로 핵폭탄이 떨어지거나 미사일이 발사되는 듯한 급박하고 파괴적인 분위기보다는 기분나쁜 기운을 발산하며 서서히 마을을 잠식하는 흑사병을 연상시키는 음악입니다.
3. Cruciamentum (United Kingdom) - Engulfed in Desolation (2011)
처음에는 데미갓, 두 번째는 볼트스로워 같은 기라성같은 레전드들을 연상시켰다면 이번에 소개할 밴드가 연상시키는 밴드는 미국 데스메탈의 거장 인칸테이션(Incantation)입니다. 아무래도 21세기에 올드스쿨 데스메탈을 하면서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색채를 띄기는 상당히 힘든지 2000년대 올드스쿨 데스메탈 스타일의 밴드들 중에선 유명한 선대 밴드들을 흉내낸 밴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게 나쁜 현상은 아닌 게, 따라하려는 밴드들이 좋은 밴드들이다 보니까 따라 해서 나오는 결과물들도 대체로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트레몰로로 쳤다가 주법을 바꿔 찍어 누르는 다운피킹으로 치며 변하고 깨부숴지는 모나고 뒤틀린 형태의 불경스러운 리프들,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지는 블래스팅 비트... 이러한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인칸테이션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순수하게 인칸테이션의 좋은 부분만 넣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소개하는 이 곡에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는데, 같은 EP판에 수록된 트랙인 Through Gates of Morpheus Realms의 초반 구간에서는 다소 스웨덴식 선라이트적인 프로덕션류의 쓸데없이 둔탁하고 경박한 부분 등 약간 아쉬운 부분들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보이긴 합니다. 역시 데스메탈에선 기타연주할때 다운피킹 보다는 트레몰로 주법 사용이 진리구나하고 다시금 느끼게 하는....
4. Embrace of Thorns (Greece) - Praying for Absolution (2011)
결성은 1999년에 했지만 20세기에 나온 앨범은 데모 한 장 밖에 없는데다가 첫 풀렝스 앨범은 2007년에 나왔고 주 활동 시기가 21세기이기에 21세기 데스메탈로 분류하겠습니다. 소속 레이블도 그렇고, 앨범 커버도 좀 그렇고, 메탈 아카이브에 써진 장르명도 블랙/데스인데 사실상 블랙메탈적인 요소는 Necrophobic 1집 정도거나 그보다 약간 적은 정도의 수준인데다가, 보통 블랙/데스메탈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밴드들이 주로 선보이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음악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서 꽤나 놀랐습니다.
보컬이 꽤나 주목할 만한데, 높이는 일반적 데스메탈 보컬보다는 약간 높고 블랙메탈 보컬보다는 낮은, 블랙/데스라는 명칭에 꽤 잘 어울리는 음역대를 지녔습니다. 목소리는 마치 심령술사가 악령을 소환하듯 사악하고 분노에 찬 느낌인데, 오버더빙의 활용으로 사타닉한 분위기를 더욱 증대시키기도 합니다. 트레몰로 피킹을 상당히 많이 쓰는데, 대체로 일반적 워메탈의 직선적인 공격성보다는 데스메탈적인 혼돈스러움이 강합니다. 드럼이 블래스팅 비트를 치며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동안 기타는 트레몰로 주법으로 음정변화를 느리게 가져가거나 반대로 그다지 빠르지 않은 리듬에서 복잡하게 변하는 멜로디를 가져가는 식으로 그런 혼돈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보통 블랙/데스라 불리는 것들과 이 앨범을 차별화시키는 요인은 바로 멜로디의 양인데, 보통 낮게 평가받는 블랙/데스들이 대체로 멜로디가 강조되어있지 못하고 그냥 때려 부수는 사운드가 많은 반면에 이 앨범은 유연하게 펼쳐지는 트레몰로와 Necrophobic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기타 솔로 등에서 풍부한 멜로디를 보여줍니다. 일차원적인 단순함에서 탈피해서 불길한 영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상당한 수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블랙/데스라 불리는 것들 중에서 최상급이라 할 만한 음악입니다.
5. Desecresy (Finland) - The Doom Skeptron (2012)
이번에 소개하는 곡들중에 가장 특이한 음악입니다. 먹먹한 기타 톤과 디스토션 걸린 베이스는 슬럿지나 스토너 둠 장르를 연상시킵니다. 전체적으로 느린 템포를 기반으로 작곡되어있으며, 앞서 소개한 밴드들이 대부분 트레몰로 리프 기반의 풍융한 멜로디를 자랑하는 반면에 리프 자체에는 멜로디가 비교적 적은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라이트식 스웨덴 데스메탈 같이 경박한 것도 아니고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치 무의식의 세계를 건드리는 듯한 굉장히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일반적인 리프를 연주하는 기타 톤과 기타 리드의 톤이 확연히 다른데, 이 리드가 멜로디를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리드기타의 톤은 거의 클린에 가까울 정도로 디스토션이 거의 안 걸려있으며 에코가 심해서 마치 내면 깊은 곳의 심연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같은 느낌을 줍니다. 리드기타의 사용 패턴 자체도 일반적인 데스메탈과는 완전히 달라서 전체적으로 다른 핀데스들과 딱히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스타일의 음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위기가 글로 설명이 잘 안되니 직접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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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안나온 21세기 올드스쿨 데스메탈 리바이벌에서 가장 인지도 있고 좋은 결과를 뽑아낸 밴드들을 꼽으라면 Blood Incantation, Tomb Mold, Dead Congregation, Funebrarum, Drawn and Quartered, Krypts, Necrot, Phrenelith, Undergang 정도를 고르고 싶습니다. 레이블은 Dark Descent, Me Saco un Ojo, 20 Buck Spin, Memento Mori(스페인), F.D.A. 정도가 꾸준히 양질의 올드스쿨 데스메탈 밴드를 발굴하고 앨범들을 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