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를 옹호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그가 미치광이가 되면서 사람을 죽인건 옹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음
사도세자는 노론음모론자들이 참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노론에 의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세자가 희생당했다고 하지만....
그건 개소리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냥 미치광이었습니다. 근데 그 사도세자가 그냥 할일 없이 미치광이가 되었을까요?그럴리가요.. 실록의 기록에서 왕세자에 대해 나쁘게 쓸 순 없으니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머리가 좋았다는 식으로 서술되어있습니다. 근데 이게 꼭 아예 틀린말은 아닐것입니다. 다만 사도세자 본인이 영조처럼 공부벌레에 유교 경전같은 걸 읽는걸 좋아한다기보단 무인에 가까운 인물이었을 뿐이죠. (효종이 쓰던 활을 유일하게 땡겨~ 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 하니)
당장 이 시기는 이미 붕당 자체가 이미 노론 일색이 되었고 소론은 연이은 강경파들의 반란획책과 영조에 대한 조롱을 일삼으면서 개작살이 나고 조정에는 소수의 개인이 남아있을 뿐 정치적 의리를 상실한 채 숨죽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 사실은 그 이후로도 쭉 숨죽이고 있다가 소멸되죠(..)
(이후의 벽파와 시파는 그냥 노론 벽파와 노론 시파로 벽파는 물론이고 시파도 노론이 주류입니다.)
이 시기 기록을 보면 영조가 얼마나 사도세자를 갈궈대는지 보다못한 신하들이
"왕이 세자를 대하는게 너무 지나치게 가혹하다"
"신하들 보는 앞에서 지나치게 세자를 질책한다"
"세자가 왕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떤다는 데 오죽하면 그러겠냐"
"일반 백성들도 자식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 데 너무 한거 아니냐"
라는 식의 말들이 나옵니다. 아예 대놓고 신하들이 눈물을 보이면서 제발 그만좀 해달라고 하나 왕의 반응은 한결같이 "이게 다 세자가 덕이 없어서다"라면서 세자핑계를 댑니다..-_-;
오죽하면 신하들이 왕에게 이럴까요?아래에는 실록 및 한중록(..)에 기록된 것들인데 대충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그 날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다
영조 : 이게 다 세자가 부덕한 탓이다.
그 날 날씨가 천둥이 내리치는 등 사납다
영조 : 이게 다 세자가 부덕한 탓이다.
그 해 가뭄이 들어 흉년이 왔다
영조 : 이게 다 세자가 부덕한 탓이다.
그 해 농사가 대풍이고 여러모로 좋아보인다
영조 :
이제 나 왕 그만해도 될거 같다 세자보고 왕하라 해라
궁궐의 문을 닫고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 뒤에 일방적으로 선위 통보
깜작 놀란 신하들이 모두 궐 앞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내리치며 결사반대
당연히 사도세자도 나와서 거적을 깔고 대죄를 청하면서 울면서 결사반대
수일을 이래도 영조가 나몰라 하면서 왕 그만할거라고 아득바득 우기다가 왕대비가 나서서 이야기하자 그제서야 "아 나 권력에 미련없는데 크.."하면서 명령을 거두거나 심할 떈 세자보고 니가 진실로 대죄를 청하는게 사실이라면 내가 시를 읊는 동안 눈물을 흘려 효심을 증명해라 증명하면 그만할거고 안하면 왕 때려칠거니깐 그렇게 알라고 협박(..) 세자가 눈물을 보이면 신하들도 같이 울면서 세자가 증명했으니 그만해달라고 빌고 그럼 그제서야 마지못하다는 듯이 명령을 거두는데 그것도 바로 거두는게 아니라 시간을 더 들인담에 거둠
x 반복
영조 : 니는 한나라 문제랑 무제중 누가 더 훌륭하다 생각함?
사도 : 문제가 훌륭하다 생각합니다.
영조 : 지랄마라 니 기질상 당연히 무제를 좋아하고 통쾌하게 여길텐데 문제라고 답하는 건 거짓으로 나를 속이려드는거다
x 반복
영조 : 너는 책읽는게 좋음 싫음?
사도 : 싫을 떄가..좀 더 많습니다
영조 : 아 진실로 말하니 내 마음이 참으로 기쁘다. (아님)
정성왕후 서씨의 환갑잔치를 해야하지 않냐고 당시 우의정이던 김상로가 건의했는데 영조가 쿨하게 조까라면서 씹어버렸고 그 씹은 뜻을 사도세자에게 전달하면서 니 어미(적모) 환갑이라고 하례까지 받게 할 필요가 있냐?라면서 세자를 깝니다(..) 세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실망하여 내가 자식으로써 도리를 다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는것과 잠도 제대로 못잤다는 소식을 신하로부터 들은 영조 왈 "세자의 행동이 지나치다"
정성왕후 서씨 (영조의 정비, 사도세자의 적모)가 오늘내일 할 때 사도세자가 울면서 간호하고 있었는 데 영조가 온다는 소식에 깜짝놀라 부들부들 떨면서 숨다가 영조에게 들키고 갈굼당합니다.
정성왕후 서씨가 결국 죽자 장례에서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는데 영조 와서 한다는 말이 "니는 세자라는 놈이 옷꼬라지가 그게 뭐냐?"
매년 사도세자의 생일이 되면 신하들을 불러모아 사도세자의 잘잘못을 따지며 신하들 보는 앞에서 갈굼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딸인 화평옹주나 화완옹주를 보러 갈떄 세자가 무엇이든 물어보고 세자가 그것을 대답하면 귀를 씻고 양치를 한 다음 그 물을 화협옹주(미움받는 딸)이 거처하는 방향으로 버려버립니다. 이거 근데 세자가 보는 앞에서 했다고..
* 오죽하면 사도세자와 화협옹주가 만나면 서로 울면서 우리는 귀씻는 물이라고 자조했다는 기록이..
사도세자가 눈병이 걸려 세자의 스승들이 영조에게 보고하며 치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영조는 세자가 꾀병을 부린다며 거부
결국 보다못한 신하들이 세자의 눈병을 치료하게 해달라며 영조에게 말해보지만 영조 왈 "세자 그놈 책만 보면 눈아프다고 하니깐 치료할 필요 없으니깐 두번다시 말하지말라"
어느 날 밤에 영조가 동궁을 들이닥치면서 술 쳐마시자말라고 갈구기 시작
너무 억울했던 사도세자는 마시지 않았다고 해명하지만 영조는 요지부동 계속해서 사도세자를 갈구는 데 그걸 보다못한 동궁의 상궁이 마사지도 않은 술을 마셨다고 하는건 지나치니깐 한번 냄새맡아봐라 세자가 술을 마셨는가?라는 식으로 영조에게 대드는 사건이 발생했는 데 이를 본 사도세자는 그래도 영조가 아버지라고.. 아버지가 상궁에게 욕을 당했다 생각한건지 상궁에게 한소리 한 뒤 물러가게 했는데 이를 본 영조가 "어른 앞에선 견마도 꾸짖지 못한다 했는데 아비 앞에서 뭐하는 짓거리냐?"라면서 역으로 세자를 갈구기 시작하며 동궁의 신하들에게 세자 교육 똑바로 시키라며 욕하며 떠납니다...;;;
이때는 세자도 어지간히 열받았는지 방에 들어가 동궁의 신하들을 모조리 다 내쫓고 혼자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촛대가 쓰려저 동궁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지는 데 보고 받은 영조는 다시 신하들 보는 앞에서 세자를 불러 "이놈이 이제보니깐 완전히 불한당이다 왜 아주 그냥 온동네 다 불을 지르고 다니지 그러냐?"라고 끝도없이 갈구기 시작
대리청정이 결정되고 영조는 세자에게 군사와 형벌 경장을 요하는 일을 제외하면 사도세자에게 맡긴다면서 대리청정 첫날부터 세자에게 "그거 내가 정한건데 그렇게 막 바꿔도 되겠냐?"라면서 갈구기 시작하였고 이 갈굼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더더욱 거세었다. 세자의 권위따윈 안중에도 없는 왕은 틈만나면 세자를 욕했고 오죽하면 대신들이 세자가 잘하고 있는데 그 책망이 너무 과하다면서 세자를 감쌉니다. 이건 노론 소론 남인 가리지 않습니다. 그냥 당시엔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두가 세자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틈만나면 사도세자를 갈구고 욕하고 마음에 안들어하면서도 세자 외에 대안이 없던(;;;;;) 왕은 이렇게 화내다가도 곧잘 칭찬을 하고는 합니다. 물론 칭찬 1번 할동안 욕은 1000번을 했으니 그걸 칭찬을 했다고 봐야할지 의문입니다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일반 가정집에서도 부모가 저정도로 자식들을 몰아붙히면 그 자식들의 마음이 얼마나 피폐해지는 지는 뉴스와 방송등 여러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그 아버지가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직합니다.
이렇게 갈굼받던 사도세자는 싸이코패스 정신병자로 각성하여 동궁에서 틈만나면 사람 죽이는 살인귀가 됩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의 행위자체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된 원인도 영조에게 있었고 그 책임 역시 세자는 물론이고..영조에게도 있다고 봐야합니다.
시간이 흘러 훗날 정조가 되는 손자가 태어납니다. 처음엔 손자조차 싫어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영특하고 총명한 모습을 보이면서 총애하기 시작했죠.
당시 세손이던 정조를 예뻐한 영조는 틈만나면 손자를 불러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영조와 닮아서 공부를 좋아하던 정조는 영조의 기대를 뛰어넘는 답변을 하면서 영조를 기뻐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나마 의례적으로 세자에게 칭찬 한마디씩은 해주던 것도 그만둡니다. 아니 칭찬이든 갈구는거든 그냥 세자에 대한 관심자체를 꺼버린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는 또 세자가 아프다는 핑계로 왕의 문안도 안간지 벌써 여러달이 지났는데 대신 앞에서 한탄하듯 말을 꺼낸거 외엔 (다만 대신들은 기겁을 하면서 세자를 설득하겠다고 했습니다.) 별 말이 없었는데 세손은 좀만 못봐도 빨리 데려와라 보고 싶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세손과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영조 말합니다
"지금의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 300년 명백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다."
네 영조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던 세자의 확실한 대안을 찾은거죠.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세자의 아들이었던 세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도세자는 영조 몰래 관서에 갔다옵니다. 그리고 이 관서행은 온갖 추문이 꼬리에 꼬를 물기 시작하며 사도세자를 옥죄는 일이 되고 맙니다. 훗날 정조는 이것이 변란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냥 한탕 놀다온거였죠.
(이는 사도세자에게 직접 소를 올려 사도세자를 꾀어내서 관서행을 종용한 자와 그 시기 세자를 대신하여 비답을 내린 내시들을 빨리 처벌해야한다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이때가서야 세자는 그간 아프다는 핑계로 하지 않던 서연을 열고 1년만에 영조를 알현하고 세자는 이 일을 여기서 덮어두고 싶었지만 어디 그리 쉬운일일까요? 이 소문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세자는 그때마다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근데 웃기게도 이 일을 모르는 건 오로지 영조뿐이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다 아는 사실을 영조가 알게 된 건 몇달이 지난 뒤였습니다..(..) 원래같았으면 대폭발하여 세자를 갈궜겠지만 영조는 세자를 갈구지 않고 이 사건을 덮습니다.
그리고 영조가 이 사건을 덮은 지 1년이 좀 지나 세자는 자신의 거처를 뒤주로 옮기게 됩니다.
네 조선 역사상 왕실의 가장 엽기적인 사건 임오화변이 터진겁니다.
똥글의 번외글
사도세자의 광증이 극에 달하던 시점에서도 신하들은 세자를 쉴드치고 있었습니다.
영조가 그러했듯이 신하들도 사실은 대안이 없었기때문입니다.
다른 왕족이 있지 않냐?고 하겠지만 국본인 세자와 다른 왕족은 격이 다릅니다. 하물며 경종과 연잉군(영조)의 권력다툼과 택군현상 그로 인한 노론 소론의 대립과 피의 숙청을 경험한 왕과 신하들은 그런 판단을 내릴래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소위 노론 음모론에선 사도세자를 노론이 음해했다고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러했다면 모두가 알던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만 몰랐을리가 없습니다.
없는 사실을 지어낼 필요도 없죠 관서행만 해도 그냥 곧바로 왕에게 알렸으면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었을 때 영조는 어지간히 열받아하면서 신하들을 향해 "오늘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죄인이다." "내게 고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부끄럽지 않느냐?"라고 신하들을 깝니다.
세자가 왕에 의해 뒤주에 갇히기 직전까지도 당파를 떠나 신하들은 세자를 쉴드치고 있었습니다. 왜? 미래의 왕이니깐
당시 영조의 나이는 이미 역대 왕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당장 내일 죽는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니깐요.
오죽하면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몇년전에 이휘중이란 자가 상소를 올려 세자를 비판했을 때 영조는 칭찬을 하고 상을 내렸지만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걱정했죠 저놈 저거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하려고? 하면서요
그러나 대안이 생깁니다. 바로 세손의 등장이죠. 그것도 아주 똑똑한
신하들 입장에서도 사도세자는 다소 난감한데가 있었습니다. 단지 놀기 좋아하는 임금이라면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임금이라면 경우가 달랐죠. 당장 연산군만 해도 씀씀이가 해프고 놀기 좋아하던 시절엔 반정은 누구도 생각지 않았지만 갑자사화 이후 폭주하여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자 참다못한 신하들이 반정을 통해 임금을 갈아치운거처럼 노는 것과 죽이는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세자를 대신할 아니 세자를 훨씬 뛰어넘는 확실한 대안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세자도 바보는 아니라서 이런 상황을 눈치채는 데 이는 한중록에도 나옵니다.
사도 : 아마도 나는 무사하지 못할것이오. 세손을 귀히 여기시니 내가 없다한들 세손이 있는데 크게 상관하시겠는가?
혜경궁 : 세손은 저하의 아들이며 부자는 화복이 같은 법 아닙니까?
사도 : 자네는 모르네 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시면 어쩌겠는가?
두고보시게 자네는 귀여워하시니 별 일이 없겠지만 나는 병이 이미 이러하니 어찌 살게하겠는가?
사도세자의 걱정은 현실로 나타나고 말죠.
그리고 운명의 날
"정리에 구애되어 참고 견디었다가 변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장차 신민들이 병과 광기의 소치라 하여 용납하겠느냐?"
"용납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느지경이 이르겠는가?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400년 종사는 또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변란의 기미는 이미 위태로운 염려가 극에 달했으니 부득이 만고에 없던 일을 행할 수밖에 없다."
영조는 세자의 장인이자 총애하던 신하 홍봉한에게 이와 같이 말합니다. 사도세자를 제거할 것임을 분명히 한거죠.
세자의 관서행과 나경언의 고변에서도 세자를 질책할지언정 대충 덮어놓았던 영조는 이때에 이르러 세자를 확실히 제거하려고 했죠. 관서행이나 나경언의 고변이나 세자를 제거하는 극단적인 수를 쓸 정도의 명분이 되어주지 못했는 데 이때에 이르러 세자의 생모였던 영빈 이씨의 고발을 듣고 그것을 명분삼아 일을 실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날이 있기전 궁궐이 어수선하고 갑자기 유언비어가 들끓었다고 합니다. 한중록에 묘사된 세자는 이 당시 "수구를 통해 윗 대궐로 가리라" "내 반드시 '???' 하고 말 것이다." 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날 영빈 이씨가 다급하게 혜경궁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어젯밤 소문이 더욱 무서워 큰일입니다. 일이 이리 된 후이니 내가 죽어서 모르면 또 모를까 살아있으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또 세손을 구하는 것이 옳으니 내가 살아서 빈궁을 다시 볼 줄 모르겠습니까"
정확히 어떤 말들이 오고갔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한중록에서도 그 부분은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있고(..) 이 일이 기록됐을 법한 승정원 일기도 훗날 세손이 영조에게 부탁하여 전부 세초해버렸기때문입니다. 다만 영조와 영빈 이씨의 발언을 생각해본건데 (설사 홧김에 한 소리라 해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발언들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세손을 보호해야한다는 말을 한걸 보아 왕은 물론이고 세손에게까지 위협이 가해질만한 말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여튼 영빈 이씨는 세손이라도 지키기 위해 영조에게 울면서 고합니다.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옵니다. 어미 된 정리로 차마 드리지 못할 말씀이오나 성궁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편안히 하는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시옵소서."
"하지만 부자간의 정으로 차마 이러하시지만 다 세자의 병이옵니다. 병을 어찌 책망하겠나이까? 처분은 하시되 은혜를 끼쳐 세손 모자를 편안하게 하시옵소서."
영빈의 말에 더해 영조는 정성왕후의 영령(..)을 핑계삼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립니다.
본래는 세자가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어 일을 깔끔(?)하게 만들려고 했으나 자결하려는 세자를 동궁의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막아서면서 실패하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아버님 살려주시옵소서 글도 잘 읽고 이후로는 잘하겠습니다."라며 울부짖습니다. 왕에게 전하가 아닌 아버님이라 부르며 애원한거지만 영조는 끝내 아들의 절규를 외면하며 그를 뒤주에 가둬버립니다. 뒤늦게 달려온 세손이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영조에게 매달렸지만 영조는 누가 이 자리에 감히 세손을 데려왔느냐며 신하들을 질책한 뒤 세손을 데리고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결국 그렇게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죽고 맙니다.
이때 영조는 정말 무서운게 본래 성격이 지랄맞긴해서 신하들을 상대로도 온갖 욕을 다하고 열받으면 파직시키고는 했으나 변덕이 워낙 심해 일주일도 안되서 용서하고 다시 관직을 주고는 했습니다. 근데 이때 당시엔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둬놓고선 아예 관심도 안주고 편히 밥먹고 편히 잠잤죠 그리고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폐세자에서 다시 위호를 회복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이떄 한 말이 가관입니다.
"보고를 들었다. 어찌 30년 가까운 부자의 정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 대신의 뜻을 헤아려 그 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세자라 하겠노라."
영조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킵니다. 해당 일은 모두 종사를 위한 일이었다는 변명과 함께 모든 신하들이 곡에 참여하라고 명하며 사도세자를 역으로 몰 수 없게 조치를 취한 뒤 곧 세손을 동궁의 명호를 내리고 그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세손의 정통에 흠이 가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죠.
이후 영조는 틈만나면 세손(정조)에게 다짐을 받습니다.
어느날은 신하들을 불러모으고 세손 앞에서 이렇게 다짐을 받습니다.
"위호를 회복하고 사당을 세워줬으니 니 아비에겐 할만큼 다 했다." (???????????????)
"이 뒤에 그 일을 들추는 자는 곧 역신이며 너 또한 그런 말에 동요되면 할아비를 잊고 아비를 잊은 불효자가 됨을 명심하라"
세손의 속내야 어떻든 왕이 이렇게 말하니 세손이 뭐 어찌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왕은 이를 "종사를 위한 대의"라고 말했기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장례때 곡을 할 때를 빼면 대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종사를 위한 대의니깐요. 그리고 이것은 끝내 정조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1899년 고종때 가서야 왕으로 추존됩니다.)
참고로 얼굴도 모르는 효장세자는 즉위하자마자 진종으로 바로 추존합니다. 참고로 이는 영조가 살아생전 정조에게 당부한 일이었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조 본인은 정조의 정통성을 위해 한 말이라고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