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초기 병원을 자주 들락거릴 무렵의 일이다. 표적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백혈구가 500 이하로 떨어지면서 입원을 자주했다. 지방 암 전문센터의 병실이 제법 남아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워낙 약이 잘 나와서 만성골수성 백혈병이 생존률이 높은 병이라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백혈병이라고 하면 드라마에서 보던 불치병의 이미지 그 자체라 벌벌 떨면서 입원을 했더랬다.
아마도 담당 과마다 배치되는 병실이 따로 있는 모양인지 갈 때마다 대개 비슷한 병동에 입원을 하곤 했는데, 달마다 일수 도장을 찍듯 얼굴을 들이밀다 보니 익숙한 얼굴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때로 백혈구 수치가 너무 떨어져 장기 입원을 할 때면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을 사귀기도 하고 말이다. 암 병동이다보니 동병상련의 정이라고 할까.
우리 병실에는 자칭 도인이라는 69살의 노인이 있었는데 하는 말은 순 사기꾼 가짜 같은 이야기였지만 다들 그를 좋아했다.
약을 팔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익살맞고 허풍선이 같은 모습이 썩 유쾌했기 때문이다.
자칭 도인에게는 수행자다운 신비스러운 면모가 몇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여덞 명이 함께 지내는 병실에서 그가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본 이가 없다는 점이다. 도사는 똥도 안 싸나? 같은 병실에 입원한 아재들은 그렇게 웃고 말았지만 나에게는 제법 신기한 일이었다.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밤이 틀어져 부엉이가 된 내 눈에도 도사 할아버지가 화장실 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볼 일 보러 안 간다 싶은 사람들도 새벽녘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모습이 포착되곤 했는데 그는 정말 소변도 안보는 듯 했다.
두 번째는 그의 손에서 주전부리가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내가 다니던 병원 환자복에는 주머니가 없었는데 빈손이었던 도사의 손에는 어느샌가 먹을 것이 나타나곤 했다. 무언가 싸들고 다닐만한 비닐이나 가방을 갖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방문하는 가족도 없음이요 호두나 땅콩을 병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어디에서 자꾸 견과류며 이상한 옛날과자 따위를 가져왔을까
세 번째는 가장 신기하면서도 신비스러울 것도 없는 점인데 끝도 없는 노인네의 친화력이었다. 간호사나 같은 병실 남자 환자들과 친해지는 것은 그렇다치자. 여자 병실을 섭렵하고 4층 정원에서 소아 환자들과 종이접기를 하면서 노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어린 환자들에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주전부리를 나눠주다가 아이의 보호자에게 약간의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 날 그 보호자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은 어찌된 조화 말인가? 아줌마를 세상 떠나갈 듯 웃기면서 말이다.
보통 병실에서 사람들이 친해지고 나면 호구 조사 하듯 첫 번째로 하는 질문이 있는데 무슨 병으로 입원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보호자로 딸려오는 부인이나 딸이 있으면 입원 두 시간 안에 알려지는 소식이고, 남자 혼자 덜렁 누워 있으면 퇴원하거나 죽을 때까지도 모를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아직도 도사 할아버지가 무슨 병으로 입원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회진을 돌며 찾아오는 의사가 췌장,담도 쪽 전문의기에 대략 그 쪽 암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옆 침대의 아저씨가 넌지시 병을 물으면 도사 할아버지는 낄낄 웃으며 자기는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럼 왜 암 센터이 있냐고 물으면 사실 잠깐 쉬러 왔을 뿐 멀쩡하다고 했다. 의사와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데 도사는 수행을 쌓는 사람이라 보통 사람이 겪는 병은 걸리지 않는다나 뭐라나.
자기 병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새로 오는 환자마다 뭣하러 왔느냐고 병을 묻곤 했는데 내가 백혈병이라고 말하자 사주팔자를 봐주겠다고 했다. 본래는 큰 병 없이 무병장수 하는 팔자인데 지나가는 살을 맞았단다. 본래 팔자로 걸린 병이 아니니 4-5년만 조심하면 문제 없이 넘어갈 거라고 했다.
최근 5년이 지났는데 관해를 이루지 못하고 백혈병 수치가 애매하게 걸쳐 있으니 도사님 말씀이 맞다고 칭송을 해야할지, 돌팔이라 욕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본인에게 직접 물으면 그 뛰어난 말솜씨로 되려 나를 몰아부칠 것이 뻔하다. 사주팔자에는 태어난 시도 중요한데 시간을 부정확하게 알려준 탓이라느니, 몸 관리를 못한 탓이라느니 레퍼토리가 뻔하게 그려진다.
도사 할아버지는 본인이 매번 가지고 다니는 주전부리를 나에게도 나눠주곤 했다. 나는 항상 그것을 먹지 않고 받아다가 서랍 한 켠에 놔두었다. 백혈구 수치가 낮을 때에는 아무거나 줏어먹다가 탈이 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라는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아 그저 설사가 자주 난다고 애둘러 말하고는 했다.
어느날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져 곧 격리병동에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병 초창기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상태였기에 나의 기분은 우울 그 자체였다. 병원을 돌아다니며 잔뜩 사교를 나누고 온 도사 할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 둘은 그렇게 친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대뜸 큰 일이 났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서 격리되야 할지도 모른데요."
"이거 먹으면 나아."
도사 할아버지는 나에게 특별한 주전부리를 건넸다. 평소 들고다니던 견과류나 옛날 과자 따위가 아니라 아몬드가 송송 박힌 동그란 모양의 고급 초콜릿이었다.
"내가 연단을 좀 하는데 이것도 내가 먹으려고 아껴둔거야. 이거 먹으면 다 낫는다."
나는 도사 할아버지가 준 주전부리를 처음으로 낼름 받아먹었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식사도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가 당부를 하던 때였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홀린 듯 초콜릿을 삼키고 나자 도사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원래 좀 더 쉬다 갈려고 했는데 밑천을 털렸으니 이제 가야겠다. 너두 좀 쉬다가 집에 가렴"
얼마 뒤 내 백혈구 수치는 드라마틱하게 800으로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 기운이 탁 풀렸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미룬 잠을 자고 났더니 도사 할아버지가 누워있던 침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정말 쉬는 기분으로 며칠을 편안하게 병원에 있다가 백혈구 수치가 안정화 되는 걸 보고 퇴원했다.
그 뒤로 한 두 번 더 혈액암 병동에 입원했지만 도사 할아버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같은 병동에 머물던 환자 동료들이나 장기 입원 환자들은 종종 그를 그리워했다. 지금도 마음이 초조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암 병동에 와서도 허허롭던 그 웃음이 떠오르곤 한다.
도사님은 산으로 돌아갔을까, 신선이 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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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과의 친화력(참새들이 어깨에 내려와 앉음), 무한 낙관주의(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허허허 웃음), 신비스런 행위(어느샌가 저걸?), 번듯한 직업도 없고 가난하지만 또 필요한 돈이나 물건은 어디선가 생겨서 돈걱정 안함, 천진난만함(아이들과 아이같이 놀음),당시엔 좀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기억됨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