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다섯시, 따뜻한 것이 먹고 싶어 옆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바닥을 쓸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뭘 먹을까 고민을 하다 베지밀을 골랐다. 청소 하시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계산을 해달라고 말씀 드렸다.
간만에 허리를 펴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팔십이 훌쩍 넘는 키였지만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피곤에 찌든 얼굴이 그를 왜소하게 보이게끔 하였다.
평소때라면 카드를 내밀었을 테지만 그날은 왜인지 현금 결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잔돈이 있었기에 가격을 지불했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베지밀이 금방 식어버릴 것 같아 창 밖이 보이는 곳에 가서 베지밀을 홀짝 거리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다섯시까지 오라고 말 해 놓고는 정확한 주소를 찍어주지 않는 광고 제작사를 욕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보니 답장이 왔다. 주소를 검색해 보니 길 건너편 오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베지밀을 쓰레기통에 넣고 편의점을 나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편의점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 오더니 날 붙잡았다.
“아니. 사람이… 돈도 안내고 그러시면 어떡해요?”
“예?”
“아니 내가 청소하면서 쓰레기통을 다 비웠는데 베지밀 한병이 딱 있는거야… 그거 당신이 돈도 안내고 먹은 거잖아.”
“아니. 아저씨 무슨 말씀이세요. 저 계산 했잖아요.”
“하. 진짜 사람 참…”
바로 떠오른 생각은 휴대폰으로 온 카드 결제 내역을 보여 주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필 그날 현금 결제를 했다.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씨씨티비였다.
“아저씨. 카운터에 씨씨티비 있죠? 그거 한번 보시죠.”
아저씨는 도둑놈 새퀴가 적반하장이라는 듯이 어디 그럽시다 라고 한다.
하지만 그때 또 때마침 전화가 온다.
“아니. 다섯시까지 오라니깐 왜 안오세요.”
‘니가 정확한 주소 안 찍어주고 어디역 근처라고만 해서 대기 타고 있었잖아. 주소도 이제 막 알려 줬음시롱.’
라고 말했다면 좋았을 것을… 오분전 아저씨의 행동에 복수하려는 듯 그분에게 들었던 말을 되돌려 주듯 말을 던지고 건널목을 건넜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마자 늦게 왔다고 조연출에게 엄청 혼났다. 일을 시작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고. 쓸고 닦고 막말 듣고 옮기고 구르고 쌍욕 듣는 일이었다. 보통 연출자 성질이 불 같으면 조연출은 착하던데 여긴 둘다 꼬라지가 영 거시기 했다. 모델 없이 이런 저런 촬영을 진행하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광고 출연자가 도착 하였다. 스마트하고 젠틀한 스타였다. 로마 황제 같이 군림하던 감독이 버선발로 마중나가서 모셔온다. 그 옆에 조연출이 잔뜩 굽신거리며 돕는다.
저녁이 되고 스타는 퇴근했지만 촬영은 새벽 다섯시까지 이어졌다. 꼬박 스물네시간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몸이 녹초가 되었다. 여섯시가 될 때쯤 촬영은 끝이 났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가 간신히 나오고 촬영팀, 조명팀 등등의 팀들이 후다닥 본인들 짐을 챙기고 퇴근했다. 뒷정리를 하며 쓰레기를 쓸어담기 시작했다. 오십리터 짜리 쓰레기 봉투 열 개가 가득 채워졌다. 시간은 오전 일곱시를 지나고 있다. 조연출이 집에 안 갈거냐고 짜증을 낸다. 빨리 정리하겠다고 말한 후 양손에 쓰레기 봉투를 하나씩 들고 쓰레기장으로 달려 나갔다. 오분 거리였다.
결국 촬영은 여섯시에 끝났지만 내 퇴근은 여덟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발을 질질 끌고 집으로 향했다. 고개를 푹 숙인채 길을 걷다 고개를 들었다. 그 편의점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어제 그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짝반짝 잘 닦여진 편의점 창문에 피곤에 찌든 한 남자의 모습이 비춰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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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현금 결제를 했는데 그런일이 있었다니
예정된 시나리오 같네요. 용서하고 좋게 끝내는게 베스트였겠지만요. 사람들과 다 좋게 좋게 지내는게 바램만으론 힘들고 지혜가 많아야 하는거 같아요.
다음부터 비슷한 상황에서 이날의 기억을 계기로 더 유하고 온화하게 넘어갈수 있으면 이날의 가치는 큰것일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