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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1/05 15:49:33
Name 엘케인
Subject [일반] 어택과 고고클럽
1.
고등학교를 시지역으로 유학했던 나는
그다지 친구가 많지 않았다.
밖에선 유한 편이긴 하지만, 그리 좋은 성격이라고는 볼 수 없었고
운동신경도 좋지 않아서 친구들 사귀는게 쉽진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다른 지방에서 유학온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어서
거기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며 그나마 지금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2.
90년대 중반은 누가 뭐래도 농구가 최고였다.
마지막 승부, 연고전, 그리고 슬램덩크.

교문에 크게 '전기대합격율 00프로'가 붙어있는 비평준고등학교였지만
운동장 한 켠 사각농구골대에는 항상 남자애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그 골대가 있는 위치는 여학생 교실쪽이어서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여학생들이 벤치에 몇 명 앉아있기라도 하면
아이들의 플레이도 엄청 거칠어지고 그랬다.

3.
7 to 22 의 엄청난 수업시간을 갖고 있으면서도, 학교에서는 다양한 써클활동을 인정했었다.
방송반, 도서부, 편집부(맞나?) 등 장학금까지 나오는 3대 학교써클들도 있었고
각 종교별 써클들, 선배들의 족보를 공유하던 3대 학습써클.
그리고 종목별로 운동써클도 있었는데
농구는 '헉스'라는 이름의 써클이 꽤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
(저 헉스가 'hawks'을 뜻한다는 건 거의 졸업할때야 알게 되었다)

1학년 봄, 출신학교별로 농구 좀 한다는 녀석들은 저 헉스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해 여름, 싸이즈가 좀 작거나 지방에서 올라와서 나름 리쿠르팅(?)에 제외된 아이들이 '쏘나마나'라는 써클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학년 중 농구 잘하는 녀석들은 대부분 저 '쏘나'와 '헉스' 소속이었다.
뭐 나중에 시 지역대회엔 막 섞어서 나가기도 했었던 것 같다.

4.
남자반이 다섯반이나 되고, 저 두 써클에 들어갈 수 있는 애들은 몇 안되기 때문에
한 2학년쯤 되니 나머지 아이들도 무리를 지어 놀기 시작했다.
그냥 농구장 근처에 있으면 대충 실력 맞춰서 노는 아이들이었지만,
2학년 여름쯤, 시 지역인지 도 지역인지 아무튼 꽤 큰 지역단위의 농구대회가 열리면서
그 '무리'가 여러개 실체화되었다.
(같은 지역 고등학생 한 명이, 야간자율학습이 '자율'이 아니라고 헌법소원인지 뭔지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그 해 여름엔 자율학습이 사라졌던 탓도 분명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 한 무리에 끼어서
참가자에게 지급하는 반팔티를 입고, 지역의 한 학교 농구코트를 뛰었었다.
주전도 아닌 식스맨이었고, 경기도 바로 져서 광탈했지만
거기 참가한게 나한테는 엄청난 사건이어서, 그 반팔옷이 헤질때까지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 기억이 난다.

5.
뭐하다 얘기가 여기까지 샜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때쯤 생긴 써클 하나가 '어택'이었다.
난 그 써클 소속은 아니었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1학년때 같은 반이어서 친하게 지냈었다.
이 모임은 졸업을 하고도 유지가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다들 유부남이 된 지금이야 만날 일이 별로 없지만,
한 두명씩 결혼을 하고 애들 돌잔치를 할 때 까지만 해도 거의 모였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모임이 아닐까 싶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한 나에게는, 여전히 연락하는 유일한 모임이 되어버렸다.

웃긴건 저 모임에
다른 고등학교를 다녔던 녀석도 한 명 있고, 시 지역에서는 순위권이었던 그 '쏘나' 멤버도 있다는 거다.
단지 얼굴이 까맣다는 이유로 "쪼단"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녀석의
월미도에서 술 마시고 보일러를 잡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보게된 월미도 디스코팡팡 영상에 의해 떠올려지며
이렇게 월도질을 하게 된 거다.

*******************************************************************************************************************

6.
대학생이 되고,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SES는 데뷔하고 핑클이 데뷔하기 직전에, 난 군대에 갔다.
그때쯤 스타크래프트와 피씨방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최신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스타를 배우고자 했으나...
대대에서 제일 좋은 피씨를 쓰면 뭘하나... 시간이 없는데...
(대대 교육계였지요. 하는 일은 많은데 뭐 간부들이랑 농담따먹기 하는거 말곤 권한이 쥐꼬리만큼도 없었던 듯)

그래서 제대하고 맨날천날 누워서 게임방송을 봤다.
99pko였나? 그거부터 시작해서 '임대건'의 게임큐, 그리고 온게임넷까지.

복학을 하고보니, 스타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있어도
나처럼 많이 게임방송을 본 녀석은 없었다.

7.
현대건축론 수업시간이었나.
애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다가 스타 얘기가 나와서, 공강시간에 자웅을 겨뤄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게임비 내기 헌터 3:3 경기.

우리 팀명은 'cul de sac'. 수업시간에 나오는 용어였는데... 막힌 도로라는 뜻이었나? 아무튼.
상대 팀명은 '고고클럽'. 얘들 전부 학사경고 2회 이상인 녀석들이었다.

경기는 2저그를 고른 쿨 데 삭의 완승. 몇 판을 했는데 2플토의 고고클럽이 2저그를 이길 수는 없었고
다음 수업시간이 되자 쿨 데 삭 녀석들은 다 수업에 가야한다며 퇴장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팀 녀석들... 전부 학점도 좋았고, 다들 유학을 갔다오기도 했고... 뭐

8.
난 분명히 쿨데삭 팀이었고, 경기를 이겼지만,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기고 수업에 쏙 들어간 친구들을 비난하며 게임을 계속했다.
사실 난, 학사경고를 2번 맞지만 않았을뿐, 나머지 세 녀석과 별 차이가 안나는 성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평소에도 요 녀석들과 더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고고클럽의 석패가 무척이나 분했었던 것 같다.
(군대가기전 네 학기 동안 난 학점이 2.0을 넘겨본 적이 없다. 물론 마지막 학기는 0점대로 학고를 받았고.)

'우리가 공부는 못해도 게임까지 져야하냐'라는 얘기를 하며
복수전을 하겠다고 게임방을 다니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그 날이었고,
나중엔 같이 스터디도 하고, 메가웹도 가고, 월드컵 응원도 같이 하고...
20년이 흐른 지금도 같이 만나서 골프도 치고 그러는 사이가 되었다.(나는 배울 기회가 없어서 못 끼지만)

9.
코로나 때문에 이 친구들을 못 본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어택도, 고고클럽도,
지금 돌아보면 그냥 나랑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편해하는 사람이어서 아직까지 어울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도, 지금도, 참 고마운 녀석들이다.

어택 애들 만나서 농구도 한 판 하고 싶고
오랜만에 헌터에서 질럿 좀 뽑고 싶다.

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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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時雨
20/11/05 16:04
수정 아이콘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글을 보려고 자유게시판에 오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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