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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04 21:57
좋은글 감사합니다.
삼각형의 세각의 합이 180라는 것은 신이라도 부정하지 못할껄세... ^^:; 명언이네요 종교와 과학에 대한 명언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08/10/04 22:00
이런 글들이 저를 pgr에서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정기법과 평기법은 예전,<역사,다시보기>중 ‘우리 역사속 달력이야기’에서 말씀드렸으므로 생략^^ 이 부분을 보고 happyend님이 쓰신 글중에 있는줄 알고 검색해봤는데 없는것 같네요.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요??
08/10/04 22:31
삼각형의 세각의 합이 180라는 것은 신이라도 부정하지 못할껄세...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으로는 변하는것이 아닐까요?
08/10/04 22:50
수학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하신얘긴데 삼각형의 세각의 합은 실제로는 180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지구가 둥그니까 삼각형을 지구위에서 그렸을때 합이 180이 안된다고 하셨어요
워낙 선생님이 개그기질이 있어서 그냥 받아들였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선생님 말이 맞긴 맞는 말 같아요
08/10/04 23:14
좋은글 잘 봤습니다.
알던 내용도 모르던 내용도 좀더 정리되어서 머릿속에 입력됐습니다. ^^ Dizzy님// 찾아보셔서 없다면.. 아마도.. 테스터형님의 세상읽기에 있을겁니다. 매주 연재를 하셨거든요.
08/10/04 23:49
Dizzy 님// <역사,다시보기>코너는 사정상 내렸습니다.이유는 묻지 말아주세요.흐엉....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만,제가 숫기가 없어서 거의 닫힌 공간으로 운영하므로....음...자게에 다시 그 글을 올렸습니다.(제가 무슨 짓을 하는건지....음....)
08/10/05 10:37
전 가끔 하는 생각이
지구가 리셋되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인간세상이 올 것이며 현재와 같은 서양강세가 이루어질 것인지.. 결국엔 인터넷 시대가 올 것인지가 궁금하더라구요 뭐 답이 없는 그냥 망상이지만요 -_-;
08/10/05 10:54
happyend님// 하나 딴지정도 걸자면, 십자군 원정때 유럽인에게 큰 쇼크를 준 이슬람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바탕을 둔다고 정의하기가 너무 좁지 않나요? 제가 아는 지식으로는 수리학과 통계학은 인도로 부터, 의학및 화학과 천문학은 그리스및 지중해 문화권에서 흡수되서 중동지역의 다른 문화 혹은 상위문화로 발달된것이라고 보는데요. 물론, 역사서 몇몇에선 인도의 수리학이 중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거의 무시하는 경향도 있긴하지만요.
08/10/05 11:41
성야무인님//십자군 원정때 유럽인들이 가져온 것은 후추와 '도서관의 장서'라는 뜻입니다.즉,그리스 문명을 담은 '고서-두루마리 양피지'가 서양으로 들어온 것이고,그것이 중세유럽사회에 파장을 미친것입니다.물론,이슬람,인도,혹은 중국까지 문명의 단편들이 함께 건너갔지만 말입니다.
08/10/05 12:08
딱새 님//그런 질문을 한 일본인 종교학자가 있었지요.전공투세대이며,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동경대 생물학과를 다니다가 우연히 호주의 원주민들이 '고등수열'을 구사한다는 이야기를 읽고,인류문명의 탄생그지점에 다시 서보고자 종교학과로 전과한 사람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란 양반인데,그분이 쓴 '카이에 소바주'시리즈가 도움이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08/10/05 12:28
happyend님// 전 그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아시다시티 현그리스와 터키서부를 포함한 비잔틴 왕국이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을때 비잔틴의 황제가 교황에게 구원해달라는 그걸로 시작됩니다. 실제 1272년 9차원정을 마칠때까지 십자군이 유린한 땅은 현터키,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일부, 이집트 그리고 이스라엘까지 거의 중동의 문명지라고 하는 곳은 모조리 휩쓸고 다니죠. 그와중에 1204년에 십자군 의해 그당시 최강의 문화를 지녔던 콘스탄틴노플이 쑥대밭에 되서 이태리의 부를 축적시키게 된다는것도 아실겁니다. 허나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곳에 있는 문화가 단순히 그리스 문화가 대다수이며 이슬람문화자체가 단편적이다라고 판단할수 있을만큼 축적된 정도가 편향되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사를 보더라도, 근대 실험의학(페르시아의 아비시나라는 과학자입니다)의 시작은 십자군에 의한 이슬람원정때 이슬람의사에 의한 획기적인 치료법을 본 십자군원정대가 충격을 받아 그 의술을 채용하게 되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의학도 이태리가 십자군 원정이후로 막강해졌죠. 따라서 단순히 문화적이라는 표현을 받아드리면야 당연히 그리스문화쪽에 십자군원정이후 유럽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단순히 과학의 영향만따진다면 그리스문화하나만으로 하실수는 없습니다..
08/10/05 16:05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박지원이 평소 귀동냥했던 홍대용의 지전설을 청나라 학자들에게 펼쳐보이며 지구는 구이고 한바퀴 자전하면 하루가 지난다라는 설을 이야기하는게 나옵니다. 문제는 이런 이론이 정교한 천문과학의 바탕이 아니라 서학의 자극을 받은 동양적인 철학적 사색의 결과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결코 자기 주장을 할 수 없었던 이단이기도 했구요. 당시 조선은 오직 주자만을 외치며 더욱 더 폐쇄적인 외길로 돌진하고 있었죠.
08/10/05 18:34
될대로되라 님//본문에도 있습니다만, 홍대용의 지전설이 실험의 결과가 아니라고 한다면,코페르티쿠스의 지동설도 엄밀한 실험의 결과라기 보다는 사색과 고대 그리스의 문헌의 도움에 의해 얻어진 결과입니다.차이가 그다지 없지요.
다만 둘의 차이는 서양과학과 동양과학의 정서적 차이를 넘어 상업국가와 농업국가의 차이라는 본질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양상이 달랐던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갈릴레오에게 이어졌지만 홍대용의 지전설(이건 엄밀히 말해서 서인-노론의 이데올로기이며 그 창시자는 김석문입니다.김석문은 김육의 후예이고요)은 그 후예가 없다는 차이가 있고요. 특히 홍대용은 '실험'과 '기하학'의 요소를 동양과학에 도입하려고 했던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그는 집안마당에 연못을 파고,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을 만들기도 했거든요. 단지,사색의 결과라고만 하기엔,홍대용의 의미가 좀 크다고 여겨져서 말씀드려봤습니다. 성야무인님//^^ (오래전부터 궁금한건데,엔터키는 일부러 안치시는건가요?)
08/10/05 18:54
happyend님//홍대용이 대나무를 이용한 여러 실험,관측기구를 만든건 유명하죠. 제가 동양철학적 사색이라고 말한건 연암이 지전설에 대해 자기 의견을 피력한 부분입니다. 연암의 견해로는 지구가 구가 맞다면 구의 성질 상 돌게 되어 있다라는 식의 다소 비약적인 논리전개가 펼쳐지죠. 무리하게 해석하면 관성의 법칙을 이야기한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근대과학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봅니다.
물론 지전설이 연암의 이론이 아니라 홍대용의 이론을 연암이 단순히 인용한거라 근대적인 과학자 상에 접근한 홍대용과 같은 인물은 연암과는 다른 과학적인 추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불행히도 철저히 비주류였던지라 남아 있는 자료는 없는걸로 압니다. 있다면 소개 좀 부탁합니다.
08/10/05 19:05
happyend님//첨언하자면 조선이 자생적인 지전설이나 과학적인 성과를 폄하하는건 아닙니다. 오로지 아쉬울 따름이죠. 조금이라도 자생적인 근대성이 꽃피려하면 사문난적이니 폐관문학이니 이단이니 하며 밟아버린 당시 풍조가 안타깝습니다.
08/10/05 19:06
될대로되라 님//먼저 사실관계부터 정리를 좀 하구요.
홍대용이 만든 것은 대나무가 아니라, 정교한 천문기기입니다.대략 현재 금액으로 5000만원정도가 소요되었고요(물론 이돈은 홍대용의 부친이 지원해주었습니다.)제작자는 호남의 실학적 발명가였던 '나경적'이란 분입니다.만든 것은 '천체관측용 혼천의'(이것은 기계식 혼천의이며 이것의 모델은 송이영의 혼천의-현재 만원짜리에 있는-입니다.고려대 박물관소장)와 '모형 혼천의'(현재 이것은 숭실대 박물관에 남아있습니다.이것도 청동으로 만든 것입니다.)그리고 별자리를 담은 혼상(물레방아에 의해 움직이며,동양적 철학에 입각하여 만든 기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만들고 나서 북경을 다녀온 뒤,서양천문학의 이론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것이 측고의의 일종인 '구고의'와 간평의인 '측관의'입니다.모든 정교한 청동제품입니다.(간평의를 보시려면,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만든 것을 '고궁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농수각기(주해수용의 부록)에 정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전설에 대한 자료도 <의산문답>이란 걸작속에 매우 멋드러지게 표현되어있습니다.
08/10/05 19:35
happyend님// 그게 머리에서 쓰고 싶은건 많은데, 쓰다보니까 삭제, 수정을 반복하는 나머지 줄띄우기가 귀찮아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
08/10/05 21:15
글쎄요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실측과 이론의 차이라기 보다는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차이가 아닐까요?? 서양에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이론이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합치되어 있던 상태에서 지동설-천동설간에 대립이 있었고 자연과학이 당시 카톨릭의 권위에 저항하면서 종교적인 권위를 획득합니다. 그에 비해서 동양에서 지동설이 큰 의미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지동설이던 천동설이던 그걸 주장한 사람은 그냥 쓸데없는 일을 하는것일 뿐이죠.. 그리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말죠..쓸모가 있냐 없냐 이건좀 고민하구요 지식으로 확인되더라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물에 대한 것이였고 반면에 유교문화권에서 중요하게 본것은 인간이였구요.. 정확하게 말하면 지배층 입장에서 아랫사람들이 불만을 안갖게 하는 방법?? 다른 왕조국가에서도 위에 사실들은 비슷했구요 지식의 발전이 왕의 위엄을 깨치는것이 아니죠 다만 수레가 무너지면 만든 사람만 처형될뿐 당시 서양과학은 종교적인 권위를 대체하고 기술발달의 치열함 속에서 인정되고 자리잡았다고 봅니다. (과학이 기술적 발달에 도움이 된것은 19세기 후반에 2차 산업혁명때 부터라고 봅니다.) 아직도 문화적인 전통 자체가 전달되었다기 보다는 수단으로써 과학기술이 동양에 왔고 근본적으로 서양의 종교라는 왕권을 능가하는 권위?? 이런게 없던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 아닐까 봅니다. 동양에선 진리보단 사람이죠~~
08/10/05 21:34
happend님//살짝 오해하신거 같은데 홍대용이 대나무만으로 모든 기구를 만들었다는게 아니라 손수 대나무를 이용한 기구를 많이 만들었다는 얘기를 한겁니다. 즉 당시 유학자 중 가장 근대적인 실험정신을 가졌다는 얘기를 한겁니다만..
홍대용에 관해 좋은 애기를 많이 해주시니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08/10/05 21:46
될대로되라 님//^^
펠릭스~님// 전혀 그렇지 않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조선의 과학사는 개인적으로 '홍대용인가 홍대용이 아닌가'로 나뉩니다. 홍대용이외의 성리학적 세계관(특히 남인을 중심으로 한)은 중세 카톨릭적 세계관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서인-노론(일부 소론)의 세계관은 확실하게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과 유사성을 가지고 전개합니다. 전자가 '중농주의자'이고,후자가 '중상주의자'인 것도 서양의 방식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르지만,한국의 과학사도 세계사적 보편성을 가지고 전개되었습니다. (예전에,<역사,다시보기-'홍대용인가 홍대용이 아닌가'에서도 말씀드렸고,앞으로 과학사에 관해서 얘기할 기회가 된다면 실증적으로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조선과학사는 이렇기 때문에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비록 그것이 찻잔속의 태풍일지 몰라도,엄연히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08/10/05 21:55
happyend님// 네...
이건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단지 다른 해석일 뿐이라고 봅니다만 전 홍대용이 당시 노론에 지식관이 틀리다는것을 밝혔더라도 그냥 노론이 수용했고 기죽는 정도에서 끝났을꺼라고 봅니다. 당시 가치관 차제가 지식이 무엇인가 보다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교양이였으니까요 수용했을 것입니다. 지식적인 것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어떤 권위를 획득할순 없어다고 봅니다.
08/10/05 22:06
펠릭스~님// 급하게 쓰셔서 그런건지,제가 잘 이해 못했는지 모르지만,말씀하신게 이런건가요?
'홍대용이 왜 노론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느냐?' 이것인가요? 이게 맞다면 홍대용은 노론 핵심가문사람입니다.박지원과 더불어서요.석실서원자체가 노론,그중에서도 낙론의 이론중심지였거든요. (보충하자면,노론도 도시화와 세계화 속에서 분화되어 서울중심의 도시파인 '낙론'과 시골 선비들 중심인 '호론'으로 나뉩니다.) 낙론의 이데올로기가 홍대용의 사상을 낳았지요.그러니 수용하고 자시고 할 것은 없습니다.그러나 결정적으로 낙론과 홍대용이 결별한 것이 바로 '우주관'때문입니다.홍대용은 우주를 현실적 실험대상으로 인정하고 있었고,낙론의 김원행(홍대용의 스승)의 제자들과 일부 서울의 소론들은 관념적 우주로 '주역체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가령,이익도 '서양의 천문학도 모든 걸 말할 수 있지 않다면 주역이 옳은게 아닐까...'라고 독백합니다. 서양의 우주관은 17세기 시헌력의 도입과 만국곤여지도의 수입,천문략과 오위역지와 같은 서양 천문학서가 들어오고 난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숙제를 던졌습니다. 오로지 홍대용만이 '기하학과 실험,관측'으로서 우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의 이론을 수용할 준비가 안된 조선사회의 문제도 있었겠죠.대부분의 학문은 '서원'이나 '문도'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홍대용은 평생 벗이라곤 '박지원'하나 뿐이었고,제자도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홍대용의 생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북학파'라는 정치문화적 흐름으로 표현되었고,그들의 사상이 '개화파'에게 이어졌고,일부는 '최한기'의 '기론'으로 전수되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홍대용은 다시 재조명되고 있으니 외로운 사상가이긴 하지만 고립된 사상가는 아닙니다.
08/10/05 22:14
happyend님// 음..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조금 다르게 생각한것은 과학적인 사실?? 이것을 가지고 문화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격론이 일어날 환경이 아니였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홍대용은 그것이 중요하다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중요한지.. 아니 사실은 천국이라는 존재를 허용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구성되었던 중세 기독교적인 좀 특이한것이긴 합니다만.... 우리 문화권에선 그런 기하학적,천문학적 지식이 중요한것이 아니였으면.. 주역적인 우주관이 틀렸다?? 라고 말하지만 유교철학 자체가 과학적인 사실을 엄밀하게 추구했다고 보기 어렵고 지식이란 측면에서 쉽게 수용했을거라고 봅니다. 다만 유교적 체제에서 과학이 발달할수 있는 여건은 오히려 좋았는데 왕이 닥치고 관리 임용시험에 필수로 넣었으면... 폭팔적으로 발전했을거라고 봅니다. 지금도 비슷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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