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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24 16:16
언제나 그렇듯, 좋은 글 감사합니다. 1년만에 귀국했는데 한국은 더 답답하네요. 부모님들은 여전히 이명박 두둔하시는 걸 보면 정말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현명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제 부모님들이지만 너무 답답하고 어이가 없지요. 앞으로 더 심각해지기만 할 이 상황들을 어찌 견뎌낼지 참 궁금합니다. 지난 5년간 그랬듯 노무현 탓만 할지.
08/09/24 16:19
그저 감사한 글입니다
당시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happyend님// 선조의 경우 처럼 대체로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보신만 전전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08/09/24 16:41
아우디 사라비아 님// 멋대가리 없고 무능하고 보신에만 전전하지 않은 왕조는 세계사 어디를 찾아봐도 없습니다.굳이 조선왕조만 더 욕먹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선조에 관해서 말한다면,제 개인적으로는 연산군 이래,조선왕조는 신권과 왕권의 대립과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신하들이 왕을 밀어내고,왕은 신하들을 죽이고...선조는 이런 와중에 왕권을 지키기 위해 '붕당정치'를 이용합니다.이것은 선조의 능력이지만 우리나라로선 저주일수도 있긴 합니다만,시대가 시대이니 인정해줄 필요는 있겠지요. 다만,동인,서인으로 분화된 붕당정치에 대해서는 조금더 세련된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서양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시대상황에서 분화된 것이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문제이듯이 동인과 서인도 그렇습니다. 동인은 왕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를 신봉=카톨릭적 세계관과 비슷한 왕도정치를 추구했고요,그래서 이들이 서학의 주체적 수용자가 됩니다. 서인은 신하들에 의한 귀족정치를 신봉했고요,이것이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과 비슷한 '상업'중심,기술중심의 새로운 세계,평등한 우주론을 추구했고요,그래서 이들에 의해 개화사상이 주체적으로 수용됩니다. 따라서,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선조임금시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분기점이었던 것이고,이들의 대립이 서양처럼 벌어지지 않고,조당의 혈투로 끝난 것은 '임진왜란'때문일 것입니다.그래서 서양의 동양사학자는 임진왜란이 조선왕조의 명줄을 이어줬다고 말하더군요. 그냥,제 의견일 뿐입니다.
08/09/24 16:48
왜군 전술이 스페인의 테르시오와 꽤 유사하네요. 테르시오의 제 2 화력인 아르퀘부스 총병 대신 궁병이라고나 할까..
잘 읽었습니다.
08/09/24 17:15
1. 3단철포와 비슷한 개념은 선조조차 임란전에 승자총통에 대해 평하면서 저런 전술을 내 놓은바 있습니다. 무릇 사람이란 다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마련이니까요.
2. 녹둔도는 이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렸습니다. 여의도와 같은 섬이었는데 북쪽강이 퇴적에 의해 말라버리면서 러시아 영토와 붙어버렸거든요. 3. 이경록에 대해 제가 늘 인용하는 선조의 용인술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조정은 일본의 침입을 대비하여 능력있는 무장을 품계와 상관없이 승진시켜 전방에 배치했습니다. 이 중 충무공과 이경록은 비변사에서는 부적당하는 평을 받아 승진 리스트에 없었는데 선조가 특별히 이 두사람을 채용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립니다. 선조가 아니었으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없을뻔 했죠. 선조가 비열했긴 했지만 왕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그걸 백성을 위해 쓰지 않고 왕조의 영달을 위해 썼다는게 안습이긴 하지만요. 실제로 선조의 충무공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종5품 현령에서 중4품, 종3품으로까지 초고속 출세를 했는데 이게 다 비변사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른 선조의 특별한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에 관련된 실록의 기사들입니다. 선조 23권, 22년 1589 기축 1월 21일(기사)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 채용(不次採用)한다고 하자, 이산해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 중략... 추천하였다. ====================================================================== 선조 23권, 22년 1589 기축 7월 28일(계유) 좌부승지 황우한(黃佑漢)이 비변사의 밀계로써 아뢰기를 ...중략... (전란을 대비해 각지의 지방관들을 배치하는 내용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 선조 25권, 24년 1591 신묘 2월 12일(기묘) 비변사 낭청이 아뢰기를, “이천(李薦)·이억기(李億祺)·양응지(梁應地)·이순신(李純臣)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상(선조)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 선조 25권, 24년 1591 신묘 2월 13일(경진) ...전략... “전라 감사 이광(李洸)은 지금 자헌 대부에 가자하고, 윤두수(尹斗壽)는 호조 판서에, 이증(李增)은 대사헌에, 진도 군수 이순신(李舜臣)은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 선조 25권, 24년 1591 신묘 2월 16일(계미)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 (안돼, 안돼, 안돼)...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08/09/24 17:35
마술사얀님///으아아악!!!!
이운룡으로 바꿨습니다.죄송합니다.정신없이 글을 쓰다보니....(아무래도 생업에 쫓기면서 쓰느라...)
08/09/24 17:38
오타 지적합니다.
세계 대 공[황] 입니다. 세계 대공항.... 왠지 문명에서의 원더 같군요. 세계적인 초거대 공항! 비행기가 얼마나 들어갈런지....(펑) ...농담이었습니다 ^^;;
08/09/24 19:01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실제로 3단철포의 경우에는 2단철포에 가깝지요. 편성제는 총병-궁병-창병이 맞습니다. 기마대라 해봐야 일본산 '조랑말'로 겨우 우회돌격정도가 가능한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기마대는 기마대지만.. 이런전술이 확립된것은 일본중세의 사무라이 중심-필요할때 아시가루 소집 체제에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직업군인/용병제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작 백명단위의 땅따먹기 놀이에서 만/십만 단위의 대규모 전쟁이 가능해진것도 그 유산이지요. 그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무인천시풍조'가 더 문제였습니다 그때는.. 제 자리만을 탐하고 부귀영달을 원하는 집권자는 어느나라 어느시대에도 있었으니까요. 현재 상황은 그런것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황이란게 문제지만 말이죠. 펠쨩(염통)님/ 문제는 승자총통과 조총의 레벨이 틀렸다는데 있겠죠. ^^ 포르투갈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최고로 개량된 다네가시마는 그 시대치고는 좀 사기급이었습니다.
08/09/24 23:11
//happyend
으흑~ 저희 재령이씨 집안의 유일한 유명인 이운룡 장군이 나오는군요! (물론 또 다른 현대의 유명인 이문열씨가 있지만요. -_-;) 이운룡 장군이 충무공의 부장으로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걸 보아왔었지만, 이렇게 자세히는 몰랐었는데 감사합니다~! P.S. 이운룡 장군이 해전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도와서 공을 세운 걸로 알고있는데 그 부분도 자세히 알고싶네요!
08/09/25 08:35
오만과나태 님//이운룡장군은 녹둔도전투의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1589년 옥포만호로 부임합니다.이곳에서 임진왜란을 맞았고요.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에게 뺏길것을 염려하여 무기와 배를 수장시켰습니다.그런일은 경상우수영에서도 벌어져서 우후(수사 바로 아래 직급,우후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가 자체 판단하여 무기와 배를 버립니다.그리고 수군마저 해체하며 가까운 성으로 달려가 그곳에 합류하라고 합니다. 뒤늦게 이 상황을 알게 된 경상우수사 원균은 자포자기했습니다만,이운룡은 그를 설득합니다.경상도앞바다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그의 계략에 따라 몸을 사리고 출병하지 않는 이순신을 설득,출전시킵니다. 통영에 가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거제도로 들어가는 입구인 견내량은 판옥선이 드나들기엔 어려웠습니다.한산섬 앞바다까지 유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요.그런데 이 유인작전을 세우고 수행하기엔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이 물길도 상황도 알기 어려웠습니다.이운룡은 이 유인계를 직접 이순신에게 제출하고,유인작적을 이끌 배에 오릅니다.거제도에 있는 옥포만호였던 그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요.결과는 아시다시피 유인작전에 걸려든 왜군들이 한산섬앞에 펼쳐진 '학익진'에 참패,이른바 '한산대첩'이 벌어집니다. 이운룡은 칠천량해전 당시 좌천되어 육지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유지,장수들이 수장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제 7대 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안았습니다만 이순신과 닮아 탄핵을 여러번 당했고, 병영일기인 <거영일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08/09/25 14:10
오만과나태 님//영정조 시대를 이끌었던 이념적 주축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입니다만,현재 국역본이 없습니다.그러면서,영정조시대에 대해 다들 말하고 있고요...연암박지원의 책들도 심지어 고려사도 북역본을 봐야 하는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필요한 것이고요,그런 의미에서 제글이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의 전공을 말하면,자연과학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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