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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9/24 15:56:16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북방의 두사람
1.
1586년 2월. 얼어붙은 함경도로 말을 몰아 조산 만호 이순신이 부임했습니다.

조산보는 두만강가의 절벽에 있어서 한눈에 북방의 야인(여진족)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오른쪽으로는 두만강의 수심이 가장 얕아 동해로 빠져들어가는 길목이라 겨울만 되면 얼어붙은 강을 건너 야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입니다.

북방의 곡창지대를 수비하는 최후의 기지이기도 한 이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만큼 어지간한 뱃심이 없는 장수들은 부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이 파직을 거듭하며 무과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최하급인 9급 권관까지 떨어졌던 이순신을 4년여 만에 불러들인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두만강 가운데 여의도처럼 생긴 ‘녹둔도’라는 섬에는 둔전을 설치했는데, 이 둔전을 관리하는 행정책임은 경흥부사가, 군사적 책임은 조산만호가 가졌습니다. 녹둔도 둔전관의 자리에 있던 김경눌은 여진족이 무서워 이미 도망간 탓에 조산만호는 둔전관자리까지 겸해야 했던 것이지요.(물론, 겸직은 1587년 4월부터이니 만호 부임 1년 뒤의 일입니다만)

“절묘한 때에 왔군.”
조산만호로 부임한 이순신을 보며 경흥부사 이경록이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아마 평생을 두고 ‘파벌’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던 이순신에게 유일한 파벌이 이경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은 동접,즉 무과 급제 동기였으니까요. 친구라곤 없는 냉정한 이순신에게 이경록은 유일한 벗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경록은 이순신을 연민가득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른말만 하는 이 뻣뻣한 친구가 북방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가? 하기야,북방이 다급하지 않다면 나를 부를 이 없겠지.”
이순신은 허연 입김을 불어내며 허허롭게 말했습니다. 북방. 그곳은 신립의 땅이고, 또한 이일의 땅이었습니다. 그나마 신립장군이 있었을 때 이순신은 호방한 그의 보호를 받아왔습니다만, 이번은 다르리란 걸 알았지요. 그의 일생의 라이벌, 이일이 북방의 최고 책임자인 ‘북병사’였으니까요.

“어찌되었든 조심하게. 자네를 겨눈 것은 강 건너 야인만은 아닐세.”
이경록은 긴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그는 불똥이 자기에게도 뛸 것이란 걸 짐작했습니다. 이순신은 무심한 눈을 벌판으로 가져갈 뿐,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4년전인 1582년 10월, 종4품 만호에서 종9품 권관으로 추락한 이순신은 두만강 중류의 건원보에 있었지요. 상관의 잘못을 눈감아주지 않은 댓가는 혹독해서, 무과출신은 기본적으로 종8품에서 시작한다는 품계마저 무너뜨리는 좌천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나마도 2년 만에 얻은 벼슬. 고향에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북방행을 명령받았습니다.
이때 북방은 니탕개를 중심으로 여진족이 부흥, 신립장군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니탕개의 난’이 벌어져 한바탕 난리였으니, 일손이 모자라면 부지깽이라도 쓰듯, 이순신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과 이일은 이때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일개 권관인 이순신이 적의 추장 울기내를 함정에 빠뜨려 사로잡았는데, 이것이 ‘귀족주의자 이일’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조선의 장수가 야인 따위를 잡기 위해 권모술수를 쓰다니...”
그는 이순신을 부끄러워했지요.
“병법은 멋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매복하고, 필요하다면 함정을 파고,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이순신은 조금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같은 사람이 있어서 무장은 문신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일세.”
이일은 차갑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모든 분란의 씨앗일 뿐이야.자네가 가는 곳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지?자네 상관들은 모욕을 당했고,존경받아야 할 장수들은 체면을 잃었으며,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지.”
조산만호로 부임하는 길에 들렀던 북병영에서 이일은 이순신과 눈도 부딪히지 않고 말했습니다. 이순신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야 했지요.
“칼엔 왜 날이 두 개인 줄 아는가?”
이일은 칼날을 이순신에게 겨누면서 말했습니다.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일이 눈꼬리를 떨면서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칼은 남을 겨눌때 동시에 나도 겨누기 때문이네. 자넨,내 말을 명심하게. 자네의 칼은 어디를 겨누든 자네를 겨눌 것이네.”
떨어지는 칼날을 받아내듯 이순신은 이일의 증오를 받아냈습니다.

그런 이일이 이순신을 눈여겨보는 가운데 가을이 되었습니다. 두만강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북병사 이일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선전관 선거이를 조산보와 경흥부로 자주 보냈습니다.

2.

추수철이 다가오자 야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정보를 모아온 이순신은 다급하게 북병영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병사가 모자랍니다. 병사를 더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지요.
“어디 그곳만 다급하더냐? 다른 곳도 다 힘겹게 야인들을 막고 있다. 혼자 앓는 소리하지 마라.”

이경록은 어두운 얼굴로 이순신에게 말했습니다.
“북병사 영감께선 자네를 시험하는 것일까?”
이순신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무슨 이득을 보겠는가?”
말은 그러했으나 이순신의 마음도 무거웠습니다. 목책을 더 세우고 병사를 더 단단히 다그쳐보아도 몇 개의 부족이 손을 잡고 녹둔도에 휘몰아쳐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지요.

1587년 10월 10일. 이날은 안개가 짙게 꼈습니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첫 추수를 감독하는 이순신에겐 떨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추수할 백성들을 데리고 온 이경록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자네의 손에 많은 것이 달렸네.”
이순신은 가장 아끼는 군관 이운룡에게 말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나리.”
이운룡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감이 넘쳤지만 이순신은 그저 안타까웠습니다. 여진족이 들이닥친다면 누가 죽을 것인가. 여진족을 겨눈 나의 칼날에 나의 무엇이 잘라질 것인가....그는 씩씩한 뒷모습을 한 이운룡을 보며 괜히 울적해졌습니다.

이운룡은 이미 이순신의 싹수를 되밟고 있었지요. 갓 무과에 합격한 스물여섯 청년이었지만, 패기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지략이 뛰어났습니다. 병영내 사냥놀이라도 벌어지면 그는 오로지 지략으로 승부했습니다. 후에 이순신이 이운룡을 자신의 후예라고 말한 것도 다 이런 이유였습니다. 전장의 여우. 그것이 이운룡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감상에 젖을 틈이 없었지요. 순식간에 여진족이 목책을 무너뜨리며 쳐들어왔습니다. 군관 오형과 임경번을 비롯하여 10명의 군사가 죽었고, 여러필의 말과 106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이경록은 즉각 병사들을 녹둔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훗날 전승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에 올라 안개가 걷히자마자 맹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곳엔 미리 대포까지 준비해둔 터라 여진족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적들이 도망간다.”
백성들과 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만, 이경록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포로가 너무 많이 붙잡혀갔네.”
전승대에선 두만강을 건너며 울부짖는 조선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이순신의 얼굴도 어두워졌습니다.

잠시후, ‘와’하는 소리가 여진족이 도망치는 길에서 들려오더니 말들이 후두두 쓰러지고 놀라서 날 뛰기 시작했습니다. 여진족의 퇴로를 미리 예측한 이운룡이 매복해 있었던 것이지요. 이운룡의 기습공격과 이순신, 이경록의 추격에 혼비백산한 여진족은 도망치기 바빴고 60여명의 포로도 되찾았습니다. 이것이 ‘녹둔도 전투’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일은 펄쩍 뛰었습니다.
“이순신,기어코...네가 나를 잡으려는구나.”
이일은 이순신이 언제나 그랬듯이 상관을 능멸하는 글을 올려 자신의 목을 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 대단한 집안 출신도 아닌 일개 무관이었던 그가 북병사의 길에 올라,신립장군이 그러했듯이 국민적 영웅이 되길 바랐던 모든 꿈이 한순간에 헛되게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순신보다 앞서 장계를 써 올렸습니다.

“신 이일, 엎드려 아뢰옵니다. 조산보 만호이자 녹둔도 둔전관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은 오랑캐가 녹둔도의 목책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쳐 전사 10여명이 죽임을 당하고 10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잡아가두었습니다”

이순신과 이경록은 패장의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사형까지 각오해야 하는 순간이었지요.이순신을 체포하러 온 선거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임 만호 원균처럼 북병사영감께 뇌물이라도 바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혀를 찼습니다. 그러나 선조임금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엔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그때, 밤을 달려 한통의 편지가 어전에 도착했습니다. 온성부사 이억기가 보낸 편지였지요.
이억기는 스물을 넘긴 나이에 무과에 1등으로 뽑혔고, 좋은 집안 출신답게 온화하고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가장 오랫동안 직위를 유지한 인물이 바로 이억기입니다. 전라우수사로 이순신과 같은 때인 1591년에 부임한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파직이나 이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전쟁때였는데도 그러했으니 그의 안정감은 알아줄만합니다.

(이억기에 대한 미담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실패로 죽음을 앞에 둔 순간, 자살을 선택합니다. 부하들이 그의 허리를 붙들고 울며 말렸습니다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조선의 장수다. 적의 탄환에 죽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서른 여덟의 꽃같은 장수의 최후였습니다.

후에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진 이순신 추모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뒤늦게 사당을 지었던 선조는 그나마도 이순신 단독 사당을 꺼려하여 이억기와의 공동사당을 지었습니다. 그것이 ‘충민사’입니다.)

아무튼지간에 스물 일곱의 젊은 부사 이억기는 이순신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는 것을 적극 주장했습니다.
“적의 수는 많았으나 물리쳤고, 포로를 되찾아온 공로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북방은 위험했습니다. 장수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는 이억기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본 조정신료들과 유성룡의 맹활약을 앞세워 이순신과 이경록은 ‘백의종군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입니다.

3.

이일, 그는 ‘김종서추종자’입니다. 그에게 가장 위대한 무장은 김종서였습니다. 우아함과 강력함을 가진 무장. 그는 조조를 부끄러워하고 관우를 신봉하던 조선시대 무장들의 전형과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유명한 ‘제승방략군’의 신봉자이며 완성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가 단지 속좁은 무장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승방략군이란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정해진 곳에 집결하면 중앙에서 무관이 내려와 지휘하는 지금으로 보면 민방위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엔 정규군이 없었던 것이지요.

고대의 전쟁이야 모두가 갈고 벼 베다가 끌려나온 농민들이 옷만 걸치면 군사가 되는 시절이니 장수의 능력에 좌우되겠지만 이미 시대는 변했습니다.
압록강주변의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이나 통일전쟁을 거친 일본의 군사들은 정규군중심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요. 상황이 이렇게 변하던 시절,김종서 이래 200년 평화의 산물을 손에 쥔 이일.그는 우아하지만 시대착오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임진왜란에서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을 1년 앞두고 군사체계 개편을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왜적은 물에 강하니 뭍에서 싸워 이기려는 전략’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지키는 장수는 그저 그런 장수들인 박홍,원균,이순신,이억기로 채웠고 진짜 알짜배기 장수들은 육군에 배치했습니다.

현재 중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길은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최단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임진왜란 시작과 함께 일본의 세 개의 진출군 가운데 중군이 올라와 한양을 최단시간안에 점령합니다.
상주,충주,용인.....
이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제승방략군이 소집됩니다.

첫번째 길목을 막아서기 위해 경상도의 백성들이 낫과 호미와 쇠스랑을 들고 우르르 모여든 곳이 상주. 전쟁소식이 날아들자마자 갑옷을 입고 서울의 호위군사만을 이끌고 상주로 내달린 ‘고대귀족장수’는 이일이었습니다. 제승방략군의 주창자요 완성자답게 그는 의기양양해서 도착합니다.하지만 그를 기다린 사람들은 오합지졸.적의 조총소리가 한번 울린 뒤 남은 것은 백성들이 버리고 도망간 낫,호미,쇠스랑....

두 번째 제승방략군이 소집된 충주, 세번째의 용인인들 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양은 한달도 못되어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지요.

구시대의 눈에 비친 이순신은 그냥, 내부고발자였고, 간교한 이였으며, 체면을 깍아내는데 골몰하는 천박한 인물이었습니다.
깨끗하나 무능한 진보,그것이 북방에서의 이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 대부분은 이순신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의 후손들 조차도...

4.

이전에 <임진왜란과 화약전쟁>에서 ‘일본군의 조총전술’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못찾겠네요.이런 죄송할데가.......

대신,그 논문을 읽으면서 해두었던 메모만을 찾았습니다.

‘한 번 쏘은 후 다음번 쏠때까지 시간이 걸리다보니 그 시간동안 상대가 몰아쳐오면 속수무책이 되는 단점이 조총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조총을 쏘는 조총병,창을 사용하는 창병,활을 쏘는 궁병으로 3개조로 부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대략 한 부대에 조총병은 350명이고 창병은 640명, 궁병은 9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조총병이 한 발 쏘고 난 뒤 재장전할 동안의 시간을 벌기 위해 궁병이 화살을 쏩니다.둘이 번갈아 총쏘고 활쏘고 할 동안 상대편의 전열이 무너지면 가장 많은 수로 구성된 창병이 달려가고,뒤에 있던 기마병이 달려들어서 완전히 제압합니다.
톱니바퀴처럼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일본병사들은 엄청난 훈련을 통해 이 전술을 익혔다고 합니다.‘

전술의 이름도 쓰임도 찾지 못한데다 제가 전쟁사나 일본역사에 무지한 까닭에 보충하지 못한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북방의 두사람>이란 글을 써보았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왜 그토록,초기에 한양을 쉽게 빼앗겼는지, 왜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하지 않았는지,용인전투의 치욕은 어디서 나왔는지를 북방의 두사람,이순신과 이일의 전쟁관의 차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조선의 장수들의 이데올로기는 고대전투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지요.)

저에게 이순신은 ‘영웅’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을 푸는 첫 번째 열쇠같은 존재입니다. 영웅을 만든 것은 영웅 자신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영웅을 필요로 해서인가....그래서 이순신보다 이순신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더 보려고 합니다.


난파선에 오르지 않는 쥐들과 같은 감각으로 사람들은 위기를 느끼는 걸지도 모릅니다.경제위기에 빠진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스스로 불러들입니다.
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불안감에 떨고 있는 국민들에게 이런 공약을 내겁니다.
“모든 차고에는 자가용을! 모든 냄비에는 닭고기를!”
미국인은 기꺼이 영혼을 후버에게 팔았습니다.그리고 그 댓가는 세계 대공황이었습니다.

우리가 작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것은 ‘난파선에 오르지 않는 쥐’의 감각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작년까지만해도 그렇게 먹고 살만하다던 주변사람들이 올해는 다른 말들을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부디 역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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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준
08/09/24 16:16
수정 아이콘
언제나 그렇듯, 좋은 글 감사합니다. 1년만에 귀국했는데 한국은 더 답답하네요. 부모님들은 여전히 이명박 두둔하시는 걸 보면 정말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현명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제 부모님들이지만 너무 답답하고 어이가 없지요. 앞으로 더 심각해지기만 할 이 상황들을 어찌 견뎌낼지 참 궁금합니다. 지난 5년간 그랬듯 노무현 탓만 할지.
아우디 사라비
08/09/24 16:19
수정 아이콘
그저 감사한 글입니다

당시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happyend님// 선조의 경우 처럼 대체로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보신만 전전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탕한봉지
08/09/24 16:2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NovembeRain
08/09/24 16:23
수정 아이콘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Neo_Knight
08/09/24 16:2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음 글이 또 기달려지네요. ^ ^
happyend
08/09/24 16:41
수정 아이콘
아우디 사라비아 님// 멋대가리 없고 무능하고 보신에만 전전하지 않은 왕조는 세계사 어디를 찾아봐도 없습니다.굳이 조선왕조만 더 욕먹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선조에 관해서 말한다면,제 개인적으로는 연산군 이래,조선왕조는 신권과 왕권의 대립과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신하들이 왕을 밀어내고,왕은 신하들을 죽이고...선조는 이런 와중에 왕권을 지키기 위해 '붕당정치'를 이용합니다.이것은 선조의 능력이지만 우리나라로선 저주일수도 있긴 합니다만,시대가 시대이니 인정해줄 필요는 있겠지요.

다만,동인,서인으로 분화된 붕당정치에 대해서는 조금더 세련된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서양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시대상황에서 분화된 것이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문제이듯이 동인과 서인도 그렇습니다.
동인은 왕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를 신봉=카톨릭적 세계관과 비슷한 왕도정치를 추구했고요,그래서 이들이 서학의 주체적 수용자가 됩니다.
서인은 신하들에 의한 귀족정치를 신봉했고요,이것이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과 비슷한 '상업'중심,기술중심의 새로운 세계,평등한 우주론을 추구했고요,그래서 이들에 의해 개화사상이 주체적으로 수용됩니다.

따라서,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선조임금시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분기점이었던 것이고,이들의 대립이 서양처럼 벌어지지 않고,조당의 혈투로 끝난 것은 '임진왜란'때문일 것입니다.그래서 서양의 동양사학자는 임진왜란이 조선왕조의 명줄을 이어줬다고 말하더군요.

그냥,제 의견일 뿐입니다.
A_Terran
08/09/24 16:48
수정 아이콘
왜군 전술이 스페인의 테르시오와 꽤 유사하네요. 테르시오의 제 2 화력인 아르퀘부스 총병 대신 궁병이라고나 할까..
잘 읽었습니다.
08/09/24 17:04
수정 아이콘
언제나 기대에 부응하는 글을 쓰시는 군요..^^
펠쨩~(염통)
08/09/24 17:15
수정 아이콘
1. 3단철포와 비슷한 개념은 선조조차 임란전에 승자총통에 대해 평하면서 저런 전술을 내 놓은바 있습니다. 무릇 사람이란 다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마련이니까요.

2. 녹둔도는 이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렸습니다. 여의도와 같은 섬이었는데 북쪽강이 퇴적에 의해 말라버리면서 러시아 영토와 붙어버렸거든요.

3. 이경록에 대해 제가 늘 인용하는 선조의 용인술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조정은 일본의 침입을 대비하여 능력있는 무장을 품계와 상관없이 승진시켜 전방에 배치했습니다. 이 중 충무공과 이경록은 비변사에서는 부적당하는 평을 받아 승진 리스트에 없었는데 선조가 특별히 이 두사람을 채용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립니다. 선조가 아니었으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없을뻔 했죠. 선조가 비열했긴 했지만 왕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그걸 백성을 위해 쓰지 않고 왕조의 영달을 위해 썼다는게 안습이긴 하지만요.

실제로 선조의 충무공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종5품 현령에서 중4품, 종3품으로까지 초고속 출세를 했는데 이게 다 비변사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른 선조의 특별한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에 관련된 실록의 기사들입니다.


선조 23권, 22년 1589 기축 1월 21일(기사)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 채용(不次採用)한다고 하자, 이산해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 중략... 추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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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3권, 22년 1589 기축 7월 28일(계유)

좌부승지 황우한(黃佑漢)이 비변사의 밀계로써 아뢰기를 ...중략... (전란을 대비해 각지의 지방관들을 배치하는 내용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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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권, 24년 1591 신묘 2월 12일(기묘)

비변사 낭청이 아뢰기를, “이천(李薦)·이억기(李億祺)·양응지(梁應地)·이순신(李純臣)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상(선조)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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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권, 24년 1591 신묘 2월 13일(경진)

...전략...

“전라 감사 이광(李洸)은 지금 자헌 대부에 가자하고, 윤두수(尹斗壽)는 호조 판서에, 이증(李增)은 대사헌에, 진도 군수 이순신(李舜臣)은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

선조 25권, 24년 1591 신묘 2월 16일(계미)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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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 (안돼, 안돼, 안돼)...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마술사얀
08/09/24 17:16
수정 아이콘
2장 초반에 나오는 두명의 이경록은 동명이인인가요?
happyend
08/09/24 17:35
수정 아이콘
마술사얀님///으아아악!!!!
이운룡으로 바꿨습니다.죄송합니다.정신없이 글을 쓰다보니....(아무래도 생업에 쫓기면서 쓰느라...)
08/09/24 17:38
수정 아이콘
오타 지적합니다.

세계 대 공[황] 입니다.

세계 대공항....
왠지 문명에서의 원더 같군요. 세계적인 초거대 공항! 비행기가 얼마나 들어갈런지....(펑)
...농담이었습니다 ^^;;
happyend
08/09/24 17:39
수정 아이콘
perplex 님//우어우어.......수정했습니다.^^
wish burn
08/09/24 17:46
수정 아이콘
이억기장군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업적이나 능력에 비해서 저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땅과자유
08/09/24 18:05
수정 아이콘
멋진 글입니다. 글 너무나 재미있게 봤습니다. 해피앤드님 감사합니다.
아우디 사라비
08/09/24 18:51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생뚱맞은 질문에 친절한 대답.... 감사합니다
08/09/24 19:01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실제로 3단철포의 경우에는 2단철포에 가깝지요. 편성제는 총병-궁병-창병이 맞습니다. 기마대라 해봐야 일본산 '조랑말'로
겨우 우회돌격정도가 가능한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기마대는 기마대지만..
이런전술이 확립된것은 일본중세의 사무라이 중심-필요할때 아시가루 소집 체제에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직업군인/용병제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작 백명단위의 땅따먹기 놀이에서 만/십만 단위의
대규모 전쟁이 가능해진것도 그 유산이지요.

그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무인천시풍조'가 더 문제였습니다 그때는..
제 자리만을 탐하고 부귀영달을 원하는 집권자는 어느나라 어느시대에도 있었으니까요.

현재 상황은 그런것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황이란게 문제지만 말이죠.

펠쨩(염통)님/ 문제는 승자총통과 조총의 레벨이 틀렸다는데 있겠죠. ^^
포르투갈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최고로 개량된 다네가시마는 그 시대치고는 좀 사기급이었습니다.
세오카
08/09/24 20:03
수정 아이콘
상식 수준이 업글된 느낌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만과나태
08/09/24 23:11
수정 아이콘
//happyend
으흑~ 저희 재령이씨 집안의 유일한 유명인 이운룡 장군이 나오는군요!
(물론 또 다른 현대의 유명인 이문열씨가 있지만요. -_-;)
이운룡 장군이 충무공의 부장으로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걸 보아왔었지만,
이렇게 자세히는 몰랐었는데 감사합니다~!
P.S. 이운룡 장군이 해전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도와서 공을 세운 걸로 알고있는데 그 부분도 자세히 알고싶네요!
happyend
08/09/25 08:35
수정 아이콘
오만과나태 님//이운룡장군은 녹둔도전투의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1589년 옥포만호로 부임합니다.이곳에서 임진왜란을 맞았고요.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에게 뺏길것을 염려하여 무기와 배를 수장시켰습니다.그런일은 경상우수영에서도 벌어져서 우후(수사 바로 아래 직급,우후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가 자체 판단하여 무기와 배를 버립니다.그리고 수군마저 해체하며 가까운 성으로 달려가 그곳에 합류하라고 합니다.
뒤늦게 이 상황을 알게 된 경상우수사 원균은 자포자기했습니다만,이운룡은 그를 설득합니다.경상도앞바다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그의 계략에 따라 몸을 사리고 출병하지 않는 이순신을 설득,출전시킵니다.

통영에 가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거제도로 들어가는 입구인 견내량은 판옥선이 드나들기엔 어려웠습니다.한산섬 앞바다까지 유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요.그런데 이 유인작전을 세우고 수행하기엔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이 물길도 상황도 알기 어려웠습니다.이운룡은 이 유인계를 직접 이순신에게 제출하고,유인작적을 이끌 배에 오릅니다.거제도에 있는 옥포만호였던 그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요.결과는 아시다시피 유인작전에 걸려든 왜군들이 한산섬앞에 펼쳐진 '학익진'에 참패,이른바 '한산대첩'이 벌어집니다.

이운룡은 칠천량해전 당시 좌천되어 육지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유지,장수들이 수장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제 7대 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안았습니다만 이순신과 닮아 탄핵을 여러번 당했고, 병영일기인 <거영일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만과나태
08/09/25 09:41
수정 아이콘
와우 happyend님 감사합니다! 어디서 이런 정보들을 수집하시는지. 참,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전공이 이쪽 분야이신지?
IntiFadA
08/09/25 13:28
수정 아이콘
참 좋은 글이네요~ ^^
happyend
08/09/25 14:10
수정 아이콘
오만과나태 님//영정조 시대를 이끌었던 이념적 주축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입니다만,현재 국역본이 없습니다.그러면서,영정조시대에 대해 다들 말하고 있고요...연암박지원의 책들도 심지어 고려사도 북역본을 봐야 하는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필요한 것이고요,그런 의미에서 제글이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의 전공을 말하면,자연과학도였습니다.^^
연탄맛초콜릿
08/09/25 16:27
수정 아이콘
안구정화되는 건 사진만이 아니네요. 좋은 글 정말 좋은 글입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infestedJay
08/09/26 22:21
수정 아이콘
언제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꼭 책내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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