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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9/23 12:30:43
Name 네로울프
Subject [일반] 생일 2
"아 시발! 안하면 되잖아. 그 까짓 거."
전화를 끊은 후 내 입에서는 기어코 욕이 새어나왔다.
은 숨을 내뱉고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었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담배도
이틀을 꼬박 새운 후줄근한 내  꼬락서니만큼 이지러져 있었다.

쥐꼬리만한 수고료에 의뢰자는 벌써 세번째 수정을
요구해왔다. 이젠 편집기만 봐도 구역질이 났다.
담배를 집어던지듯 재털이에 비벼끄고 사무실을
나섰다. 일단 지금은 좀 자야겠다.

추석이 지난 지도 거진 열흘이나 나건만 여름은 아직
가을 초입에 긴 꼬리를 얹어놓고 있었다. 바짝 마른 햇빛이
끈적대는 목덜미를 쪼아대고 있었지만 택시 기사는
에어컨을 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불퉁한 기분에
괜시리 기사와 드잡이질이라도 할까 싶어 애초에 에어컨
좀 켜고 가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속도나 좀 내주면 바람이라도 얻을련만 구불대는 차량의
흐름에 택시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가다 멈칫거리기만
했다. 자기 쪽 차창에 한 팔을 걸친 체  앞차와 옆차에 대고 쌍소리를
시부렁대는 기사를 한 번 흘겨주고는 다시 담배를 빼 물었다.
버석거리는 입 속으로 두터운 연기 다발이 빠르게 지나가며
조금 남은 물기나마 마저 앗아갔다.

바지 뒷주머니에 구겨넣었던 핸드폰에서 삑삑거리는 알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의뢰자의 재촉하는 문자나 쓰잘데기 없는
광고 문자려니 싶어 구태여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발견한 건 혀끝이 아려오는 느낌에 창밖으로 반허리나
남은 담배를 퉁겨내던 순간이었다. 훤한 대낮의 도시 도롯가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보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겉이 멀쩡해 보이는 그녀가 아는 사람일 경우는 더 드물
것이다.

대저 2년전쯤이었던가. 조그만 이벤트 회사를 하던 선배의
로드 광고 행사에 아르바이트 삼아 틈틈히 행사 진행 팀장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돈 안돼는 일에 매달려있던 나로선 가끔이나마
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소소한 돈벌이였다.

"혜인씨 괜찮아요?"

나레이터 모델로 나와 서너 번 같이 행사를 진행했던 터라
낯익은 그녀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아 택시를 내리고 말았다.
눈 아래가 거뭇한 얼굴로 그녀가 나에게 뭐라 말을 했지만
시끄러운 찻소리와 우물거리는 말투 탓에 의미가 전달돼오지 않았다.
주저앉은 그녀의 왼쪽 무릎에 빨갛게 피가 맺혀 있었다.

가까운 커피숍에 그녀를 데려다 앉히고 차가운 커피를 두어 모금
들이킨 후에야 그녀는 조금 진정이 됐다.
감기몸살에도 불구하고 잡혀진 스케줄 탓에 억지로 행사를 나왔다
행사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단다. 얕게 튀어나온 보도
블럭에 발끝을 채여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이고
일어날 힘도 창피할 여력도 없어 그냥 눈물이 밀고 나오더란다.

그랬던 것 같다. 2년전 그 때도 나래이터 모델로선 끝물이랄 수 있는
2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뭔가 나이답지 못하고 아이같은 구석이
있는 그녀였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좀처럼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고민이 된다는 내밀한 이야기를 처음 본 내게 스스럼
없이 내어 비치던 조금은 어리벙벙한 그녀였었다.

무릎의 생채기를 냅킨을 물에 축여 대강 어슬렀지만 보고있기가
영 안스럽다. 약국에서 간단한 처치할 거리라도 사오마 하면서
자리를 일어났다.
"팀장님 저기 전화 좀 빌려주세요."
넘어지는 서슬에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서져 고장나 버렸단다.
뒷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어주고 커피숍을 나섰다.

약국 간판을 찾아 고개를 휘휘돌리다 문득 언젠가 술자리에서
선배에게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결혼 직전까지 갔던 남자 친구와 결국 헤어지고 나레이터 모델일도
그만뒀다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나레이터 모델일을
시작했나보다. 하긴 나름 괜찮은 수입에 나레이터 모델일을 쫓다가
시간을 흘려보내버리다보면 이미 늦은 나이를 깨닫았을 땐 변변한
일자리를 찾기 힘든 게 그 바닥 생리긴 하다. 따로 준비한 것은 없고
나이가 먹어갈 수록 일거리는 줄어들고 행사비도 싸진다. 거뭇해진
눈밑이 다만 감기몸살 탓만은 아니리라.

내 사정이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싶어 괜한 연민을 털어버리고
대각선 건너 방향의 약국으로 향했다.

소독약과 반창고를 손에 쥐고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서니 자리가
비어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둘러보니 그녀가 커피숍 카운터 앞에
진열된 조각 케익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제 여유가 생겼나 싶기도 하고 또 이 상황에 저런 것에 눈이 가나
싶은 조금 얼척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손에 쥔 약들이 열없어졌다.
약이나 안겨주고 먼저 일어나야겠다 싶어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인사는 해야겠기에 잠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손이 얼굴 앞으로
쑥 디밀어진다. 조각 케익을 얹은 접시를 들고 그녀가 헤헤거리며 웄었다.
"팀장님 생일 축하해요."
2년 전 잠시 행사를 같이 할 때 썼던 호칭인데 그녀는 아직도 나를 팀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긴 달리 부를만한 호칭이 없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긴 했다. 의아스런 표정으로 눈을 굼벅이며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가 다른 손을 내민다.
"오늘 생일이라고 가르쳐 주던데요?"
나는 '아' 하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며칠 전 친구 녀석과의 술자리에서
생일이 얼마 안남았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다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해놨던
기억이 났다. 생일이래봐야 누구 만날 사람이나 있냐는 친구의 핀잔에
혼자 밥이라도 좋은 거로 먹어야지 하면서 반 장난으로 설정해 놓은 생일
알람이었다. 택시에서 끈질기게 울려대던 알람소리가 그 것이었나보다.

"아 그렇네요. 생일이네요.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뭔가 어정쩡한 사례를 하고 케잌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소독약과 반창고로 간단한 처치를 한 후 우린 조각 케잌을 나눠먹었다.

"팀장님 좀 창피하지만 고마워요. 아깐 혼자서 도저히 어쩔 힘이 없었는데.."
커피숍을 나서며 그녀가 감사의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서로 방향이 달라 헤어지는 인사를 나눴다.

"팀장님 생일 잘 보내세요."
"네 고맙습니다."

한층 기운을 차린 웃음을 지어보이고 그녀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약간 절룩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기 혜인씨!"
그녀가 살짝 몸을 틀어 돌아다봤다.
"저기 괜찮으시면 오늘 저녁 식사 같이 안하실래요? 그냥 생일 턱이나 낼까하고.."
대체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이 뒤미쳐 오르면서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에 살짝 곤란한 표정이 지어졌다.
"팀장님 죄송한데 오늘 제가 몸이 너무 안좋아서요...그래서.."
"아 아니에요. 그냥 별다른 약속도 없고 해서 그냥 ...신경쓰지 마세요."
나는 서둘러 그녀의 말을 끊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냥 문득요..괜히 ...그러니까...몸도 안좋은데 미안해요.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나는 굽벅 인사를 하고 민망한 느낌을 지우려 몸을 틀었다.

"저기요. 팀장님. 내일 쯤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나는 머뭇거리며 다시 돌아섰다.
"내일 저녁은 좋아요."
그녀가 사근하게 웃고 있었다.
살풋한 바람 한 자락이 목덜미의 마지막 여름 더위를 씻기며 지나갔다.
"참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 드릴게요."
난 행사 옷짐이 든 그녀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다시 바람 한 줄기가 햇빛을 쪼개며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 몇 년 전 오늘...                    

                                              

                                                                                                  ...z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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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23 12:45
수정 아이콘
네로울프님 생일이신가봐요~ 축하드려요~
글에 나오는 여성 분이랑은 어떻게 되신거??
최종병기캐리
08/09/23 12:46
수정 아이콘
아..

좋겠다... 부럽다.
08/09/23 12:50
수정 아이콘
오...실제 상황인가요... 아니면 단편소설인가요...

글 정말 잘 쓰시네요..^^ 몰입해서 후다닥 읽었다능.
08/09/23 12:52
수정 아이콘
이제 택시 타시면 창밖을 열심히 보세요





그래도 안생겨요.......-_-)a 후다닥
애연가
08/09/23 12:56
수정 아이콘
소설인줄 알았자나요 ....

이 .. 몰입감은 뭐지 ...

그냥보내지마 보내지마 ... ^^;;
Withinae
08/09/23 13:01
수정 아이콘
나도 모르게 감정을 싣고 읽고 있었다는...
네로울프
08/09/23 13:29
수정 아이콘
생일 축하 감사합니다...
대부분 실화에 약간의 픽션입니다.
뭐.. 이 후 진행은 각자의 상상에 맡깁니다.
꽤 오래 전 일이네요..
Who am I?
08/09/23 13:38
수정 아이콘
...생일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이...
생일 전날에서부터 당일 새벽 4시경까지...;;;전화로 욕먹었던 기억인지라....먼산-

부럽기도 하고 그렇군요.


생일 축하드려요!^_^
하얀조약돌
08/09/23 14:51
수정 아이콘
네로울프님// 글 정말 재밌있게 잘 쓰시네요! 흐흐
생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행복한 하루 되세요~!
higher templar
08/09/23 15:08
수정 아이콘
글 잘 쓰셨네요. 근데 실화인지 가상인지 모르겠네요 ^^
말코비치
08/09/23 17:20
수정 아이콘
마음대로 추론하자면... 저 여자분 사이에서 2세 탄생? -_-...
고드헨드
08/09/23 21:30
수정 아이콘
우와..글 정말 잘 쓰시네요.어릴때 읽던 소나기 같아요..^^
Minkypapa
08/09/24 00:55
수정 아이콘
생일 축하합니다.
제 와이프가 대학교 다닐때 학교 계단. 그것도 점심시간에 남의 학교 공대앞에서 치마를 입은채
졸지에 굴러서 까지고 시퍼렇게 멍이 들고 아팠지만,
챙피해서 안아픈척 하고 바로 일어나서 정상걸음걸이로 도서관까지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그 날 오후 도서관에서 만났을때, 피가 스타킹에 눌어붙어서 안타깝긴한데, 싱긋 웃다가 절교당할뻔 했던 일이...
아무튼 어떤 여자라도 넘어져있을때 도와주는게 솔로의 도리입니다. 유부남들은 미녀는 빼고 도와주시면 되겠습니다.
산들바람-
08/09/24 01:10
수정 아이콘
글 잘 읽고 갑니다.
재미있네요. 여운도 남고 :D

참.
좀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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