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의 남쪽에 있고 오령의 북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고 부르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東國: 우리나라)이라고 부르는데, 동국 사람의 신분인 채 중국으로 유람 가는 사람을 찬탄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내가 볼 때 그들이 이른바 중국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 나라가 중앙(中)이 됨을 알지 못하겠으며, 동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는 그것이 동쪽이 됨을 알지 못하겠다.
대개 해가 정상에 있을 때로써 정오를 삼는데 정오의 간격은 날마다 차이가 나서 그 시각이 같다고 한다면 내가 서 있는 곳이 동쪽과 서쪽의 한 중앙임을 알게 된다. 북극은 지상에서 몇도 정도 높은 곳에 서 있고 남극은 지상에서 몇도 정도 낮은 곳에 있어 오직 그 전체 거리의 반쯤에 위치하고 있다면 내가 남쪽과 북쪽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저 동서남북의 중앙에 처음부터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라면 가는 곳마다 중국이 아닌 곳이 없다. 어떻게 동국이라고 부르는 대로 그냥 보고 있겠는가. 대저 가는 곳마다 중국이 아닌 곳이 이미 없으니 어떻게 중국이라고 부르는 대로 보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중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왜 그러한 칭호가 있었을까.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의 다스림이 있어서 중국이라고 부르며,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학문이 있기에 중국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중국이라고 부를 만한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성인들의 다스림이나 성인들의 학문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 이미 다 얻어내어 옮겨놓아버렸다. 다시 또 왜 먼 곳까지 가서 구해올 필요가 있겠는가.
오직 전답에 씨 뿌리고 종자 심는 편리한 농법이 있어 오곡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면, 이것은 옛날의 어진 관리들이 남긴 은혜요, 문학이나 예술이 폭넓고 우아하여 비속하고 비루하게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옛날의 이름난 선비들이 남겨준 운치다. 지금도 마땅이 중국으로부터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는 이런 것들뿐이다. 이런 것이 아니라면 억세고 횡포한 풍속, 음탕하고 괴상스러운 잡기에 예속(禮俗)을 파괴하고 인심을 방탕하게 하는 것들이고 옛날 임금들이 힘쓰던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관람하겠는가.
나의 친구 혜보 한치응이 명령을 받들어 북경에 가려고 할 때 제법 중국으로 유람 간다고 자만하는 모습으로 뽐내기에 내가 일부러 중앙과 동쪽의 학설을 만들어 기를 꺾어놓고 겸하여 이렇게 힘쓰도록 하노라.
-한참 정조의 완소(;) 신하, 유능한 젊은 관리로 날리고 있던 시절의 편지입니다. 이 둥근 지구에 중국이 어딨단 말이냐. 중국도 중국나름, 요순우탕에 공자급 이하는 전부 캐버로우! 하는 포쓰 보십시오. 흐흐.
2
둘째형님께 올리는 글월-개고기를 삶아먹는 법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전혀 먹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섬 안에 들개가 천 마리 백 마리 뿐이 아닐 텐데, 제가 그곳에 있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섬 안에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다고 해도 그물이나 덫을 설치할 수야 없겠습니까. 이곳에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개 잡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중략)...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생선 찌개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는 데까지야 이르겠습니까. 1년 3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를 형님의 탕목읍(湯沐邑: 장원이나 영지 같은 개념)으로 만들어 주어 고기를 먹고 부귀를 누리게 하셨는데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들깨 한 말을 이 편에 부쳐 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 장, 기름, 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 정조 사후 서학 탄압 바람 속에서 정약용은 처음 강진에서 다산으로, 이 편지의 수신자인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가 있을 시절 형제끼리 나눈 편지입니다. 이 분 의외로 보신파였군요. 일년에 52마리라 ㅡㅡ; 이 글 뒤에 보면 "뱀을 왜 잡아야 하는지를 밝힌다" 라는 글도 있는데, 그것도 잡아서 혹시? '마땅히 잡아서 진인의 먹이로 제공해야 한다' 고 하던데...덜덜덜
초정 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 때문에 어찌나 웃었던지.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대표 중의 대표 실학자들이 서로 개고기 레시피 교환하고 있는 거 생각하면 정말 완전 깹니다.
형제 중 한 명은 서학 때문에 결국 극형까지 당하고 집안은 풍지박산에 두 형제가 피차 유배지에서 편지 교환하는 신세, 그래도 다산의 기백이나 여유는 여전하지 말입니다. 하긴 일년에 개 52마리는 잡아먹겠다는 정도의 인물이 되어야, 유배 20여 년 동안 경전 해석집 232권, 시 작품집 6권, 잡문(!) 60권, 경세유표 48권, 목민심서 48권, 흠흠신서 30권, 아방비어고 30권, 아방강역고 10권 등등 잡찬(요즘 말로 하면 편집+저술 정도 되려나요) 총 260여 권... 이 양반은 무슨 인쇄기도 아니고... 하여간 이 정도 생산적인 인생을 사는 게 가능했을지도 몰라요.
그나저나 정약전은 아무래도 개고기보다는 (정약용이 무시했던) 생선찌개 쪽에 관심이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나름 미식가였나봐요. 아니면 섬에 생각보다 개가 별로 없었던지. 그림 재능도 있어서(정약용 형제들 외증조할아버지가 유명한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이죠.) 흑산도 주변 다양한 바다 동물들의 자세한 그림을 곁들인 유명한 <자산어보>를 남깁니다.
3
수오재(守吾齋) 이야기
수오재라는 것은 큰형님이 그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의아하여 말하기를 "사물이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吾)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비록 지키지 않은들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 라고 했다. 내가 장기로 귀양 온 후 홀로 지내면서 정밀하게 생각해 보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이런 의문점에 대해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스스로 말하였다.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것이 없고, 오직 나(吾)만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겠는가. 따라서 밭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겠는가. 따라서 집은 지킬 것이 없다. 나의 정원의 꽃나무, 과실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들을 뽑아갈 자가 있겠는가.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혔다. 나의 책을 훔쳐 없애버릴 자가 있겠는가. 성현의 경전이 세상에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나의 옷과 식량을 도둑질하여 나를 군색하게 하겠는가. 세상의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세상의 곡식은 모두 내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훔쳐간다 하더라도 한두 개에 불과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즉 세상의 만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유독 이른바 나(吾)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디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도하면 떠나가고, 위협과 재앙으로 겁을 주어도 떠나가며, 심금을 울리는 고운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푸른 눈썹에 흰 이를 한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몰라 붙잡고 만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나(吾)같은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 과거의 명예가 좋아 보여서 과거 공부에 빠져들어간 것이 10년이었다.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에 비단 도포를 입고 미친 듯이 대낮에 큰길을 뛰어다녔는데, 이와 같이 12년을 지냈다. 또 굴러 떨어져 귀양길에 올라 한강을 건너고 조령을 넘고, 친척과 조상의 산소를 버리고 곧바로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나(吾)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허둥지둥 갈팡질팡 나의 발뒤꿈치를 따라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吾)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끌려온 것인가? 아니면 해신(海神)이 부른 것인가? 자네의 집안과 고향이 모두 초천에 있는데, 어째서 그 본고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라고 했다.
끝끝내 나(吾)라는 것은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마치 얽매인 곳이 있어서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가지 못하는 듯하였다. 마침내 붙잡아서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 이때 나의 둘째형 좌랑공께서도 역시 그의 나를 잃고 나를 좇아 남해 지방으로 왔는데, 역시 나를 붙잡아서 그곳에 함께 머물렀다. 유독 나의 큰형님만이 그의 나를 잃지 않고 편안히 단정하게 수오재에 앉아 계시니, 이것은 본디부터 지키는 것이 있어 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형님께서 그의 그의 거실에 수오재라고 이름붙인 까닭일 것이다.
큰형님께서 항상 말씀하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이라고 자를 지어 주셔서, 나는 오로지 나의 태현을 지키려고 하여, 이것으로써 나의 거실에 이름을 붙였다" 라고 하지만, 이것은 핑계대는 말씀이다. 맹자가 "지킴은 무엇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크다" 하였으니, 그 말씀이 진실하다. 드디어 나 스스로 말한 것을 써서 큰형님에게 보이고 수오재의 이야기로 삼는다.
-저한테 있는 다산문학선집의 많은 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한양 가는 길 문 한번 통과할 때마다 승진했다는 기록적인 출세 속도, 정조대왕이 자기 책상에서 시를 짓게 하고 과거 때마다 단골로 시험문제 내고 채점하던 학문 실력, 곡산에서 호적 기록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표 방식으로 개혁하고, 그때까지 있던 관아 규칙을 모조리 없애고 새로 제정하고, 가난한 지방의 다 낡아빠진 관아 건물을 전부 신축하고도 매년 돈과 쌀이 남아도는 탄탄한 지방으로 만들고, 전염병이 도는 것을 보고 황제가 죽어 칙사가 올 것을 미리 알아맞히는 등 닳고 닳은 아전들도 휘어잡은 실무능력.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서학 탄압에 휘말려 땅끝까지 유배되는 지경이 되었을 때 심사가 어땠을까요.
다산이 유배지에서 비로소 잃어버린 나를 찾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나라 역사가, 고문헌 연구자, 한국 철학 연구자 등등은 공부할 게 대폭 줄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원망할 에너지, 한탄할 에너지를 나를 다시 찾고 그 나와 화해하는 데 쏟을 수 있었던 것. 그게 아마 젊은 시절 한때 반짝하다 더러운 정치판에 희생되어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 라고 끝났을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을,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 학자들에게 자부심이 되고 목표가 되고 즐거운 채찍(!)이 되는 멋있는 인생으로 바꿔놓았던 것 같습니다.
다산 글 출처:
정약용 저-박석무/정해렴 편역, 다산문학선집, 현대실학사(서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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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전 수업에서 국사선생님이 우스갯소리로 이런말을 하시더군요. ^^
동생 정약용이 책을 500여권이나 쓸때까지 형은 뭐하는 것인가란 소리를 듣고 발끈한 형 정약전이 그동안 흑산도에서 잡았던 물고기를
냉장고(?)에서 전부 꺼내어 하나씩 이름을 붙이고 책을 무려 ~~ 2권이나 썼다고 -_-;;
1권은 위에 나와있는 자산어보, 나머지는 해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