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마흔 한 살에 승상에 오른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제갈승상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더랍니다. 그건 자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당시 사회에서 아들을 낳아 대를 잇지 못한다는 건 실로 크나큰 불효이며 그보다 큰 문제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잘못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도 경우에 따라서는 칭찬을 받던 시대에(하후돈은 불과 14세에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죽여서 ‘강직한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들이 없다는 건 어쩌면 살인보다 훨씬 더한 중죄였단 말이죠.
이런 경우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첩을 들이는 것이었죠. 흥미롭게도 승상에게 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예로부터 무수한 사람들이 열띤 논의를 벌였던 키배 주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위대하고 완벽하신 승상님께서 첩을 들였을 리 없어!’ 같은 주장이 많았지요.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당시 시대상을 볼 때 첩을 들이는 건 딱히 흠 잡힐 일이 아니긴 했습니다. 그러나 승상에게 첩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결론적으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승상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건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었죠. 오나라에 있었던 친형 제갈근은 공교롭게도 아들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승상이 부탁하죠. “나와 아내는 이제 늙어서 자식 보기 어렵겠습니다. 형님은 아들이 많으니 나 하나만 주십쇼.” 그래서 제갈근은 차남인 제갈교를 승상에게 보내 입적시킵니다.
헌데 227년. 놀랍게도 승상은 늦둥이를 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서 ‘제갈량 고자설’은 다행스럽게도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때 승상의 나이가 마흔 일곱이었고 아내 황씨의 나이도 비슷했겠지요.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이만저만 노산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대 사람으로서는 오죽이나 기쁘고도 뜻밖인 출산이었을까요. 더군다나 형인 제갈근은 이미 손자까지 보아 할아버지가 된 지 오래였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자식인 제갈첨을 승상은 끔찍이도 아낍니다. 형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승상은 이렇게 말하죠.
[첨이는 지금 벌써 여덟 살인데, 총명하고 지혜로워 실로 사랑스럽습니다. 다만 너무 조숙한 바람에 큰 그릇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형! 내 아들 무지 똑똑하거든? 머리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걱정이야!’라는 말을 우아하게 쓴 거죠.
또 북벌로 인해 자주 집을 비웠던 승상은 아들에게 글을 써서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계자서(誡子書)라고 하지요. 그 내용을 보면 제갈량이 자식을 아끼는 애틋함이 잔뜩 묻어 나옵니다. 담박영정(淡泊寧靜)이라는 말도 이 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승상은 234년에 오장원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제갈첨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지요.
이후 제갈첨은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쾌속 승진하여 불과 서른다섯 살에 위장군(衛將軍)이라는 중책까지 맡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이 크게 작용했겠지요. 능력은 판단할 근거가 많지 않습니다만 아버지만큼 뛰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충성심만은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263년. 위나라는 촉을 공격합니다. 촉나라의 최종 방위선인 면죽을 지키는 임무가 제갈첨에게 맡겨졌습니다. 명장 등애를 상대로 선전하고 한 번은 적을 격퇴하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마지막에는 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장남 제갈상과 함께 나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제갈첨이 죽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유선은 위나라에 항복합니다. 이로서 유비가 세우고 제갈량이 지켰던 촉한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승상은 그토록 아끼던 자식의 의로운 죽음이 안타까우면서도 자랑스럽지 않았을까요.
덧) 승상이 양자로 들였던 제갈교는 228년, 제갈첨이 태어난 이듬해에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그 아들 제갈반은 이후 할아버지인 제갈근의 후사가 끊기자 오나라로 되돌아가 그 대를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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