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9/18 20:53
글이 꽤나 흥미로와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크크크
일단 글쓴이님이 불교의 공 사상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는건 잘 알겠으나 그게 그렇게 말 그대로 '공'염불은 아닙니다. 붓다가 만난 최초의 고뇌, 번민의 시발점은 '왜 인간은 태어나서 고통스럽고 성장하며 고통을 겪으며 늙어 죽어가며 고통 받는가?' 에 대한 탐색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며 이 생이란 고통의 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유의 흐름에서 불교의 가르침 -이해하기 힘든 형이상한적인 비유와 어려운 한문들!- 이 발전하고, 결국 해탈하여 똥으로 가득찬 윤회에서 벗어나자는게 '저 혼자' 넘겨짚는 불교의 사상입니다. 말씀하시는 주제 -자아는 환상일 뿐- 와 동떨어진 공염불 옹호를 관두고 원 주제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인식보다 믿음이 우선한다' 입니다. 제가 말하는 믿음이란건 종교적인 믿음 이전의, 예쁜꼬마선충이나 지렁이의 반사작용에서 부터 시작된 먹이가 있는 곳으로의 끌림이나 위해가 될만 곳에서의 회피행동이 일정한 패턴으로 치우쳐지고, 항상 같은 방향으로 일어나는 행동을 '믿음'이란 개념의 근원이라 생각합니다. 써놓고 나서보니 이게 뭔 댕댕이 소린가 싶은게 글쓴분 따라가는것 같아 송구스럽지만 댓글창에 계속 쓰기 보단 저도 글 하나 써야할 것 같은 느낌도 솟아 오르고 5억년 상하차를 하면 얼마나 꿀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름다운 밤이네요.
18/09/18 21:23
저도 말씀하신 그 믿음이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 어떤 믿음이라는 것이 내재화된 상태라고 봐요. 왜 생겨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영화에 순간순간 몰입하는 그 비슷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리고 공 사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어려워서 제대로 내가 알아먹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공 사상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설득력은 있어... 근데 현실적으로 체화하기에는 좀 에바 같아... 5억짜리 버튼 누르라는 소리 같다고ㅠㅠ 라는 느낌. 어쨌든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네요.
18/09/18 22:42
하필 또 상하차가... 크크크크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자로서 불교는 종교라는 카테고리 중에서 굉장히 흥미로워요. 제가 막 뭘 정하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불교는 종교라는 카테고리에 안넣을듯... 그보단 철학이나 인문학쪽 카테고리에 넣을거같아요.(아 물론 다신교에 가까운, 인도나 다른 나라들의 불교 말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의 불교를 말하는겁니다.)
18/09/18 22:58
저도 비슷한 류의 생각들을 근래에 자주 하는 것 같긴 합니다. (1984 내용부터는 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고통이란 게 두려운 것이냐? 시간은 무한하고 내 존재도 무한하다면. 먼지가 되었다 생명이 되었다를 무한히 반복한다면. 그렇다면 무한을 살다가 언젠가는 공간에 갇혀 살아온 무한만큼 온갖 고통을 받는 필연인가. 우리의 고통들은 그리 이치스러워 가볍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한한 안식으로 가는 종착지가 있을까.
18/09/19 02:42
https://pgr21.net/?b=10&n=161681
몇 년 전에 직접 번역했던 건데...오랜만에 검색해보니 아직 살아있네요 아, 지금 다시 보니 밑글에 링크가 걸려있었네요 그래서 이 글도 올라온 거구나...
18/09/19 08:25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안나 님의 글을 바탕으로 조금 사고의 나래를 펼쳐본 결과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 를 보면, 인간이 현재의 생태지위를 차지하게 된 근본 원인은 지능이나 부속지(손가락)의 진화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인 이유이자 '종 차원의 유연한 협력체계 구축' 입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와 개미, 돌고래 등 다양한 사회성 동물이 집단을 이루지만 A집단 원숭이와 B집단 원숭이는 서로 싸우거나, 소 닭 보듯 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인간 역시 사회성 형성의 극초기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집단과 집단간에 싸우거나, 무시하거나 말고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협력하고 교류한다'입니다. 인간은 문명 생성 초기부터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문자와 언어를 도구삼아서. 문자와 언어는 중요 수단이기는 하나 처음에는 통하지 않으니, 결국 인간은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능력] 을 가진 동물이었습니다. 물론 서로 싸운다는 선택지는 21세기 초에 온 지금까지도 유효하긴 합니다. (;) 언제쯤 그 선택지가 사라질지 궁금합니다. 이 언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인간만의 특성이 다시 구분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 "사과-Apple-リンゴ"는 실존하는 빨갛고 새콤달콤한 바로 그 사과인가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공손찬의 백마비마론이 생각나네요.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바로 이것, 인간이 먹이사슬 상층부를 지워버린 능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상화Virtualizaion=상징화Symbolization". 그 어떤 동물도 실체와 다른 무언가를 가상으로 상징화하여 상상하지 못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연관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예 : 사과 팻말 보여주면 집어오게 시킴) 그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현재까지 나타난 증거로는 그러합니다. 우리는 손쉽게 직선 몇 개로 정육면체를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심지어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 부족들은 그 도식화된 정육면체와 실제의 정육면체를 도저히 연관짓질 못합니다. 다른 사례로, 삼성의 핸드폰이 폭발하면, 사람들은 삼성을 욕하고 삼성 불매운동을 합니다. 사실 삼성이란 이름과 실체는 사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법인격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그 삼성을 증오하고, 사랑하고, 경애하고, 비난합니다. 그렇다고 삼성이 고통받거나 기뻐하거나 그러지 못합니다. 미국도, 예수도, BTS도, 각각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일련의 국토와 정부체계, 고대 아라비아 지방에 살았던 남성, 한국 청소년 몇 명으로 구성된 집단 그 이상을 '상징' 합니다. 인간의 이러한 상징화는 우리들 인간 자신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감각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 육체 저편에서 이 나를 조종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지칭하는 가상 / 상징화 대상이 바로 "자아", "영혼"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죠. 모든 것이 가짜라고 의심하는 '나'를 자아로 상정한 것인데, 그것 또한 가상 상징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가?" 이걸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싸워 왔고 또 싸우고 있습니다. 영혼의 무게가 있는지 재려고 인간을 저울위에 올려두고 사망 시점에 무게가 변화하는지 측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유의미한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것은 복사할 수도 잘라낼 수도 붙여넣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쁜꼬리선충처럼, 만약에 컴퓨터로 에뮬레이팅된 내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상 최초로 상징화된 대상이 물리적/추상적 실체로 다가오는 인류 역사상 불-농경-산업혁명 을 잇는 대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를 실험실 합성한 것과 같다 할까요, '신'을 프로그래밍한 것과 같다고 할까요. 카를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에 따르면 전 세계의 창세 신화나 민담을 다수 조사한 결과,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이라면 뇌 속 어딘가에 공통된 심상을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이론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면, 과학발전에 따라서는 완전무결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은 없습니다. 그냥 생각 타래라서;
18/09/22 05:47
저도 흥미로운 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우선 말씀하신 "자아", "영혼"이라는 게 그러한 일종의 가상 / 상징화 대상이라는 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헌데 제가 정말로 재밌었던 건(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얘기지만) 사람들이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가상화 혹은 상징화를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는 "자아" 혹은 "영혼"이라는 가상의 자기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고 행동한다는 거죠. 마치 인간의 고귀함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고 행동하듯 말입니다. 더 재밌었던 건 환몽구조 소설 얘기하면서도 언급했고 성상 숭배 얘기하면서도 암시했던 거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가상 / 상징화 대상을 긍정하고 숭배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욕망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저는 불교의 무아사상이 그런 파괴 욕망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살짝 했던 얘기지만 구운몽을 보면 초월적 공간에 있던 성진이 현시적인 것을 바라고 양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덧없음을 느끼고 초월적인 공간으로 회귀하게 되는데 저는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세속적 원리와 초월적 원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다고 봤거든요. 다시 말해 자아를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고, 믿으려는 동시에 믿지 않으려 한다는 거죠 무의식적으로다가. 부정하려 하고 믿지 않으려 하는 것 자체는 물론 의식적인 사유를 통해서 그렇게 된 거겠지만요. 긍정하려 하고 믿으려 하는 건 말씀하신 언어의 추상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상적으로 언어를 써서 의사소통하려다 보니 정신머리가 자연스럽게 그리 형성되는 거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본문에서는 영화를 통해 비유했었습니다. 잠깐만 깨어 있어도 스크린의 상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잠깐만 정신이 팔려도 우리는 그 스크린의 상에 몰입되어 그것이 가짜라는 걸 잊게 됩니다 저는 성상 숭배욕과 성상 파괴욕도 이렇듯 양면적인 인간 정신 구조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인간은 어떤 "상"이라는 것을 세우려고도 하고 깨부수려고도 하는데 대체 왜 그러냐? 하면 저는 그것을 자아(가상 / 상징화 대상)에 관한 원리와 등치시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그 원리란 이중성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중사고라고 표현한 건데요. 사람들은 상이라는 것에 대해 상충하는 감정을 양가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불교에서 무아라든가 공이라든가 하는 얘기들을 듣고 그래 자아는 없고 세상은 공이야! 라고 이해는 하더라도 인간은 생겨먹은 게 이 꼴이기 때문에 그것을 체화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추상성을 배재한 상태로 생각하라는 말과 같다고 봅니다. 아니면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랑 같다고 봐요.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뇌를 새대가리로 갈아 치우라는 말과 같은 말 아닌가 싶습니다. 본 주제로 돌아와서 5억년 버튼이라는 것도 결국 같은 얘기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5억년 버튼을 누른다는 건, 세상이 꿈이라는 것과 연속적이라고(하나의 상으로 존재한다고) 인식되는 우리의 존재도 실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 걸-즉 무아라는 걸 깨닫는 일이라 봅니다. 단지 안다는 걸 넘어서서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거겠죠 그건. 근데 제가 보기에 그 정도 체화 수준이면 뇌를 새대가리로 갈아치운 거나 똑같습니다. 정말 그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5억년 버튼을 일종의 해탈 버튼이라고 봅니다. 그걸 누를 수 있다면 리얼 부처 수준 인정 어 인정. 말씀하신 원시 부족처럼 가상이라든가 상징화 대상 모르는 건 당연하고(걔들도 영혼 그 비스무리한 개념은 알지 않을까 싶지만), 백만엔이 뭔지도 모르고 5억년이 뭔지도 모르고 심지어 버튼이 뭔지도 몰라서 그냥 우연히 누르는 거 아니면 리얼 부처 수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보기엔 뇌를 새대가리로 갈아 치운 수준인 거죠. 근데, 그렇다 할지라도 다들 상이 덧없다는 걸 얼핏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철학자들이나 종교인처럼 이성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말이죠. 혹은 과학자들처럼 인격이나 경험, 기억 등도 그저 데이터 그 뭐 비슷한 걸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현세의 나를 백업 데이터쯤 취급하고 5억년 동안 다른 차원에 갔다가 돌아올 나를 백업될 데이터쯤 취급한다 해도 뭔가가 이상한 겁니다. 우리의 실존적 감각, 이 이중사고와 양가적 감정이 우리를 혼란시킵니다. 5억년 버튼을 누른다 쳐도 뭔가 이상하고 x같고, 안 누른다 쳐도 뭔가 이상하고 x같고... 그러다 보니 뭔가 또 공허해집니다. 이 양가성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 의식의 한계와 그 공허함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이렇게 길게도 쓰고 댓글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놔 버렸네요. 해서 제 미천한 결론을 내려보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메타포고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생각할 수조차 없으니, 영화관의 관객들이 스크린의 상에 몰입해들어가듯 이 꿈 같은 현실에 몰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꿈이라는 걸 가끔씩 의식 정도 할 수 있을 뿐(그러나 반대편도 꿈일 뿐이다. 나비도 꿈 장자도 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이 꿈이라면, 우리를 공허하게 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자각이랄까요? 뭐 이런 중2병스러운 결론이 나오네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5억년 버튼을 누른다 쳐도 뭔가 x같고 안 누른다 쳐도 뭔가 x같고 아 x같다 뭐 어찌할 수가 없네, 라는 그런 얘기였습니다.
18/09/19 21:48
오억년버튼 전 눌러보고 싶습니다.
100만엔보다 오억년 살아보고 싶네요. 하루살이한테 백년 살라고 해도 그렇게 두려워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