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오고, 20대를 함께 하며 세상을 가르쳐준 PGR에 꼭 후기를 남기겠다고 다짐한 지가 벌써 3년인데 이제야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네요.
1.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평범하게 대학을 나오고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 27살.
그런데 직장 생활은 제가 기대했던 것처럼 밝고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뒤늦게 깨달은 후에는 더는 직장 생활을 계속할 자신이 없더군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이 1년에 가까워질 때쯤부터 못난 속마음은 숨기고 주변에 거창한 핑곗거리를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나는 사실 직장 생활에 큰 흥미 없어. 사실 1년만 더 일해서 돈 모아서 세계일주하는 게 꿈이야."
말의 힘은 참 무섭더군요. 사실 2년 차에 직장을 옮기고는 다시 자신감과 자존감을 되찾았지만 이미 떠벌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직장동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며 본 그들의 기대와 동경과 선망 어린 눈빛, 도전하는 20대를 응원하는 미소를 배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계일주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떠벌리고 다녀서 여행 당했다. ㅠㅠ
2.
처음 계획했던 기간은 1년, 예산은 2,000만 원이었습니다. 세부적인 일정은 여행 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전체적인 큰 그림만 그렸습니다.
처음 계획했던 일정입니다.
중국에서 시작해서 육로를 통해 동남아를 여행하고 인도와 네팔을 여행한 후 중동에서부터 아프리카를 종단,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후 스페인어를 배워 남미 일주라는 계획을 세웠죠.
돈만 있으면 나중에도 여행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여행지는 배제하고 젊어서 고생하며 여행할 수 있는 곳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계획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예산이었죠.
3.
처음 1년 동안 모은 돈은 약 1,200만 원. 그냥 꾸준히 모으면 되는 거였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저는 이 돈을
주식에 투자합니다.
대체 왜 그랬니 과거의 나...?
당시 블레이드앤소울 출시를 앞두고 있던 엔씨소프트. 고등학교 3년을 리니지와 함께했던 저는 엔씨소프트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모든 돈을 몰빵했고
1년이 지나고 여행을 석 달 남짓 앞둔 겨울, 엔씨소프트 주식은 30만원에서 14만원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저는 결국 이성을 잃고 대선 테마주에 손을 대고 말았고 문재인과 박근혜 중 저의 선택은
문재인이었습니다...
여행을 한 달 남기고 영혼까지 긁어모아 보니 남은 돈은 고작 1,400만 원이었습니다.
주변에 떠벌린 건 있어서 여행을 가긴 가야 하는데 돈은 없고. 예산에 맞춰 6개월 여행하고 오기는 뭔가 모양이 빠지고 여행 대신 원양어선을 타야 하나 고민하던 저는 결국
코스닥 개잡주로 단타를 치기 시작합니다. -_-
그렇게 저는 세계일주 출발 3일 전까지 모든 여행자금을 몰빵해서 단타를 치고 있었고
이쯤 되면 얘가 여행을 진짜 다녀오기는 한 건가 싶겠지만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2,700만 원을 만들어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불쌍히 여겼나봅니다.
마지막까지 단타 치던 주식은 여행 떠나고 한 달 만에 부도났네요.
4.
근데 막상 세계일주를 떠난다고는 했는데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제 해외여행 경험은 0이었습니다.
비행기 자체도 27살이 되어서야 제주도 가면서 처음 타본 촌놈인데 해외여행은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에 예행연습으로 짧게 중국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인터넷에서 비슷한 곳을 여행하는 동행을 만날 수 있었고 여행 베테랑이었던 동행분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배웠죠.

중국 더항. 장자제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중국 펑황. 강가를 따라 펼쳐지는 고성의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중국 웬양. 해발 1,500m 높이에 끝없이 펼쳐진 다랑논.

중국 웬양. 농한기에 다랑논에 물을 담아놓으면 다랑논에 하늘이 담깁니다. 해 질 녘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에요.
저는 날씨가 좋지 않아 예쁘게 찍지 못했지만 구글에서 Yuanyang으로 검색해서 환상적인 사진을 만나보세요. 흐흐
5.
2013년 3월. 그렇게 스물아홉 살의 저는 1년의 세계일주를 목표로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