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스포일러 주의!!!
안녕하세요!
얼마전에 <노르웨이의숲> 이란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독후감을 썼는데 혹시 읽으신분들이 계시다면 감상을 공유하고 싶어서 올립니다.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 <상실의시대>라는 제목으로 나온적 있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제목이네요.)
독백체라서 높임말을 쓰지않은점 양해바랍니다!
<노르웨이의숲>을 읽고,
- 그래서 도대체 나오코는 어떻게 살리는 겁니까
나는 <노르웨이의숲>을 어쿠스틱카페가 편곡하여 연주한 버전만 알고 있었다. 오래전 짝사랑하던 누님의 미니홈피에서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연주곡이 들려서 이게 뭔가 싶어 봤더니 그게 바로 <노르웨이의숲>(Acoustic Cafe편곡버전)이었다. 그래서 그 곡을 핑계삼아 누나에게 말을 걸었던 어렴풋풋한 기억이 있었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숲>이라는 소설을 보았을 때 놀라움과 아련함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펑 하고 터졌다. 거기에 표지가 정말 제목에 어울리게 꿈을 형상화한 듯한 고혹적인 디자인이었기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책을 펼쳤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책의 첫 페이지에서 Beatles의 <Norwegian Wood>라는 곡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두번째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쯤에서 책을 그만 읽을까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첫째 이유는, 궁금증을 유발했던 제목의 미스테리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두번째 이유는, 단 두 페이지를 읽었음에도 이 사람의 글솜씨에 매료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글솜씨가 훌륭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훌륭한 글솜씨로 앞으로 무슨 내용을 풀어나갈지 미리 눈치를 채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이 이미 슬픈 일이 널렸는데 뭐하러 영화/드라마 등등에서까지 슬픈 걸 찾아보며 눈물을 짜냐- 라고 늘상 외치는 나이기에 내 눈물샘을 향한 하루키의 예리한 칼날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난 지금도 억장이 무너져, 네 엄마를 잃는 것보다 너희 둘을 잃는 게 훨씬 나았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거장의 손길에 이미 휘어잡힌 내 눈길은 이미 정신없이 책을 탐하고 말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단한 작가라는 건 이미 풍문으로 익히 들어왔지만, 모든 이야기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치밀한 구성이나 평상시라면 손발이 콩알만하게 오그라들 중2병스러운 멘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연출, 치명적인 절망속에 허우적거리다가 어딘가 한군데 비틀려버린,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들까지 어느 하나 사람을 잡아끌지 않는 게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게 너무나 깊게 다가온건 주인공과 나오코와의 관계였다.
'영원히 회복 못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넌 나를 기다릴 거야? 십 년이나 이십 년이나 기다릴 수 있어?'
나오코는 사랑하던 사람을 둘씩이나, 그것도 자살로 잃어버리는 비극에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 세상을 등지고 요양원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런 그녀와 절반의 비극을 공유하는 주인공 와타나베는 사랑과 책임감의 그 사이 어딘가쯤의 감정을 가지고 그녀를 치유하기 위해 매일매일(일요일은 빼고) 자신의 태엽을 감는다. 그리고 작품내내 보라색 스웨터 같은 걸로 암시되었듯, 그 끝에서 나오코가 자살하는 것으로 비극은 클라이막스를 맞는다. 심지어 그녀는 그에게 유언장도 없이, 그 노력과 고생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이, 그를 떠나간다. 그렇게 그녀와 똑같은 크기의 상처를 입게된 와타나베는 미도리가 내민 똑같은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부여잡게 된다.
'만일 현실세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곤란한 상태에 빠지면 신이 하늘에서 하늘하늘 내려와 전부 처리해주니까요.'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유산한 미혼모를 좋아해서 그녀를 치유하려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치유된 것 같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 2년 뒤 나는 다름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됬고, 5년간 사귀며 거의 다 괜찮아졌다고 마음을 놓았을 무렵 그녀는 떠나갔다. 떠나가면서 사실 괜찮아진게 아니었다고, 너를 사랑했기에 괜찮은 척 하는 거였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완전히 나은 것이라 낙관하곤 긴장을 놓아버린 내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치유하겠다는 내 자신이 오만한 것이었단 생각도 들었다. 치유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 곁으로 가는게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혼란스러웠다.
'너는 나에게 친절하게 많은 것을 주는데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는 것 같으니까.'
와타나베는 나처럼 가느다란 희망의 징조를 확대해석하고 나오코를 지나치게 독촉했다. 나그네의 옷은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 벗기는 것이지만 희망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실패자는 실패의 길만 알고 있으니까. 도대체 그런 정도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어떻게 살리는 걸까? 불행히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걸 알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현실에 없어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맨처음에 내가 느꼈던 이 책의 위험성(?)은 잔인하리만치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난 벌써 끝나버린 인간이야. 네 눈앞에 있는 건 옛날의 나를 비춘 잔존 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의 가장 소중한 것은 벌써 옛날에 죽어버렸고, 난 그저 기억에 따라 행동할 뿐이야.'
책을 다 읽고 제일 화가 났던 건 나오코의 행동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떠나버리면 남은 사람에게 또다시 그만한 아픔을 주게 된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어째서 그렇게 이기적으로 혼자만 편하겠다고 리셋 버튼을 눌러버린 것인지. 조금 머리를 식히며 생각해보니 미도리의 존재로 와타나베 걱정을 덜었을지도 모른다, 는 그럴듯한 변명이 떠올랐다. 아니야, 와타나베가 따라 죽기를 바랬을 거야, 라는 심술궂고 음침한 생각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또한가지, 마지막에 와타나베와 레이코의 섹스는 처음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안았다. 완벽하게 조리되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에 콜라 한사발을 들이부은 것 마냥 어색해 보였다. 작가가 일본식 막장 판타지를 구현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막판에 아주 찜찜했다. 그런데 책을 한번 더 곱씹어 보면서 어쩌면 이건 괜찮은 문학적 마무리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와타나베에게나 레이코에게나 그건 나오코와 하는 섹스였던 것이다. 이걸 위해 레이코의 동성애적 성향을 묘사했던 건가 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나는 감탄하며 기억의 책장 어딘가에 이 책을 꽂아넣을 수 있었다.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END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책을 읽는 내내 이영도가 쓴 로맨스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재치있는 개그라던지, <폴라리스 랩소디>의 오스발을 닮은 와타나베라던지, <그림자자국>에도 뭔가 비슷한 여인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안나네요..
p.s.2 굳이 책의 아쉬운 점을 꼽자면 하도 오래된 책이라 그런지 아니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런지 여자들이 굉장히 수동적으로 묘사되고 또 치유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이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