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12/21 01:13:44
Name 쇼미더머니
Subject [일반] 약자와 약함
<플라이 대디 플라이>라는 소설이 있다. 한 중년 남자의 여중생 딸이 성폭행을 당한다. 분노에 사무친 남자는 우선적으로 입원해 있던 딸을 나무란다. 왜 밤늦게 싸돌아다녀서 이런 꼴을 당하냐고. 그러나 남자는 곧 자신의 태도가 온당치 않음을 깨닫고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폭행범들에게 '물리적 복수'를 행한다.

한국에서 영화로도 리메이크 되었던 이 소설은 통속적인 위의 줄거리를 초반 설정으로 소모하고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나약한 샐러리맨 가장과 그에게 싸움을 가르쳐 준 불량한 고등학생 사이의 미묘한 우정과 남자의 변화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소설 원작에 충실하게 해석할 이유도 없기에 그냥 생각나는데로 써본다.

성폭행범이 있다. 처벌을 해야한다. 그러나 사법적인 처벌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폭행범 쪽의 로비에 의해서든 검경의 태만에 의해서든 여하튼 그렇다. 그럴 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는 한층 커진다. 그리고 그 분노의 화살은 가장 쉬운 대상을 향한다. 바로 자기 자신들.

남자 : (딸에게) 너는 왜 밤 늦게 싸돌아다녀서 이런 일을 만드냐..
아내 : (남자에게) 당신은 왜 검경에 아는 사람 하나 없냐..

그렇게 외부에서 주어진 비극은 가정이라는 내부도 파괴해간다.

늘 그런 식이다. 사건이 터진다. 분명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자들이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아니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피해자 쪽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독이 쌓여간다. 그리고 그 독은 가장 쉽고 가까운 대상을 찾아 빠르게 전염된다. 무너져 있는 피해자를 다그치고, 이것봐라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다 류의 썰을 푸는 부모 또는 꼰대와 논쟁을 벌이다가 연락을 끊고, 게임이나 주식 관련 게시판에 서툴게 독을 풀었다가 그 독의 색깔과 냄새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과 피곤하고 소모적인 싸움을 반복하는 일이 발생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왜 여기에 독을 푸냐고, 나도 힘든데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무라는 이들도 꼭 있다. 독은 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독이 생겨난 것 자체가 신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마음 공부를 더 하라는 선문답성 충고도 나온다. 그러는 와중에 '분명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그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으며 사태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작전에 따라 은폐와 부인을 거듭하며 스스로의 안위에 키득거리고 그 독의 전염을 조장하고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코스프레 하기도 한다. 다시 그들의 그러한 뻔뻔한 모습을 보며 독은 치명적이 되어가고 스스로를 죽이기 전에 밖으로 토해내어야 할 무언가가 되어간다. 피를 보아야 끝이 날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렇게 만들어져 간다.

소설 속에서 남자는 변했다. 딸에게 사죄하고 딸은 아무 잘못 없고 사회가 범인들을 처벌하지 않으니 스스로 처벌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이상한 고등학생에게 무릎을 꿇고 싸움을 배우며 변해간다. 물론 이것은 현실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고난을 극복하고 영웅이 되어간다는, 너무도 익숙한 신화적인 설정에 가깝다. 남자가 일차적인 분노와 고통에 휘둘리기만 하는 '약자'의 길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고등학생에게 싸움을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 남자는 '약자'라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다. 현실이 아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12/21 09:05
수정 아이콘
제가 평소에 하던 생각이랑 비슷하네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제 가능한 요소'와 '통제 불가능한 요소'라는게 엄청나게 가변적인거 같아요... 특히 강자와 약자나 특정 프레임 안에서의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따라서요. 그래서 요즘은 속편하게 통제 가능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운명론이죠. 어차피 잘못이라는 단어는 약자와 실패자들만 쓰는 단어기 때문이죠
인식의노력
16/12/21 14:46
수정 아이콘
결국 본질은 약하다는데 있는 것 아닌가요. 남자가 강해질 것이 아니라 여자가 강해져야죠. 성폭력이건 사회에서의 지위건 남자들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직접 해내야 되는겁니다. 언제까지 자신의 안위를 남한테 지켜달라고 할지 의문이고 세상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데 언제까지 진실을 외면한채 가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방관자들의 여론으로 만족할런지.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9862 [일반] 주관적으로 선정한 슈퍼 히어로 무비 베스트 5 (문상 추첨 결과) [40] Jace T MndSclptr8506 17/01/07 8506 1
69861 [일반] 너의 이름은은 실망이다. -약스포- [52] makka8426 17/01/07 8426 5
69860 [일반] 민주당의 갈길은 '진짜보수'다. 스스로 야권에 묶이지 말라. [37] 뜨와에므와8030 17/01/07 8030 17
69859 [일반] '너의 이름은' 은 대실망이네요. [74] 삭제됨8341 17/01/07 8341 3
69858 [일반] [모집] 삼국지를 같이 공부하실 열정적인 전공자분들을 모집합니다. [41] 靑龍7197 17/01/06 7197 5
69857 [일반] 4조원 들인 서울~강릉 KTX, 상봉역에서 모두 출발 두고 논란 [58] 군디츠마라14794 17/01/06 14794 0
69856 [일반] 삼성과 LG... 될 놈은 되고 안 될놈은 안된다 [94] ZeroOne14861 17/01/06 14861 1
69855 [일반] 심리학으로 '별' 따기: 고통스러워도 연구를 계속 하는 이유 [35] 윌모어7433 17/01/06 7433 17
69854 [일반] 박스오피스 1위 '너의 이름은' 추천합니다. [94] wlsak10066 17/01/06 10066 4
69853 [일반] 이걸 만든 사람들의 자손들인데... [31] Neanderthal9827 17/01/06 9827 8
69852 [일반] 굴종외교의 개념은 무엇인가? [169] Gloomy13072 17/01/06 13072 4
69849 [일반] 우리 국민의 삶은 윤택해질 수 있을까? (상당히 우울한 뉴스들) [55] 최강한화11371 17/01/06 11371 7
69848 [일반] 과부제조기 V-22 오스프리 [12] 모모스201314056 17/01/06 14056 6
69847 [일반] 매우 따뜻한 이번주 날씨입니다. [36] 음악감상이좋아요8503 17/01/06 8503 3
69846 [일반] 박근혜 측, “촛불과 언론은 ‘종북’, 검찰과 특검은 ‘친노'” [97] 부두술사13538 17/01/06 13538 2
69845 [일반] [동영상 다수] 까마귀는 얼마나 똑똑한가? [23] OrBef10838 17/01/06 10838 3
69844 [일반] 셜록 시즌 4 에피01 얘기를 해볼까요? (스포주의) [19] 튜브6526 17/01/06 6526 0
69843 [일반] 썰전 200회 축하영상에 나온 인물들.jpg [54] 킹보검12153 17/01/06 12153 10
69842 [일반] 국민의당 대표 경선 토론회에서 있었던 일 [39] ZeroOne11554 17/01/06 11554 4
69841 [일반] 검찰 vs 경찰 수사권 조정 갈등에 대한 이야기 [45] 사고회로10568 17/01/06 10568 1
69839 [일반] [잡담] 디즈니를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다 [15] 스웨트4918 17/01/05 4918 8
69838 [일반] 인간 안철수를 존경하며 좋아합니다. [57] 삭제됨10205 17/01/05 10205 13
69837 [일반] (번역) 빅 데이터가 빅 브라더를 만날 때 [9] 아수10807 17/01/05 10807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