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제가 다이어리에 써 두었다가 언젠가는 완성해야지 하고 골격만 잡아두었던 글(이라기에는 잡설)입니다.
메세지에 비해 장황한 글이기도하고, 혼자서 살을 덧대기보다 다양한분들과 공감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하는 평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걱정되는 점은 제가 무신론자라 종교 교리를 부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었는데, 이것은 저의 사견일 뿐이어서 이것이 종교적인 색채로 보인다면 즉각 사죄드리고 글은 삭제하겠습니다.
종교 교리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고민이라는 점에서 접근해주셨으면 합니다. 너그러운 이해 부탁드립니다.
I. 들어가며
나는 오늘 존재의 이유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인간이 사고를 시작한 순간부터 있어왔던 고민이다. 이는 신앙으로, 철학으로, 이성과 논리로, 또한 과학으로 고민되어온 주제이다. 이를 논함에 식견이 부족한 나로서는 무리하고 무익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행위가, 나의 견해에 따른다면, 존재의 이유를 논증하는데 하나의 논거로서 작용할 수 있는 존재의 발현이므로 지식을 보충하기 이전 단계에서의 논증이 결과적으로 무익한 것이더라도, 나의 행위는 합리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논증은 '합리적인 논증'이 됨을 지향한다. 따라서 일반인의 관점에서 납득 가능한 근거가 없다면 배척할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논증을 지향한다. 과학적 지식은 그 자체로서 나의 논증과정이 없어도 타당한 논거들이 존재하기에 합리성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효율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논증 과정에 납득 불가능한 연결고리가 있다면 이는 논증의 실패이거나, 그것이 보완 가능한 경우라면 완성을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II. 왜 존재하는가
(1) 도입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째서 생존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생물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나의 물음은 오후의 한가지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무질서성은 증가하는데, 어째서 생물개체의 Complexity는 증가하는가?"
이에 대해 잘 알려진 답은 진화-Evolution이다. 그렇다면 왜 진화하는가?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 진화한다. 왜 생존하려 하는가? 그것은 존재하기 위해서이다. 어째서 존재하려 하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먼저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류와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종교, 따라서 잘 알려져 있는 종교적인 교리부터 검토해보자. 전제로서, 나는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종교가 없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종교적 교리에 대해 논할 것이기 때문에 나의 신학적인 무지에 대해 종교인들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한다.
(2) (인간적인)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우주인가
우주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시각에서부터 접근해보자. 이에 따르면 존재의 이유에 대한 답은 우리는 누가 만들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창조주의 의사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주는 어째서 만들어졌는가?
a. 창조주가 왠지 모르지만 만들었다.
b. 창조주가 자신과 닮은 개체를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
c. 창조주의 발전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널리 알려진 기독교적 입장과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떠올려보면 위와 같은 경우가 떠오른다. 기독교적 관점에 따르면 창조주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데 왠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주를 만들었다. 내가 이에 대해 왜 만들었는가 질문했을 때, 기독교인의 답은 '그건 창조주만이 아신다'고 하였다.(a의 입장) 창조주의 뜻에 따라 만들었다는 것인데, 나는 존재의 본질적 이유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지, 인과적으로 원인만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조금 더 사고해본다.
나는 인간이기에 창조주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기에 나의 사고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고 기독교적 주장이 우주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 사고는 (지금 내가 알기로는) 인간만이 행하고 있지만, 논리적 사고를 하는 것이 인간뿐이라고 해서 그것이 인간적인 사고라는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논리는 그 자체로 타당하고, 합리성은 3차원의 우주뿐 아니라 언제나 어느 경우에서나 타당할 수밖에 없다.(이는 논리학의 영역이니 별론으로 함)
따라서, 나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 창조주가 인간을 만든 것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i) 효용을 위해서 만들었다.
(ii) 효용은 없지만 만들었다.
(i)의 경우에 전술한 b 등의 오락적 효용에 의한 이유와, c 등의 발전적 효용에 의한 이유를 상정해볼 수 있다.
가. 오락적 효용으로 만들었다는 시각에 대한 비판
오락적 효용으로 만들었다기에는, 빅뱅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조주의 낭비가 너무 극심하다. 이것이 창조주의 입장에서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오락적 효용으로 만들었다기에는 정체기는 너무 길고 격변기는 너무 짧다. 창조는 목적을 갖기 마련인데, 단순한 관상용도로 창조했다면 변화를 줄 이유가 없고, 관찰용도로 창조했다면 비용면에서 낭비가 너무 크다. 기독교의 설명대로 7일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면 매일매일 즐거운 창작의 나날이었겠지만, 과학적 시각에서 빅뱅은 너무 오래전이고 지구의 생성도 꽤 오래전이며, 기독교적 설명에 따른 '자신을 닮은 존재의 창조를 위한 오락적 효용'은 너무 역사가 짧다.
따라서 이는 합리성이 부족해 배척한다.
나. 발전적 효용으로 만들었다는 시각에 대한 비판
발전적 효용을 비유하자면, 창조주가 마치 연구원처럼 우주라는 하나의 폐쇄된 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우주를 발전시키며 자신도 그에 따라 학습한다는 시각이다. 이는 오락적 효용보다는 그럴싸한 목적의식이 보인다. '발전' = '진화'라는 생물적 욕구가 반영되어서 생물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치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판이 적용될 수 있다.
발전적 효용을 위해서라면 반응(빅뱅)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마냥 기다릴 이유가 없다. 자신보다 나은 단계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라면, 인위적으로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자연적인' 과정보다 변화를 앞당기면 된다. 그것이 개체로 하여금 창조주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여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소가 될까봐 두려워서 그러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창조주에 대한 의심은 인간이라는 지적존재에 죽음이라는 생물적 필연이 겹쳐 종교라는 개념이 생긴 뒤의 일이고, 빅뱅이 얼마나 오래전에 발생했는지 알고 나서, 자연적인 과정보다 변화가 빠른데?라고 의심해서 떠올린 것이 아니다. 게다가, 효용가치를 얻을 수 있는 시간적 비율이 너무 짧다. 창조주의 시간의 흐름은 앞의 시간은 빨리감기를 하고 여기부터는 느리게 볼 수 있다는 설정도 너무 인위적이다. 그럴거면 애초에 시간 개념을 인간적으로 설정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도 합리성이 부족해 배척한다.
(ii) 효용은 없지만 만들었다.
자체로서 합리성이 부족해 배척한다.
소결 :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우주라는 것은 우주의 발생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적 불균형이 창조주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이는 배척한다.
(3) 우주의 진화
만약 만들어진 우주가 아니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존재의 이유를 그 자체로서 규명해야한다. 이번에는 역으로 인간의 발생을 유추해보자. 수정란에서 시작해서 성인으로 발달하기까지 계의 복잡성은 높아지고, 기능은 발달한다. 이는 좀더 넓게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지켜보아도 같다. 그리고 생물의 진화에서부터 지켜보아도 그러하다. 이를 우주적으로 유추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우주는 빅뱅(수정란)에서부터 진화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 어째서 최초로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인간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고찰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은 우주의 진화를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몇가지를 통해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해보자.
인간은 우주의 Component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원자도, 행성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생물도 마찬가지이기에 인간이라고 달리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Component가 진화함은 우주적 진화의 의지라고 생각한다면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1) 왜 개체는 불멸하지 않는가
만약 우주의 진화를 위해서라면 개체는 불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개체는 학습하고 그것이 곧 끊임없는 발전을 낳을 것이며, 발전은 곧 우주의 진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절대적인 힘은 다양성을 파괴하고 창의성을 잃는다. 그리고 정체한다.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다.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진화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적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조화하기 위해 우주적으로 합리적인 시스템이 있다. 그것은 '분산'이다. 나의 첫번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어째서 엔트로피는 증가하는가?"
인간은 썩어 영양분이 된다. 그것이 분산되지 않는다면 각자가 이용할 수 없다. 따라서 에너지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것은 각각의 개체가 이를 이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주적 의지는 무질서의 증가가 아니라 에너지의 분산을 통한 다양성의 증가와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적 진화인 것이다.
상호작용의 예를 들면, 개체는 분산되어 각자의 영역을 도맡는다. 포식자이자 피식자가 될 수 있기에 우주는 사냥하는 것과 사냥을 피하는 방법을 동시에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주적 발전이다. 절대적인 불멸자가 존재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불멸 역시 발전을 위해서는 유해한 요소인 것이다. 하지만, 진화적 가치는 불멸함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회'라는 형태로 존속한다. 인간의 삶과 가치들은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그것이 기술적 가치든 감정적 가치든 발전적 형태로 존속하도록 한다. 이것은 우주의 진화를 위해 합리적인 구조이다.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적 구조는, 우주의 진화라는 거시적 관점의 합리성이 된다.
2) 진화는 당위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적인 가치인가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되어야 합리적이다.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된다면 그 자체로 합리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진화는 당위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적 가치여야 논증은 타당해진다. 이를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인 요소에 따라 귀납적으로 추론해보자.
시간에 따라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 단순히 공간의 팽창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그 다양성과 복잡성을 키워가고 있다. 소멸을 낳기도 하지만 소멸은 에너지보존에 따라 또다른 생성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우주는 최초와 비교해 놀라울 정도의 복잡성을 보인다. 이 자체가 귀납적으로, 거시적으로 우주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고, 이는 당위적 가치가 아니라 우주라는 존재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라고 볼 것이다.
III. 삶에의 적용
우주의 진화라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접근은 결국 인간적으로는 무익한 논의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인간의 사고는 인간을,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인데 이를 부정하는 사고가 어떠한 인간적인 효용가치가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이 결과적으로는 효용을 낳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해볼 여지를 남긴다.
(1) 인간은 죽으면 소멸하는가
이에 대해 과학적인 정답은 그렇다 이다. 소멸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도 없이, 뇌기능이 정지하면 지금 사고하고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존속한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심폐가 정지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논거이다.
만약 영혼이라는 영원불멸한 존재가 있다면 어째서 정신분열증이 생긴 사람이 생기는가, 어째서 심폐가 정지했다가 심폐소생술로 깨어나는 사람이 생기고, 식물인간 상태의 사람이 몇년이 지나 깨어나는가? 만약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영혼이라는 존재를 지각해야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치매에 걸리거나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들에게 있어 영혼은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만약 육체와 인간의 정신작용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영혼이라면 그것이 도대체 어떤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에 따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 기억을 유지한 채로 영원히 살아간다는 영혼이라는 관점은 부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완전히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2) 모든 것은 죽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의 진화를 위해 살아간다고 하였다. 사회와 상호작용하고, 우리가 죽으면 지인의 슬픔을 남기고 지인은 우리를 기억하고 그러한 기억은 어떠한 작용을 낳을 것이다. 그러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오면서 사회와의 무수한 상호작용을 통한 그 발전은 사회에 존속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그의 기억에 남아 그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날 것이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비한 식품에 의해 누군가의 수익이 있었고, 자연의 변화가 있었으며, 그것 역시 사회의 작동에 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인간의 선악은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그것은 역사를 보면 안다. 인간의 역사는 탐욕과 약탈, 적자생존의 과거로부터 공존과 평등, 개인의 존엄을 존재하는 가치로 점차 발전해왔다. 이러한 가치들과 함께 인간 사회는 발전해왔고, 현재에 이르렀다. 이 자체가 거시적, 귀납적으로 인류애적인 가치의 동물적, 본능적 가치에 대한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사회라는 구조 자체에서 인간적인 가치들의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모든 죽어간 사람들은 그 가치에 크거나 작게 기여했다. 해롭게 기여한 가치들은 점차 자리를 잃어왔다. 여기에 선악의 의미가 있다. 나라는 인간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치가 존속가능한 가치로서 사회에 남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인류애적인 가치들이었다. 한시적 삶에 있어 이들보다 유용한 가치를 좇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사회라는 구조 속에 내재하여 남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행한 인류애적인 행위들일 것이다.
IV. 결론
우주는 나를 통해 진화하고 나는 죽어서 우주에 내재할 것이다. 우주는 학습해가고 언젠가는 그 완전무결성에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어떻게될까?
아마 그 때 '나'는 말할 것이다. "이제 다음 무대(dimension)로 가볼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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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현존, 주로 생물체의 탄생과 생존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 봤어요. 글도 레퍼런스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냥 제 얄팍한(고교수준) 과학지식으로 고찰해본 것이라 ㅜㅜ 만약 깊이있는 글이 되어야 한다면 마제카이님 말씀처럼 첫걸음부터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1은 시간의 상대성이 있다 하더라도 1차원시간의 우주 내부에서 시간의 방향성은 일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물론 그마저도 극한에서 수축한다고 보면 다르겠지만요ㅠㅠ
2.는 어떤 책을 참조하면좋을까요? 문외한이라 윗분들이 말씀하신 하이데거도 읽어보고싶네요 존재와시간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포스가^^;
네. 그건 뉴튼의 관점에 가깝고 맥스웰과 아인슈타인이 등장한 후 폐기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미시적으로는 양자역학에 의해서 거시적으로는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깨지게 되죠. 이 두 이론을 통합하려 했던 시도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게 끈이론인데 이것은 더더욱 뉴튼의 관점과 괴리가 크고요.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 진화한다. 왜 생존하려 하는가? 그것은 존재하기 위해서이다. 어째서 존재하려 하는가?
여기서부터 과학과는 거리가 멀고 주제 자체가 과학적논증과 맞지 않는데.. 철학적 고찰에 알고계신 과학지식 일부를 양념하신거죠.
진화는 적자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고 차이가 있는 개체의 적자생존이 누적된 결과가 진화입니다. 생물체의 변화엔 목적성이 없어요. 엔트로피 증가 법칙과 생물체의 복잡성 증가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차이일뿐이에요. 생물체의 복잡성증가라고 해봐야 엔트로피증가ㅡ에너지의 손실이라는 수십 수백억년 단위의 법칙의 우하향 그래프를 수억배확대해야 보이는 극소한 좌상승구간일 뿐인거죠..
무엇보다 과학에서 말하는 왜? 는 왜 존재하는가의 왜?와는 단어만 같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1달을 살고 죽는 벌레 입장에서는 인간의 농사는 쓸데없이 오래걸리는 작업이죠.
수확하고 거두는건 한순간인데 말이죠.
비슷한 예로는 도미노 쌓기가 있죠. 도미노 쌓는데 걸리는 시간은 엄청나지만 쓰러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매우짧습니다.
무신론적 관점을 견지하신다는 것은 알겠지만 너무 인간본위의 사유가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저는 무신론적인 우주를 가정했으나, 말씀처럼 그것이 목적성을 띤다는 것 자체가 크게는 유신론적 관점과 다를바 없겠지요.
하지만, 자연법칙적 Law가 존재하는가와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적인 창조주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답을 알수 있는것도 아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