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은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문학을 좋아하고 미국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흔해 빠진 소녀죠. 학교에서 친구들과 연애에 대한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오면 스파게티를 먹고 퍼질러서 잠에 드는 것이 일과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킹카가 접근하고, 그와의 연애가 시작되지만 아델은 이게 진짜로 좋은지 어쩐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데이트를 위해 길을 건너던 중, 아델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옵니다. 푸른 머리의 독특함에 시선을 빼앗긴 아델, 그리고 그 여자 역시도 시선을 의식한 듯 등 뒤로 아델에게 시선을 던지고, 그 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아마 강도 높은 정사신에 놀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초의 정사씬이 나오기 전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가 놀란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바로 러닝 타임 내내 지속되는 ‘클로즈업’이죠. 정말 어지간해서는 미디엄 쇼트를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고집스럽게 아델의 얼굴만을 비춰줍니다. 보통의 영화들이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극대화하려고 쓰는 테크닉을 이 영화는 작품 전반에 걸쳐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아델의 경험을 글쎄 이랬대~ 하고 들려주거나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스크린 밖에서 아델의 이야기를 곱씹거나 자신의 경험과 겹치는 수준의 공감을 원하는 것이 아니지요. 말 그대로, 감독은 관객이 아델을 체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녀가 뭘 생각하고 느끼는지 이렇게 가까이서 봐라! 그녀가 되어라! Blue is the warmest color라는 시적인 제목을 제치고 ‘아델의 삶’이라는 다소 평이한 원제를 어째서 감독이 택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이 아델의 삶,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붙는 세부사항들은 부차적일 뿐이죠. 아마 보고 있으면 어느새 이 영화가 퀴어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느낄 겁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동성애도, 동성애자 자체도 아니니까요. 그저 아델이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한 누군가가 엠마라는 XX 염색체의 소유자였을 뿐입니다. 이 영화는 동성애와 이성애가 동등한 가치,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성정체성으로 겪는 불편함은 그들의 관계안에서 작용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지 사회적인 무언가가 아니에요.
엠마의 성별을 남자로 치환해본다면 이 점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들의 사랑과 갈등이 뭔가 이상해지거나 고유의 특별함이 사라져버리나요? 오히려 너무 진부해서 흔한 통속극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진취적이고 자기 세계가 뚜렷한 남성, 그리고 그 남자에 매몰되어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껴안고 사는 수동적인 여자. 알파걸들이 차고 넘치는 21세기에도 이 주제를 기꺼이 소비할 사람들은 많습니다. 게다가, 아델은 완전한 레즈비언도 아닙니다. 그녀가 잠시 바람을 피운 상대는 남자였지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아델의 새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사람의 성별을 본다면, 이 영화는 레즈비언, 그리고 동성애자들만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왜 제가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 규정하는 걸 막느냐,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퀴어 영화로 이 영화를 정의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철없는 여자 이야기가 되버리니까요. 퀴어 영화가 아닌데 왜 여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하느냐, 그것은 동성애라는 사랑의 형태가 우리 모두가 겪을 수 밖에 없는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데 훨씬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델의 머리 색이 변하는 기점부터, 영화는 사랑의 영속성과 변질에 대해서까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첫번째 본질은 성장입니다. 성장이란 단순히 육체의 부피 면적 변화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각하는 것 또한 포함하죠. 그리고 방황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성적 정체성입니다. 난 여자가 좋구나, 난 남자가 좋구나, 많은 사람들이 얼떨결에 동성 아닌 이성에게서 두근거림을 느끼고 2차성징을 경험합니다만 이건 당연한 것도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어떤 성별의 사람에게 인력 혹은 척력을 느끼는가.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자아의 한 부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델에게 이를 처음으로 일깨워주는 것은 한 순간 스쳐지나간 엠마의 잔상입니다. 그날 밤 자다가 그녀의 생각(꿈)으로 자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 아델은 킹카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지만 별다른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 동성친구가 충동적으로 시도한 키스에 흥분을 느끼고 그녀에게 거절을 당하는 슬픔을 겪으며 아델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이후 게이바를 가고 레즈비언 바에 가서 엠마를 만난 것, 그리고 레즈들이 마신다는 맥주를 마시는 것과 ‘사촌’이라 소개를 받는 장면은 그녀가 점점 성적 정체성을 확인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죠. 이후 그녀의 성년이 된 해의 생일 파티 장면에서 그녀의 성적 정체성이 어떻게 자리잡아가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쇼트 가득한 남자들, 그리고 그 남자들 사이에 있을 때의 아델은 웃음기 없이 불편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후 프레임을 주로 채우는 성별이 여자로 바뀌고,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울려퍼질 때 아델은 훨씬 더 명랑하고 편안하게 춤을 춥니다. I, I follow you 란 가사를 흥얼거리면서 말이죠. 이렇게 파랑 머리 엠마에게 사랑 받고 그녀를 사랑하며 아델은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또 다른 본질은 바로 ‘배타성’입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오로지 서로만이 유효한 절대적 우선순위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논외가 되버리죠.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관계인 친구, 그리고 가족을 두고 연인의 관계를 저울질 하는 것은 가장 흔하고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가장 유명한 로맨스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런 사랑의 배타성이 어떤 현상인지를 잘 말해주는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겠죠. 동성애는 다른 일반적 사랑보다도 이런 배타성이 훨씬 강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대다수에게서 이해받지 못하기에 자신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만큼 상대방에게 모든 이해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인거죠.
엠마가 학교로 아델을 찾아간 그 다음날 아델에게 생긴 사태는 이런 배타성을 보여줍니다. 동성애자임을 의심받으며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고립됩니다. 타의에 의한 것이긴 하나, 아델에게 최우선 순위인 엠마가 생기자 친구들이 그 순위 밖으로 밀려나갔죠. 이 배타성은 아델과 엠마가 함께 있는 공간으로 상징됩니다. 먼저, 연애 초기 서로에게 열렬히 빠져있을 때 영화는 프레임 안에 오로지 이 둘만을 둡니다. 그들이 자주 가던 벤치에서 엠마와 아델 둘 만이 서로 존재하는 듯 보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배타적 애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엠마의 파티에서 나타납니다. 이제 영화는 한 프레임 안에 더 이상 아델과 엠마 두 사람 만을 담아두지 않을 뿐더러, 그 프레임을 채운 사람들 속에서 아델과 엠마가 보이는 반응 또한 대조적입니다. 아델이 직장 동료와 유대도 포기하고 억지로 불편한 파티에 끼어있는 데 반해 아델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이후 이들이 이별 후 레스토랑에서 재회할 때도 프레임은 이 둘만을 잡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들만의 절대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죠. 그리고 엠마의 전시회에서 영화는 한 프레임 안에 아델과 수많은 사람을 같이 섞어놓습니다. 이 프레임의 의도적 배치를 본다면 아델이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장면에서 그녀의 그리움을 더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프레임을 홀로 존재하는 아델과 그녀 주변의 공간을 모두 잠식한 푸른 색. 말 그대로, 이는 온 세상이 사랑하는 이로 가득차 있는 공간에 자신을 놔둔 것이죠.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죠. 이것은 사랑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사랑이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매력이었던 다름은 점점 틀림이 되고 벽으로 쌓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성애는 역설적으로 이 개인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사랑입니다. 성별이 같기에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생기는 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동성애 역시 성별만 같을 뿐 모든 사람은 제각각 다르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줄 뿐이니까요.
아델과 엠마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들이 어떨게 다른지가 나타납니다. 레즈비언 바에서, 엠마가 좋아하는 맥주를 아델은 토할 것 같은 맛이라고 하죠. 그리고 산책하면서 드러난 취향의 차이 중 하나는, 아델이 싫어하는 굴을 엠마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아델은 노력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해요. 초대 받은 엠마네 식구의 저녁 식사에서 그녀는 굴을 맛있게 먹어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노력으로 불가능한 차이 또한 존재하죠. 엠마는 현실적 안정과 소박한 꿈을 지향하는 아델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델 또한 클림트니 뭐니 하고 떠드는 엠마와 친구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죠. 그리고 아델은 이제 변화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부분에 싫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죠.
이 차이가 낳는 것은 결국 ‘종속성’입니다. 그리고 이 점 또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밖에 없다’ 라고 토마스 만이 말했듯이요. 어느 한 쪽은 결국 다른 한 쪽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50:50으로 서로가 동등하게 주고 받는 사랑이 동성애라고 가능할 리 없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첫사랑의 경우, 이 종속성은 한쪽에게 훨씬 더 크게 나타나곤 합니다. 서로가 교집합으로 교차하는 부분이 어느 한 쪽에서는 커지고 어느 한 쪽에서는 작아지고, 그렇게 결국 부분집합이 되거나 공집합이 되고 마는 것이죠.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한 사람을 종속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닮으려 하는 것이죠. 아델의 첫 남자친구는 독서가 취미가 아님에도 아델에게 자신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독서를 시도한다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아델과 엠마의 관계에서 반대로 나타납니다. 일단 아델은 엠마의 집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주거 형태가 종속 그 자체죠. 또한 이 둘의 창작 활동에 서로가 끼치는 영향 자체도 그렇습니다. 아델은 엠마의 뮤즈가 되어 그녀의 그림에 모델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엠마는 아델의 글쓰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글이 좋다는 칭찬과 핀잔 비슷한 소리일 뿐이죠. 아델은 자신이 엠마의 세계에 맞는 사람 같지 않아서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엠마는 자신의 세계에 아델을 맞추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아델은 엠마에게 잠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사랑이 변질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죠.
이제 슬슬 이 영화의 베드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이 베드신의 강도와 분량에 대해서 불만과 의문을 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가장 큰 본질이자 그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사랑은 육체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요. 동시에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동성애라는 형태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로도 보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델이 엠마를 사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그녀의 자위행위입니다. 그녀와 성적으로 맺어지고 싶다는 소망이 이 둘의 사랑의 출발점이죠. 이 육욕에 대한 고찰은 이미 아델이 스쳐간 두 명의 인물을 통해서도 발견됩니다. 그녀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와의 섹스가 허무하게 끝났을 때죠. 영화는 이 커플의 끝을 베드신, 그리고 이별로 정리해버립니다. 아델이 동급생 친구에게 사랑을 느끼는 계기 또한 그녀와의 키스에요. 그녀의 모든 사랑은 육체를 통해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델과 엠마의 이별 또한 육체의 결별로 나타납니다. 그렇게나 서로의 육체를 갈구하고 키스를 하며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지만 이는 결코 섹스로 이어지지 않죠. (그리고 이 장면에서만큼은 프레임 안에 이 둘만이 존재합니다) 육체에서 시작해 육체로 끝나는 것, 이것이 감독이 정의하는 사랑의 최초와 마지막입니다.
아델과 엠마의 베드신은 굉장히 길게 나옵니다.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탐하는지 구석구석 온 몸을 오랜 시간동안 보여줍니다. 이것은 아델과 엠마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가질 수 있었던 최고의 행복이기 때문이죠.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가장 최고조에 이르고, 이를 가장 뚜렷하게 만끽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섹스입니다.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단계가 섹스라는,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떠들지만 욕망의 해소로서만 넘어가버리는 이 진리를 영화는 다시 한번 부각시키고 있죠. 저는 사실 이 부분에서 감독의 도전장 같은 것도 느꼈습니다. 섹스를 사랑의 마지막 절차나 부가적인 것처럼 표현하지 마라! 그리고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나긋나긋한 초식성 연애를 섣불리 예상하지 마라! 동시에 이는 아델과 엠마가 섹스를 하는 순간이 그들 연애의 절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절정을 지난 이 연인들이 이후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한 거죠. (그리고 이 둘이 동거하는 때부터 정사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델의 요구를 엠마가 차갑게 거절하기도 하죠)
이와 동시에, 이들의 베드신은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한 감정인지를 상징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정사였다면, 이 둘은 동시에 쾌감을 느낄 수 있겠죠. 그렇지만 이들은 둘 다 여자이기 때문에 동시에 쾌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항상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몸과 성기를 애무하면 그 애무를 받는 한 사람만이 쾌락을 느끼는 구조를 띄고 있어요.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가장 일체감을 느껴야 하는 순간에도 사랑은 쌍방이 아닌 일방통행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섹스 할 때 동성애자들만이 느끼는 애로사항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순간에 겪는 비극입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농밀한 만큼 덧없고, 아름다운 만큼 잔인하고, 서러운 만큼 눈부시던 사랑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로 인해 환희와 격정, 흐느낌을 경험해봤다면 이 영화는 당신의 그 모든 기억을 다시 들춰낼 겁니다. 울고 있는 아델에게 엠마는 말하죠. “넌 언제나 내게 애틋한 사람이야. 영원히.” 그리고 이별의 통증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가슴 속 시퍼런 멍자욱은 그렇게 죽을 때까지 남아있을 거에요. 관계는 끝났어도, 그 투명하고 열렬했던 마음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거란 사실에 우리는 어떡해야 할까요.
@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키워드가 있죠. 무언가를 먹는 것, 그리고 아델이 춤추는 것 등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까지 생각했다가는 제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네요.
@ 귀걸이, 영화, 아델의 헤어스타일 등 짚고 넘어가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지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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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묘사에 있어서 클로즈업이 효과적이지만 짐짓 답답해 보이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것은 연기자들의 연기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것이고요. 최근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도 이런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연출로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작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작품이네요..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전 이 영화를 배우의 꿈을 가진 여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더군요. 물론 너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겠어? 라는 유치한 도발은 아닙니다.
저렇게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담았을 때 감정을 모두 얼굴에 담아낼 수 있느냐
저런 지독한 연기를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면 어떤 연기를 하고 싶느냐
레아 세이두도 놀랐지만 아델이라는 배우에게 정말 놀랐어요. 게다가 이 배우 인터뷰 하는 걸 보니까 엄청 털털한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