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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20 18:21:14
Name Realise
Subject [일반] 알콜과 함께하는 프그르.

알콜 CH3OH

한모금 술이

 목줄기를 타고내려가

찢겨진
가슴에 닿아

상처난 부위를 마비시키고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들고 나서는

니가없는
세상 다른 곳으로
나를



 가게 간판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 할 때 쯔음 집으로 향한다.  뭐 거창하게 집이랬지만 20대 후반의 남자가 사는 곳이래 봤자 뻔하지 않는가. 작은 원룸. 차가운 바깥 바람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밤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기계음만이 들린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소중한 보금자리가 나를 반긴다. 비록 내가 발을 들여 놓을 때 소름끼치는 적막감과 어두컴컴함을 극복해야 하더라도 이렇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나만의 보금자리가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시어머니 같은 선임들 바글바글하고 시끌벅적한 군 내무실에 비하면 비록 적막할 지언정 여기가 바로 천국이지.

원룸 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 티비, 노트북, 세탁기, 냉장고 등 혼자 살기에는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원룸 가구들이다.  딱 적당한 크기에 적당한 구조다. 혼자 사는데는 정말 완벽한 곳이다. 30대가 점점 다가올 수록 친구들 또한 부모님 품을 떠나 직장을 찾아, 학교를 찾아 전국으로 흩어져 내가 살고 있는 이런 작고 네모난 원룸에 다들 자리 잡고 치열하게 싸워야 할 자신의 전장으로 나가기 전 잠깐의 휴식을 취하겠지.

학창시절, 그리고 대학생 시절 때의 친구들끼리 대화 주제는 풍성한 편이었다. 설사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더라도 학업, 미래 , 군대 , 그리고 상상속의 동물인 여자 이야기 등 하루종일 메세지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도 있었고, 전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세시간씩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모 품에서 편안하게 지냈던 대학생활을 끝마치고 친구들이 하나둘 씩 사회라는 전선에 뛰어든 이후에는 뭔가 조금 바뀌었다. 우리 모두의 온 신경과 관심은 자신의 일터, 즉 전장에 집중되어 있었고 다른 곳에 시간과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스스로 감당해야 했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서서히 느꼈을 것이다.  각자의 전장에는 혼자 싸워야 하고 그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서로간의 우정 관계가 금이가거나 소원해 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간의 연락은 당연히도 크게 줄었다. 치열하게 전투중이라 온몸이 너덜너덜해 진 친구들에게 예전처럼 사소한 잡담을 나누기는 어려웠으며 심지어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나마 가끔 만난다면 그때서야 이야기 해 볼까. 심지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연봉을 받는 중공업 회사에 다니는 친구 하나는 삼겹살도 잘 먹지 않을려고 했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쉬는 시간 났는데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이런 음식 먹을 수 없다나 뭐라나...  다들 그렇게 마음을 나눌 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예전에 주택 2층에서 혼자 살았던 적이 있다. 동생은 군에 가 있고 부모님은 시골에서 사시고 나 혼자 2층 전체를 다 썼었다. 그리고 1층은 원룸식으로 세를 줬었는데 어느 날 나이 50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방이 있냐고 찾아 왔었다.  그렇게 그 아저씨가 방 하나를 쓰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기러기 아빠랜다. 중공업회사에 다니는데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혼자 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가끔 회사 동료로 보이는 친구들과 같이 술 한잔 하고 들어올 때 정말 즐거워 보였다. 방에서 한잔 더 하자~, 아니면 내가 2차 쏠게 가자~, 그러나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술이라도 한잔 하고 퇴근하는 경우는 정말 보기 어려웠었다. 친구들도 다 가정이 있고 할텐데 그렇게 매일 밖에서 술을 마실 수가 있나 그래...어쩌다 가끔 그렇게 친구들과 회포를 푸는거지.  공과금 때문에 그 아저씨가 퇴근 한 후 그 아저씨 방을 종종 찾아 갔었다. 그 때마다 그 아저씨는 작디작은 원룸에서 배달 치킨과 함께 혼자서 소주를 들이키며 티비를 틀어놓고 고독함과 외로움을 달래고 있으셨다. 2층을 세 놓고 내가 먼저 그 집을 떠났는데, 몇년이 흐른 아직도 그 아저씨를 찾아가서 내가 먼저 같이 술 한잔 하자고 말을 꺼내지 못했던 사실이 조금 후회가 된다. 

친구들의 원룸을 방문 해 본다. 전투에서의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나가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바로 그 원룸이다. 컴퓨터에는 무한도전이 시리즈 별로 있고, 영화도 종류별로 나눠져 있다. 그리고 냉장고 겉면에는 온통 배달 음식 찌라시로 가득차 있고 냉장고 안에는 한가득 술과 간단한 술안주 뿐이다. 그 아저씨 뿐만이 아니었다. 내 친구들 또한 얼마 없는 잠깐 잠깐의 휴식에, 누군가와 함께하긴 부족한 그 시간에 홀로 영화나 무한도전을 보면서 배달음식과 함께 술로써 혼자서 버티고 싸워야 하는 그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나라고 별 다를 게 있을까. 근데 나는 영화도 좋아하지 않고... 쇼 프로그램도 일체 보지 않는다. 그냥 간단하게 치킨 한마리와 맥주를 사서 들고 들어온다.  그러곤 맥주를 마시면서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켜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뭐 그래도 친구들 소식이나 알아볼까 싶어서 페이스북을 들어간다. 꼴보기 싫은 수많은 광고같은 좋아요 속에서 친구들 소식을 찾는다. 어라? 고등학교 친구 하나 결혼 한다고 소식이 올라왔다. 제길 마냥 부럽다. 부러워 배알이 꼴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결혼 축하한다. 결혼식날 꼭 갈게 라고 댓글을 단다. 눈물 쏟겠네.

그리고 또 다른 소식을 찾아보니 이미 딸 까지 낳은 친구가 딸 사진 올리면서 자랑질에 여념이 없다. 이 망할놈은 졸업하고 취직할 생각은 안하고 딸 자랑질이냐!!! 또 열폭을 한다.  아 이 친구는 대학교 때 속칭 사고쳐서 결혼했다. 집에 부모님이 좀 잘 살았던 것 같은데 여자친구 임신 시키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나 무려 장인어른 집에서 데릴사위를 했었다.  그렇게 한 일년 살고 딸 낳으니 뭐 부모님도 별 수 있나. 집 한채 해주고 결혼시켰지.  엄마한테 이 얘기를 하니까 엄마도 좀 손자 손녀 보고싶으니 너도 좀 그렇게라도 해봐라라고 하시는데 아놔... 젠장... 더 서럽네.

볼 소식은 다 찾아보고 이제 프그르로 향한다. 친구들 소식과 함께 닭을 뜯으면서 마신 술이 적당히 돌아 살짝 취기가 오른다.  먼저 유머게시판에 뭐 재밌는 글이 있나 한번 찾아보고~ 혼자서 좀 낄낄거린 다음 자유게시판을 본다.  자유게시판은 읽어서 후회할 만한 글은 거의 없는데다 언제나 활발하다.   오늘도 활발한 프그르 자게는 키보드로 서로 무쌍난무를 펼치고 있다.  프그르에 올라와서 불이 붙는 주제들은 언제나 재밌는 주제들이다.  불 붙은 모습을 보니 나도 신이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고 술기운에 횡설수설 댓글을 남기기도 한다. 아 왠지 신이 난단 말이야...  뭔가 시청자가 가득찬 토론장에서 토론을 관람하는 기분이다. 외롭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언제든지 내 의견에 반응 해 주는 사람도 있고 질문에 답을 주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가끔 무쌍난무가 펼쳐지는 곳에 발 올렸다가 털리는 것은 옵션이다.   남들은 영화보기, 책 읽기, 티비보기가 취미라면 내 취미는 그냥 프그르인가?

오늘은 결혼에 관련된 이야기가 올라왔다. 마음 맞고 서로 이야기 통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즐겁게 살면서 아빠라고 부르면서 베실베실 웃는 아들 딸 있으면 그거 안 외롭고 좋은 것 아닌가?  난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안 하고 싶다니 흑흑...  어쨌든 나는 빨리 자리잡고 꼭 무조건 외국인이라도 결혼 해야지 라고 또 다짐한다. 

 

인생 그거 모른다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나도 예쁜 부인이랑 토끼같은 자식들 생길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잘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또 다저스  중계 불판에 한 댓글이 생각난다.  '야구 모르지만 이 야구는 끝났습니다.'  이 댓글을 처음 너무 웃겨서 보고 깔깔깔깔 웃었는데...
이게 인생 모르지만 니 인생은 끝났습니다. 라고 떠오르는 이유는 그냥 술을 마셔서 기분 탓 이겠지... 암 그럴거야.

살아보니 나만 외로운게 아니고 누구나 다들 그렇게 외롭다고 느끼고 사는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외롭지만 자기가 버텨야 할 부분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잘 극복 해 나가면서, 남들에게는 티 안내면서, 자기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외로움 따위는 모르는 듯이 언제나 당당하고 강한 척 허세도 부리면서 그렇게 다들 사는 거겠지.  

 

 



오늘도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신 혹시 외로울 지도 모르는 프그르 회원분들 내일을 위해 다들 화이팅~! 

다들 알콜 드세요 두 번 드세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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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희쨔응
13/10/20 18:28
수정 아이콘
공감되는 좋은 글이네요
하카세
13/10/20 18:37
수정 아이콘
화이팅합시다
13/10/20 18:51
수정 아이콘
어제 알콜 너무 마셔서 이리저리 사고만 쳤네요-_ㅠ
요즘은 되는 일도 없고 재미도 없고 자꾸 알콜 워너비가 되어가서 우울합니당~
그래도 다들 화이팅!
레지엔
13/10/20 19:15
수정 아이콘
그러나 CH3OH를 먹으면 죽는다는거(..) C2H5OH를 먹어야 됩니다?
눈시BBv3
13/10/20 20:50
수정 아이콘
크크 프로리그인가 했습니다
파이팅이에요 >_<
2막3장
13/10/20 21:41
수정 아이콘
저랑 비슷하시네요
객은 없지만 꽤나 혼지살기에 잘갖춰진원룸 크크
정서가 비슷합니다요
싸이유니
13/10/21 14:42
수정 아이콘
제 일기인가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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