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고려대 출교생들과 관련된 글이 있길래, 생각나서 퍼왔습니다. 지금은 졸업한, 아는 선배의 글입니다.
약간 요즘 흐름과 맞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2005년 말이 배경이라 그렇습니다.
이 글 안의 있는 '어머니'를 읽은 학생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를 다양하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상처와 결부된 부조리로 읽을 수도 있으며, 대학 학생회에 대한 단상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교생 실습에서 느낀 바가 확장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남의 문제와 내 문제가 무 자르는 나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송승훈 선배님의 블로그에는 여러가지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그 중 '시와 자기 삶 쓰기'는 (다양한 과정은 생략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여러 시를 읽고 자기 삶과 연관지을 수 있는 시를 한 편 뽑아서 그 시와 이을 수 있는 자기 시를 쓰는 것이다. 고3 학생들과 함께 한 활동이라 그런지 의외일 정도로 수준이 높고, 구구절절한 학생들의 사연이 꽤 감동적으로 옮겨져 있다.
한 학생이 박노해의 <어머니>를 골랐다. 꽤 길고 직설적인 이 시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은 투쟁에 대한 강한 의지이다. 그것도 전투적인 어조로 적혀 있다. 송승훈 선배는 최대한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편이지만(내가 듣기로는 그렇다)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한 친구가 이런 진보적인 시를 골랐나보다 싶었다.
이어지는 학생의 사연은 내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고생을 많이 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죄송함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었다.
"요점을 빗나간 감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글을 천천히 읽으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친구는 '굴종과 이기주의'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 '승리의 깃발' '적의 혓바닥' 와 같은 시어의 의미는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 학생의 글 안에 노동자를 배려하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는 성실하고 선량한 삶도 의미가 퇴색된다는 내용이 이미 깔려 있다. 그런 현실에 분노하지는 않지만 애매하게나마 부조리를 느끼고 있다. 이 친구의 감상은 어떤 면에서는 참 적절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에서 1달 정도 체류한 경험이 있다. 미국에 외가 친척들이 죄다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보러 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화들짝 놀라거나, 그럴 리 없다며 애써 부정하고 다음에 또 이야기를 하면 또 화들짝 놀라거나 하지만 - 내가 그토록 토속적인 캐릭터인가? - 분명 사실이다. 미국에 가는 건 쉽지 않았다. 서울에 여러 차례 올라와서 대사관인지 어딘지에서 면접을 봐가며 비자를 받아야 했다. 잘은 모르지만 자영업자는 적이 확실하지 않아서 비자 받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아무튼 아주 성가신 절차를 거쳐 우리는 미국에 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미국에 계신 외할머니께서 중태라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서 막내이모와 함께 살던 외할머니께서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 꽤 오래 계셨던 적이 있다. 원래는 더 오래 계실 예정이었지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시는 바람에 크게 다치셨고 그 바람에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그것이 서서히 악화되어 결국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유독 더 아팠을 거라고 생각한다. 딸내미 본다고 왔는데 병을 얻어 갔으니.
아무튼 어머니는 부랴부랴 출국 준비를 했다.
그런데 비자가 나지 않았다. 역시 잘은 모르지만 자영업자는 처음 받는 비자보다 두 번째 받는 비자가 더 힘들다고 한다. 비자가 나지 않는 이유는 '사유가 불분명하다' 는 것이었다. 친딸이 어머니의 마지막을 보러 간다는데 사유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난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울었는지 혹은 얼마나 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화낼 만한 일이다. 항공 여객에는 어원은 모르지만 비즈니스 클래스라는, 직역하면 사업 수준이라고나 할까 이딴 용어가 버젓이 있고, 농사짓는 사람이 촌수로 1촌인 직계 가족이 죽었는데 그 비즈니스 클래스에는 앉을 수 없다면 정말로 비즈니스 클래스에는 비즈니스맨만 앉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생기니, 국제 항공이란 비즈니스맨의 성공시대를 위해 생겨난 것도 같고 그렇다면 국제항공은 컨디션과 쌍벽을 이루는 비즈니스맨의 친한 친구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비즈니스맨을 잘 다루는 CEO를 위한 겅호!는 한 차원 높은 레벨에 존재하나보지. (퍼온 이:겅호는 중국어 공화(工和)에서 유래한 말이다. 무한한 열정과 에너지, 그리고 임무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화이팅!`이라는 외침처럼 투지와 열정을 불어넣는 일종의 구호나 인사로 사용되고 있다. )
당시에는 멍청하게도 당황했고 시간이 지나며 어머니가 얼마나 슬펐을지 조금씩 헤아려 보다가, 요새는 그 때 생각을 하면 어이가 없는 가운데 슬쩍슬쩍 화도 난다.
그저께에도 당시를 생각하며 어이없어 하다가, 문득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과 세상을 바꾸자는 여러 이야기들이 전혀 뜬구름잡는 소리나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살아가며 체험할 아픈 기억들은 거의가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거나, 조금만 억지를 부리면 사회의 부조리와 연관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 모두는 이 삐딱한 사회 안에서 체제의 문제 때문에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서로 자신의 몫을 조금씩 떼어가며 삐딱한 체제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개인으로서도 우리의 행복은 항상 방해를 받는다.
강기갑 의원의 단식이나 스크린쿼터를 박살내려는 부시의 도발이나 사범대 선거나 교원 평가제나 황우석 교수의 잘못된 연구방식이나
아무튼 도무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모두 내 일이다. 이건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덧) 그런데 이게 기본 원칙이면 왜 총학생회 선거는 4일이나 진행되었건만 투표율 50%를 못 넘기고 있는 것일까?
덧) 박노해의 <어머니>
남도의 허기진 오뉴월 뙤약볕 아래
호미를 쥐고 밭고랑을 기던 당신 품에서
말라붙은 젖을 빨며 / 당신 몸으로 갈 고기 한 점 쌀밥 한 술
연하고 기름진 것을 받아먹으며
거미처럼 제 어미 몸을 파먹으며 자랐습니다
풀나물죽 쑤어 먹고 어지럼 속에 커도
못 배워 한 많은 노동자로 몸부림쳐도 도둑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 안하고 놀고 먹지도 /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나로 하여 이 세상에서 단 하나 / 슬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오직 하나 소원이라면
가진 것 적어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일했고 떳떳하게 요구했고
양심대로 우리들의 새날을 위해 싸웠습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우리에겐 풍파가 몰아쳤고
당신은 더 불안하고 체념 속에 주저않자
다시 나를 붙들고 애원하며 원망합니다
어머니 / 환갑이 넘어서도 파출부살이를 하는
당신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가난했기에 못 배웠기에
수모와 천대와 노동에 시퍼런 한 맺혔기에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은 / 마땅한 우리 모두 비원입니다
오! 어머니 /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염원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을
잔혹하게 짓밟고 선 저들은 / 간교하게도 당신의 비원 속에
굴종과 이기주의와 안일의 독사로 도사리며
간악한 적의 가장 집요하고 공고한 혓바닥으로
우리의 가장 약한 인륜을 파고들어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어머님의 간절한 소원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비원을 위하여
짓눌리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불효자가 되어 /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어머님의 피눈물과 원한을 품고서
기필코 사랑과 효성으로 돌려드리고야 말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를 쟁취하고자 /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펄럭이며 빛나는 얼굴로 돌아와
큰절 올리는 그날까지 / 어머님, 우리는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당신 속에 도사린 적의 혓바닥을
냉혹하게 적대적으로 끊어 버리는 /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옵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 되어 / 피눈물을 뿌리며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어머니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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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thers님// 뭐랄까요.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쓴 것 뿐인데, 다른 사람이 그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틀에 규정시켜서 본다면 상대방의 기분은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극히 사소한 예를 들자면, 나는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남이 '너 XXX라는 사람 의견에 푹 파졌구나'라는 식으로 대답하면 누구나 당혹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펌글의 내용가 제가 펌글을 올린 의도는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 혹은 남의 문제와 내 문제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지, '어느어느 단체 가입하세요'가 아니었습니다.
댓글들이 왜 이런가요. 운동권이던, 박노해이던, 김지하이던 이런말들이 왜 나올까요.
춘향전이 오랜세월동안 고전으로 인정받을수있는건 시대적배경을 달리하더라도 시간과 개인을 관통하는 정서와 공감대가 있어서가 아닐런지요. 그게 운동권이던 아니던, 이 시를 통해 그학생은 자신의 삶의 일부를 반추해내고, 작품을 통해 개인내면을 바깥 세계와 소통하고 있음 느꼈기 때문은 아닐런자요. 작가를 통해 운동권이다의 선입견을 갖고 말씀하신다는것은 정말로 의아합니다.
그래서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자기것이 아니라는 거겠지요.
박노해의 시나 김지하의 시가 좀 별로이면 어느부분에서 어떤 내용이 구체적으로 좀 별로라고 말씀하시는게 낫지 않나요. 어느누구나 치열하지 않는삶 없고, 소중하지 않았던 적 없을텐데 한 생애를 "좀 별로"라는 딱 1줄짜리 문장으로 표현하시는것은 오만이라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