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처선에게 술을 권하매, 처선이 취해서 규간하는 말을 하니, 왕이 노하여 친히 칼을 들고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서 쏘아 죽였다" (연산 11년 4월 1일)
왕을 무려 일곱명이나 모신 김처선의 간언, 연산이 이 때 보인 분노는 상상 이상입니다. 일단 팔다리를 자르고 혀도 자르고 죽였다는 식의 얘기가 있고 팔다리 자른 건 위의 실록에서도 보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왕에게 충언을 하다 갔다고 하는군요.
오랫동안 왕들을 모셨던 그의 집안은 이걸로 풍비박산납니다. 일단 당일 그와 양자 이공신을 죽였고 그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었으며 본관도 없애버립니다. 처벌은 그의 칠촌까지 해당됐죠. 다음날에는 부모의 무덤까지 박살냈으며 2개월 후에는 이름이 같은 자를 모두 바꾸게 합니다. 그 한달 후에는 '처'자를 아예 쓰지 못 하게 했죠. 참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뭐 그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진 못하나 봅니다. 세종 땐 귀양도 간 이였으니까요. 허구헌날 두드려 맞고 죽고 귀양가던 연산대의 내시들을 생각하면 제법 오래 버티긴 했습니다. 둘 중 하나겠죠. 연산의 충실한 딸랑이였던가 하도 오래 자리를 잡았으니 능상(이라 하고 충언이라 읽으면 되겠죠)을 아무리 해도 쉽게 손 대기 힘든 상대였겠죠. 그럼에도 술의 기운을 빌려 연산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을 했나 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어떤 쪽이든간에 이 때의 연산은 도저히 봐주기 힘든 상태였다는 게 되겠죠. 자기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요.
+) 정작 중종은 이 김처선을 싫어합니다. 어쩄든 왕의 최측근이면서 왕에게 반항했으니까요.
연산의 두려움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언문(한글)로 적힌 익명서입니다. 바로 그 갑자년 7월 19일이었죠. 임금이 신하를 마구 죽이는 세태를 탓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연산은 이걸로 언문을 금지하게 했고 이 때문에 이 시기가 한글의 암흑기로 치부되긴 하죠. =_=; 연산이 2년 후에 쫓겨나는 것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언문은 이미 조선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뒤였으니까요. 당장 운평, 흥청 등이 노래를 배우는데 필요한 것도 언문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죠.
"왕이 일찍이 금표 안을 미행(微行)할 때 풀숲에 사람이 숨었다가 자신을 해칠까 늘 두려워하였는데, 하루는 저녁 때 말을 몰아 환궁하다가, 밭두둑에서 황새가 무엇을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사람인가 의심하여 채찍을 쳐 급급히 지나와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바로 황새였다. 이로부터 황새를 매우 싫어하여 위와 같은 하교를 내린 것이다." (연산 12년 5월 23일)
열받아서 그냥 해본말 수준인건지 구체적인 부분은 보이지 않지만요. 이미 연산은 신하들이 무기를 숨길까봐 손을 소매 속에 넣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며 절대권력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권력은 모래성일 뿐이었습니다. 임사홍을 제외한다면 그의 편을 든 건 그의 장인 신수근의 세력 정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손을 잡을만한 정치세력이 없었습니다. 모두 쓸어버렸으니까요. 그가 한 정치에 동조한 세력 역시 없었습니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멀리 왔고, 그의 정책은 어떤 세력이든 지지해 줄 수준을 넘어버렸으니까요.
+) 반정을 주도한 게 그 밑에서 잘 누렸던 이들이었지만... 자세한 건 다다음편에 ( --)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독했던 때... 얼마 되지도 않은 동안 그는 그걸 아주 실컷 즐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즐겨도 부족했을 겁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요.
갑자사화 이후 그의 시에서는 태평성대가 많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건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게 아니라 누가 예쁘다는 식의 참 낭만적인 거지만요. 그런 가운데 허무함이 느껴지는 시가 많이 느껴집니다. 때로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능상을 문제삼는 시들도 보이지만요. 권력이 더 강대해질수록 그런 두려움은 더 커져갔을 겁니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겠죠.
명예를 구하느라 수고하지 말고 / 모름지기 자주 술에 취하라
한 번 이 세상 떠나가면 / 황천객 면하기 어렵나니
연산 12년 5월 24일
동산에 옮겨 심은 복숭아나무 만나지 못한 한 얼마더냐, / 남몰래 고운 얼굴 아끼며 부질없이 정 보내네.
이 몸 죽어 예쁜 나비 되고자 하나 / 구중 궁궐 앉을 가지 없을까 의아하네
연산 12년 8월 4일
이런 시들과 반정 직전 시를 짓고 장녹수 등과 울었던 일까지... 그는 자신의 끝을 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뭐 반대로 이런 비극적인 생각에 취한 걸수도 있구요. 어디 시를 한두편 썼어야죠. -_-; 언제는 웃고 언제는 울고 언제는 신하들 욕하고... 현실적으로 큰 문제는 없음에도 죽음을 생각하고 그런 생각에 취하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거니까요.
뭐 그래도 그가 반정을 두려워하고 허무를 느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죠. 자신의 목표였던 절대권력을 얻은 후 다른 목표 없이 놀기만 하던 상황이니까요. 실체 없는 공포라 하기엔 그가 해 온 짓이 있었구요.
신하들을 달래기 위한 꼼수는 있었습니다. 갑자사화 직후부터 말이죠. 팬 놈만 패는 식이었죠. 어떤 일이 있을 경우 맨 앞에 선 이만 잡고 나머지는 벌 주지 않거나 가볍게 주는 식이었습니다. 이런데 앞장서는 사람들이야 다 뻔하죠. 이미 죽었거나 벌 받은 이들이요. 사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건지 연산군의 의중을 알던 이들이 앞장서서 가이드라인을 만든건진 모르겠습니다만. 기준이야 연산 마음에 들고 안 들고였겠죠. 안 든 이들은 주창자로 죽은 후까지도 계속 벌을 받았고, 그만큼 살아남은 이들은 벌을 면하고 적응해 갔죠. 피바람이야 계속 불었지만 그 범위는 갈수록 좁아져 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산들 산 목숨이 아니었죠. 왕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거기다 나라꼴이 이 모양이니 언제 어디서 반정이 일어날지 몰랐구요. 그렇게 되면 자기들 역시 연산이랑 같이 죽게 되겠죠. 역적으로요. 반대로 그걸 자신들이 한다면?
갑자사화 이후 2년... 그들은 침몰하는 배를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어차피 침몰할 거라면, 자기들이 앞장서서 새 배를 만드는 게 나았구요.
연산군은 가족들에게도 참 못할 짓을 한 셈이죠. 아버지 때문에 죽은 네 아들들...가장 나이가 많았던 세자가 겨우 10살이었고 가장 어린 아들이 5살 정도였는데 모두 귀양가던 중에 죽었죠. 나중에 후환이 된다고.
그리고 평생 그 한을 묻어둬야 했던 폐비 신씨, 그리고 고모부겸 시 아주버니를 잘못 둔 덕에 왕비 된지 일주일만에 폐비된 단경왕후 신씨
1. 세자 시절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고
2. 다른 마땅한 왕자가 없었죠. 후에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도 연산군과는 나이차가 너무 나고 그렇다고 적자를 놔두고 서자를 세자로 삼을 수 없었죠.
3. 그리고 세자교체라는 게 왕이 그런 의도를 내비치지 않는 한은 먼저 신하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까딱하면 역모로... 양녕대군도 태종이 먼저 폐세자의 뜻을 신하에게 밝혔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