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설명 ▲ 환호유적
청동기시대부터 마을 주변에는 이런 환호가 빙둘러 파져있는데, 이곳에선 종종 투석의 흔적인 돌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래 성식님의 석전관련 얘기가 있어서, 우리나라 석전의 유래에 대한 제 견해를 써보려 했더니, 글이 너무 길어서 따로 씁니다. 성식님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원하신다면 삭제하겠습니다.**
청동기시대를 열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신석기시대보다 달라진 생산도구를 쓰기 않았습니다. 여전히 돌도끼가 유일하고도 중요한 도구였지요. 도구의 변화 없이도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힘의 비밀은 '협동노동'입니다. 우리 단군신화에도 표현되었듯이 '풍백, 운사, 우사'와 같이 농사에 필요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와 협동노동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대규모 경작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엔 없었으나 청동기시대에 최초로 탄생한 것이 밭입니다.
밭의 등장으로 잉여농작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잉여농작물은 그만큼 약탈의 대상이 되기 쉬웠습니다. 당연히 잉여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위치는 전망이 좋고 방어가 쉬운 구릉지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환호라고 하는 깊은 도랑을 주변에 파거나 목책을 두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송국리에서처럼 마을 입구에 높은 전망대를 세우기도 합니다.
청동기시대라고 해서 말이 청동기시대이지 무기는 여전히 돌이었습니다. 기마병도 없었고, 잔인한 금속무기도 없었지요. 하지만 돌칼, 돌창, 돌화살은 마음만 먹는다면 서로 깊은 상처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청동기사회 협동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은 서로에게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나라간 전쟁도 농사철을 피했고, 항상 일정한 숫자의 농사꾼들을 남겨놓고 징발했습니다. 돌로 농사짓던 시절이다 보니 협동노동을 망치는 일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있었지요. 환호로도 목책으로도 막을 수없는 전쟁이 바로 물전쟁입니다.
마을이 번성하고, 밭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물은 더 이상 저절로 흘러넘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줄기 물이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까지 경작지가 생기지 않으면 안될만큼 마을이 커지게 되자 그 물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훗날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 전쟁은 굉장히 오래되었는데요, 그때마다 피흘리며 싸울수는 없는 법, 이때 현명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바로 정월대보름날 두 마을이 모여서 물전쟁을 치르기로 말이죠. 바로 그것이 투석전 혹은 석전입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투석전을 위해 미리 건장하고 날랜 젊은이들을 뽑아 준비를 시킨다고 하는데요, 머리가 깨지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이 싸움이 마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었으니 그럴법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승자가 결정된다면, 심각한 전쟁으로 치닫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며칠이고 계속된 돌팔매질 끝에 승부가 나면, 이긴 마을은 물길을 가져갔습니다. 그렇지 못한 마을은 이긴 마을이 물을 쓸 만큼 쓴 뒤에 물길을 자기 마을로 터서 조금이라도 농사를 지으며 버티고 그 다음해를 기다릴 것입니다. 다시 다음해 정월대보름이 되면 마을간에는 돌팔매질을 시작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마을간 돌팔매질도 이때가 지나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강을 끼고 사는 마을간 규칙은 두 마을간 치명적 전쟁을 미리 예방했습니다. 어찌보면 야만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더 현명한 마을에선 고싸움을 하거나 줄다리기를 했을 것이고요. 정월대보름 풍습에 마을간 대결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일부 지방에선 투석전이 단오 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단오는 논밭에 물을 대야 할 때입니다.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사회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금지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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