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7/29 14:34:40
Name 눈시BBver.2
Subject 희망과 절망 - 3. 한강 방어선 붕괴
용인 쪽으로 가다가 인민군을 만났다. 그들 중 몇은 말을 타고 있었다. 복부에 총상을 입고 신음하는 국군 상사를 만났다. 도와주고 싶었으나 한사코 거절하면서 최후까지 적을 죽이겠다고 적지를 향해 기어갔다. 10분이 지났을까...... 수류탄 폭발음을 들었다. 끝까지 적을 죽이겠다던 국군의 자폭의 순간이 눈에 선하다.

아! 인간이 죽을 자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엄숙한 것이로구나!

얼마쯤 걸었을까 기진맥진...... 쌀자루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우리 일행은 미리내까지 왔다. 김대건 신부님의 묘역이다. 우리가 미리내에 도착한 것은 천주님의 가호가 있어서다. 안드레아 신부님 묘역에서 형언키 어려운 감격과 깊은 감회에 젖었다. 의미 모를 눈물도 주르르 흘렸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부모님 안부가 앞선다.

이대로 쫓겨 간다면 결국 어디까지 갈 것일까...... 만약 국외로 쫓겨난다면 언젠가는 다시 와서 빨갱이 세상에 포교의 씨앗이 되리라. 덕만이와 내가 안드레아 신부님 묘역까지 온 것은 그러한 계시를 주시려는 천주님의 인도가 아니었던가. 분명 천주님의 인도다.

- 7월 2일 이우근의 일기

-----------------------------------------


김홍일은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전날 뺏긴 김포비행장 탈환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김포사가 보유한 병력은 22연대 3대대, 12연대 2대대 등이었죠. 하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단지 비행장 탈환이 아니었습니다. 그 방면으로 도하해서 후퇴하고 있는 병력, 특히 1사단 병력의 도하를 엄호하기 위한 것이었죠.

새로 김포사 사령관이 된 우병옥 중령은 새벽에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때 우발 상황이 벌어졌죠. 수경사 예하 18연대가 한강을 도하한 후 이 곳을 뚫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B-29 3기가 출현해 비행장을 폭격하면서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18연대와의 연계는 실패했죠. 김포사의 공격이 시작된 건 10:30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유했던 장갑중대의 엄호까지 받으면서 시작한 공격, 하지만 비행장 근처의 지형이 좋을 리가 없었죠. 개활지에서 적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야 했고, 피해는 갈수록 커져 갔습니다. 참모장 최복수 중령까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 후퇴하게 됩니다.

이 보고를 받은 우병옥 중령은 권총으로 자결합니다. 지휘관은 살아야 되니 하는 얘기는 이제 그만하죠. 다만... 이들을 빨갱이라고 욕 하며 도망쳤던 계인주와, 목숨 바쳐 싸웠던 이들을 한 번 비교해 볼 일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홍일은 소사에 집결한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18연대의 2개 대대까지 증원되긴 했지만 그간의 전투로 김포사는 여전히 약화돼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이전에 신동수옹이 김포사 소속이라고 적었는데 아니네요. 18연대 소속이긴 한데 2, 3대대만 여기 소속되고 1대대는 영등포 방어로 빠졌습니다. -.-a 그대로 수도 사단으로 돌아간 듯 하네요.

비행장 탈환에 실패한 김포사는 소사-오류동 방어선을 짜고 적을 기다립니다. 이 곳은 경인도로와 경인선이 연결된 곳으로 한강 방어선의 좌측을 맡는 동시에 서울-인천간의 통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지역이었죠.

이 때 인천에서는 경찰까지 서울에 투입되려다가 시흥사가 만들어진 후 인천으로 돌아갔는데, 이미 보도연맹원도 포함된 좌익들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들어오기 전이라서 경찰들이 진압했죠. 한강 방어선 붕괴 후 다시 후퇴했습니다만 -_-; 이게 보도연맹 학살의 주요 동기 중 하나가 됩니다. 할 거면 북한군이 들어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30일 새벽,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고 이 때 주요고지인 138고지가 뺏겼으며, 김홍일은 사령관을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으로 교체하고 15연대 1, 2대대와 20연대 1대대를 투입하고 전투력을 상실한 기존의 4개 대대를 뒤로 뺍니다. 그렇게 7월 1일 시작된 반격, 다시 잃었던 지역을 탈환합니다. 이렇게 3일까지, 한강 방어선이 뚫릴 때까지 김포사는 북한군과 계속 혈전을 벌였고, 한강 방어선이 뚫린 후 명령에 따라 안양과 수원으로 후퇴, 해체됩니다.

개전부터 7월 3일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김포사는 결국 한강 방어선의 좌측방을 지킨다는 목적을 이뤄냈죠. 이전에 말씀드렸듯 이것은 북한군의 오른쪽 날개를 꺾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들이 뚫렸다면 한강 방어선은 측면에서 쭉 쓸려버렸을 테니까요.

처음 이들을 맡았던 자는 빨갱이라고 욕 하며 도망갔던 바로 그 부대가 말이죠.

-------------------------------------

말죽거리 방면에서는 적 일부가 국군을 뚫고 판교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적의 대군이 한강 건너편에 있었기에 혼성 2사단은 그 자리를 지킵니다. 이 때 2사단장이 사관학교 부교장이었던 이한림 대령으로 교체됩니다. 기존의 임선하 대령은 한미 연락장교단장이 됩니다.


이 때 금곡에서 과천으로 향하던 이한림은 미 공군의 기총사격을 맞아 부관 전승철 소위가 전사하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_-; 아무튼 이렇게 돌파해 온 적 때문에 신사-금곡-수원, 용인으로 가는 축선에선 두 군데에서 전투가 벌어지죠.

7월 1일, 말죽거리 부근에서는 5대로 이루어진 적의 보급차량을 붙잡습니다. 이미 아래로 향한 병력에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건빵 등 국군이 한강 북쪽에 버리고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날 말죽거리에서는 별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북한군은 국군 후방까지 뚫고 간 병력으로 말죽거리의 국군이 흔들리기를 바란 듯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혼성 2사단이 제 자리를 지킨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죠.

덕분에 후방에 배치된 병력은 죽을 맛이었죠 -_-; 혼성 3사단은 25연대와 광나루에서 철수시킨 생도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 앞에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나타납니다. 말이 연대고 대대지 국군의 병력은 아주 적은 상태였죠.

"세궁역진하여, 하는 수 없이 철수명령이 내려지자, 생도 김해선은 중상을 입고 있던 터이라「이 몸으로 살아남은들 다만 전우의 짐만 될 뿐이라」고 수류탄을 뽑아 자폭하고 말았는데, 이를 본 생도 강주봉이 비분강개한 나머지「어찌, 여기서 모두 사생을 결하려 하지 않고 또 물러난단 말이며, 여기를 떠난들 또 갈 곳이 어디란 말이냐!」하고, 그 역시 자기의 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데 김해선 생도는 교장인 이준식 준장의 처남이요, 강주봉 생도는 작전국장인 강문태 대령의 재종제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김희운, 손동조, 박권영 등 세 사람의 생도는「이 길로 관악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이면서 권토중래할 날을 기다릴 것이라.」라고, 관악산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 남상선 생도

하필 적이 몰려온 곳은 생도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병력도 적은 상태에서 생도들은 또 많은 피해를 입었죠. 결국 생도들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좌측에서 진을 짜고 있던 25연대는 그 즉시 역습을 개시, 북한군이 점령한 진지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고, 이들도 금곡으로 철수하게 되었죠.

이 축선이 계속 뚫리면 수원과 용인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김홍일은 마지막 예비대를 꺼내니 1사단이었죠. 그리고 이동하던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1사단 13연대는 가다가 미 공군에 또 오인사격을 당합니다 orz........ 연료탱크가 폭발해서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지휘 차량부터가 불에 타 버렸고, 부연대장과 정훈장교가 사망, 연대장 김익렬도 화상을 입습니다. orz.... 다행히 1대대장 김진위 소령이 임시로 연대를 지휘해 좀 나았지만요.

7월 2일, 영등포-노량진-동작 등 한강의 주 방어선은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뚫린 말죽거리 방면에서는 적의 공격이 더 거셌죠. 이한림 사단장은 적의 야습을 예측해 방어를 강화했고, 적은 역시 왔습니다. 이 저누에서 5연대장 최창언 중령이 부상을 당했지만 기어이 막아냈죠. 또한 이 날에도 30대나 되는 적의 보급품 수송대를 격파해 금곡까지 진출했던 적은 멈춰 서게 됩니다. 이들이 무난히 진격했다면 수원이 공격 받으면서 또 후방이 차단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또 한 번 나라가 망할 위기가 지나간 것이죠.

이우근이 봤던 북한군과 국군은 바로 이들이었을 겁니다. 용인으로 향했다고 했으니까요.

그렇게 7월 2일도 끝났고, 3일이 밝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은 경부선철교의 보수를 끝냅니다.

7월 3일 40:00, 4대의 전차가 경부선철교를 타고 내려옵니다. 국군은 그 시끄러운 소음을 알아차렸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전날의 소강상태로 국군이 방심한 면도 있을 것이고, 이런 국군의 허를 찌른 것도 있을 겁니다. 거기다 미군은 이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7월 3일 새벽, 6일간이나 지켰던 한강 방어선은 적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끝이 납니다.

------------------------------------------------------

전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국군의 중화기는 대부분 한강 이북에 버리고 왔고, 미군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흥사령관 김홍일의 증언이고, 그 다음은 최전방에서 싸웠던 수도 사단장 이종찬의 증언입니다.

"적의 탱크가 한강을 본격적으로 넘어온 것이 7월3일이니까, 한강 남안의 국군은 28일부터 6일동안이나 버틴 거지요. 미군이 바란 날짜의 배란 말이에요. 이만하면 한강 저지작전은 성공했다고 봐야지요" - 김홍일

"그리고 또 한가지는 당시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한강선을 고수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일단 물러나게 됨으로서 낙동강까지 밀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한강 이남의 우리 병력과 미군의 지원상태를 감안해 볼 때 지금 생각으로서는, 당시로서는 누가 병력을 지휘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한강선의 고수가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지 않나 여겨진다" - 이종찬

전 이 중 김홍일 장군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이 중 3일은 6사단의 덕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겠죠. 적 전차가 나서면서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고, 그게 7월 3일이나 돼야 가능했으니까요.

북한측 자료에 의하면 서울 점령에 있어 북한군 전차의 손실은 3대 뿐입니다. 이것도 격파가 아니라 피해 뿐이었죠. 분명 과장은 됐겠지만, 이 정도로 서울을 점령함에 있어 북한군 전차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기동전의 교리에 따르면 전차를 아껴도 너무 아꼈다는 얘기일 뿐이죠 -_-; 어떤 (전차든 보병이든) 피해를 입든 목표를 향해 진격해 적을 무력화 하는 것이 기동전이거든요.

이런 북한군 전차가 기동하지 못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시흥사의 최고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시흥사는 최고의 활약을 했습니다. 일부 보병이라면 모를까 전차가 도하할 환경을 만들지 못 할 정도의 상황을 7월 2일까지 만든 것이니까요.

분명 여기서도 축차 투입의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북한군은 바로 한강 남쪽에 들어왔겠죠. 이종찬은 혼성 편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기는 원래 수도 사단이었던 병력만 지휘했다고 하는데, 이건 그의 잘못이죠 -_-; 한강교를 폭파할 때 온몸으로 저지하려고 했던 그, 수경사 -> 수도 사단장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서울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나 봅니다. 시민들을 우선시한다는 덕장의 면모는 볼 수 있지만, 상황을 판단하는 명장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함이 보이는 거죠. 뭐 어차피 그가 활약하는 부분은 앞으로도 이런 부분이지만요. 혹은 여기서도 친구인 채병덕을 옹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구요.

시민들과는 무관한 문제지만, 이 때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폭파해 북한군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막기도 했습니다. 대신 지뢰를 깔았고 전차 2대를 잡았죠. 덕분에 장안문은 지금까지 무사하죠.

적의 전차가 진입하자마자 밀릴 정도로 국군이 약화된 상태였고 쉽게 밀렸지만, 이 시흥사의 철수는 한강 이북에서의 철수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는 지연전, 한강교 폭파 등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모든 병력이 질서 있게 철수했습니다. 가장 많이 뚫린 금곡 일대에서는 3사단에 이어 1사단이 증원되면서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했고, 방심하고 들어오던 북한군에 나름 타격을 줄 수 있었죠. 이와 함께 계속된 미 공군의 폭격 등으로 맨 왼쪽에 있던 김포사의 병력도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적과 아군이 계속 섞이다 보니 오폭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죠. -_-;

이렇게 김홍일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막장이 된 국군을 어느 정도 재정비하는데 성공합니다. 동쪽의 6, 8사단과 서쪽의 미군이 북한군을 맡는 사이에 국군의 주력은 계속 후퇴하면서 재정비를 계속 했고, 마침내 낙동강으로 가게 되었죠.

-------------------------------------------

만약 미군이 7월 1일에 제대로 도착했다면, 그래서 아직 제대로 밀리지 않은 한강 방어선에 증원됐다면 결과는 어찌 됐을까요? 일단 부정적입니다. 일단 수가 너무 적었고, 미군은 북한군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으며, 전차를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 했으니까요. 다만 수원비행장이 무사하다면 미 공군의 공격 역시 더 강해졌을 거긴 합니다만.

한 번 IF를 생각해 봅시다. 한강 방어선에서 버티는 기간이 늘수록 미군의 증원도 계속될 것이고, 잘만 됐으면 거기서 북한군의 진격이 멈췄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쟁은 서울을 탈환하는 쪽으로 진행됐겠죠.

이렇게 됐을 경우 보도연맹 학살은 일어나지 않거나 있어도 극단적으로 최소화 됐을 겁니다. 대부분의 학살은 북한군의 빠른 진격에 따라 적에 가담한다는 공포로 죽인 것이었으니까요. 그 외에 북한군이 저지른 학살도 없어졌겠죠. 반면 서울에 남은 100만이 넘는 시민들의 목숨은 하늘에 맡기게 되겠죠. 북한군이 쉽게 서울을 내 줄 리가 없고, 오히려 곳곳을 요새화 하며 시민들을 앞에 내세울 테니까요. 미군의 폭격이 이들을 피해 갈 것이라 기대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피아 어느 쪽이든 시가전에서 시민들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구요. 이 때문에 이종찬은 서울을 탈환하더라도 병력을 우회해 포위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래봐야 북한군과 같이 굶어죽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실제와 피해가 얼마나 차이났을지... 모르겠네요.

이대로 갔다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국군이라면 몰라도 UN군의 북진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완전히 붕괴한 것과 그 자체의 드라마틱함이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뭐 그러면 북진 무력 통일은 안 되더라도 흘리는 피는 좀 줄었을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되면 38선 회복 후 UN군이 빠지고 (작전권을 넘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남북이 계속 소규모 분쟁을 계속했을지도 모릅니다. 6.25 때 정말 양 쪽 다 망할 만큼 망했기에 어쨌든 전쟁은 안 된다는 게 남북은 물론 전세계 단위로 각인된 것이었으니까요. 아무리 반공을 내세워도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런 것 말이죠.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부터 전세계가 전쟁을 막으려 하는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쩄든 전쟁에 대한 거부감은 지금보다 덜 했겠죠.

전쟁이 계속되든 안 되든, 이런 환경은 독재자가 아주 좋아합니다. 일단 휴전 상태인데도, 통일은 평화적으로라고 하는 상황에서도 독재자가 살기 참 좋은 환경이었는데,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보다 덜 한 상황이라면 어땠겠어요. 그리고 이에 따른 피해 및 국가 발전을 위해 쓸 돈이 여기로 다 흘러갔겠죠. 뭐 그보다는 좀 작게 38선을 회복하면 어디까지 회복하는 건지, 위치가 참 애매한 옹진 반도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걸리죠.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38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실제 역사보다 안정적인 북한군과 어쨌든 참전할 중공군을 만나게 될 것이고 또...

이거 참... IF를 어떻게 잡아도 비관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역시 전쟁이란 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문제죠.

--------------------------------------------------------------------

안성을 거쳐 평택까지 왔다. 평택에서 김철규 신부님을 만나 경향신문사 지프로 청주까지 왔다. 덕만이는 두 동생 때문에 청주에 머무르고 나는 계속 김 신부님과 대구까지 왔다. - 7월 3일 이우근의 일기

당시 동성중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우근은 한강교가 폭파되기 전에 (다리는 못 건넜지만) 남쪽으로 피난합니다. 그는 천주교도로 북한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죠. 천주교에서는 북한군이 남침하자 피난을 결정해 비교적 피해가 덜 했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서울 함락 당일까지도 입장을 정하지 못 했고, 많은 피해를 입었죠. 끝까지 서울 사수를 외치던 이북 출신 교인들은 서울이 함락된 당일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남은 사람들은 설마 하며 예배를 보다가 큰 일을 당했죠. 이후 북진 과정에서 벌어진 복수극에는 이들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이게 지금의 극단적인 반공친미적인 교회들을 낳았죠. 뭐 그렇다고 이 복수극에 천주교도라고 딱히 빠졌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아무튼 북한군에 끌려가기 쉬운 젊은이들은 피난을 택했고, 이우근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보름 후에 학도의용병에 자원합니다. 그 때 그에게 남은 생은 한 달도 안 되었습니다.

--------------------------------------------------------------------

7월 1일 부산에서는 스미스 임무부대가 도착합니다. 미 24사단 소속인 이들은 비행기로 가장 먼저 부산에 도착했고, 본대는 배를 타고 오기로 했죠. 한 시가 급했던 그 때, 이들에게는 최대한 북상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맥아더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미군은 북한군이 자기들이 나서기만 해도 물러날 거라 여겼습니다. 국군 역시 미군만 나타나면 뭐든 다 해결될 거라 여겼고, 그렇지 않더라도 국군이 재정비되는 동안 미군이 전선을 맡아 줘야 했습니다. 그 외에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방법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최강 무적 킹왕짱 아싸 좋구나 미군이 마침내 투입됩니다.

... 그 결과는 참 웃기에는 너무 슬픈 것이었습니다만 -_-;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2/07/29 14:57
수정 아이콘
음....근데 진짜 개전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네요. 정말 긴 글이 될 듯한 예감이....읽는 입장에서는 좋지만요 :)
자이체프
12/07/29 15:24
수정 아이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ㅜ.ㅜ;;;; 독하기로 소문난 일본군과 독일군을 상대로 몇 년동안 싸우던 미군인데 불과 5년만에 이렇게 변할 줄 자신도 알고 있었을까요? 여하튼 전쟁은 어렵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서린언니
12/07/29 19:00
수정 아이콘
김영옥 대령님이 오실때까지 힘든 나날이 계속되겠군요
blue wave
12/07/30 11:24
수정 아이콘
선 리플 후 감상~~ 너무 반갑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038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해결책은... 무려 표창장 수여!? [34] 사람되고싶다6338 24/02/27 6338 0
101037 뉴욕타임스 1.16. 일자 기사 번역(미국의 교통사고 문제) [4] 오후2시3427 24/02/26 3427 5
101036 아이돌 덕질 시작부터 월드투어 관람까지 - 1편 [4] 하카세2142 24/02/26 2142 5
101035 대통령실 "4월 총선 이후 여가부 폐지를 예정대로 추진" [133] 주말12141 24/02/26 12141 0
101034 갤럭시 S22 울트라에서 S23 FE로 넘어왔습니다. [10] 뜨거운눈물4598 24/02/26 4598 5
101032 마지막 설산 등반이 될거 같은 2월 25일 계룡산 [20] 영혼의공원4389 24/02/26 4389 10
101031 해방후 적정 의사 수 논쟁 [10] 경계인5325 24/02/26 5325 0
101030 메가박스.조용히 팝콘 가격 인상 [26] SAS Tony Parker 6622 24/02/26 6622 2
101029 이재명 "의대 정원 증원 적정 규모는 400~500명 선" [84] 홍철13133 24/02/25 13133 0
101028 진상의사 이야기 [1편] [63] 김승남5426 24/02/25 5426 33
101027 필수의료'라서' 후려쳐지는것 [53] 삼성시스템에어컨8460 24/02/25 8460 0
101025 그래서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151] 11cm7880 24/02/25 7880 0
101024 소위 기득권 의사가 느끼는 소감 [102] Goodspeed10852 24/02/25 10852 0
101023 의료소송 폭증하고 있을까? [116] 맥스훼인8767 24/02/25 8767 42
101022 [팝송] 어셔 새 앨범 "COMING HOME" 김치찌개1468 24/02/25 1468 1
101021 아사히 “미-일 반도체 회사 합병시키려 윤 정부가 SK 압박” [53] 빼사스8972 24/02/25 8972 0
101020 의료유인수요는 진짜 존재하는가 (10년간 총의료비를 기준으로) [14] VictoryFood3653 24/02/24 3653 0
101019 의대 증원에 관한 생각입니다. [38] 푸끆이4899 24/02/24 4899 44
101018 팝 유얼 옹동! 비비지의 '매니악' 커버 댄스를 촬영했습니다. [12] 메존일각2413 24/02/24 2413 11
101017 우리는 왜 의사에게 공감하지 못하는가 [331] 멜로12949 24/02/24 12949 53
101016 <파묘> -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풀스포) [54] aDayInTheLife4444 24/02/24 4444 6
101015 단식 전문가가 본 이재명의 단식과 정치력 상승 [135] 대추나무8084 24/02/24 8084 0
101014 “이런 사정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딨냐” [136] lexicon9792 24/02/19 9792 5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