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4/11 01:25:00
Name 영혼
Subject [일반] 여느때와 다름없는 약제부에서 벌어진 꽁트.
#1
정신이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정신이 없었느냐고 설명을 하자면 이야기가 아주 약간 길어지는데, 짧게 간추려서 말하자면 세 명분의 일을 두 명이서 감당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해야겠다. 약제부 전체적으로 인원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러면서 나이트 당직 약사를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여버리는 획기적인 방안을 시도했다. 그래, 뭐 윗분들이 알아서 잘 판단하시고 행정 상의 절차를 밟으셨겠지. 너무 힘들어 그만둬야하나 고민을 하며 퇴근준비를 하다가 요즘 나이트도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는 약제부장님의 말씀을 들은 터였다. 직접 일하는 입장에서는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 이 현실.... 약사도 아닌 근로학생인 주제에 무엇이 정신 없느냐고 물으면 마땅히 할 말은 없지만, 수백만원이 넘는 월급 차이에도 하는 일은 내가 더 많다는 거라든가(물론, 이런 부분은 감안하고 입사를 한 것이라 크게 불만사항이 되진 않는다)... 참, 문제가 되는건 약사가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듬과 동시에 줄어든 한 명의 약사는 모조리 신규라는 점이다. 이제 근로학생 1년차를 빼곡히 채워나가며 1년치의 별에 별 경험을 한 입장에서 두달어치의 트레이닝을 받고 약제부를 책임지게 된 신규 선생들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못미덥다. 손이 느리고 아는 것이 적고,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손이 빠르고 아는 것이 많고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해서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내가 나설 수 밖에 없는 일이다. loss를 감안해 시럽을 조제하고 그 와중에 집계약을 챙긴다. 정신이 없다. 병동에선 데이때부터 기를 모아온 컴플레인이 요모조모하게 들어오고, 그 와중에도 마약은 향정은 쉴틈 없이 받으러 온다.


#2
뭐 딱히 언제만 정신이 없고, 언제는 한가하다할 수 있을만큼 병원을 빠삭하게 이해한건 아니지만, 새로운 학기가 되면 학생간호사들로 인해 병원의 분위기가 아주 조금 달라진단걸 느낀다. 작년을 가득 채워 실습 경험이 풍부한 학생들은 그 경험을 토대로 직장을 찾아 떠나 1년차 간호사가 되었을테고, 올해를 가득 채워야 할 학생간호사들은 병원을 가득 채우고 한시가 바쁘게 움직인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게, 아마 열시쯤이였던 것 같다. 응급입원실에 필요한 경구약을 받으러 학생간호사가 한명 내려왔었는데, 도통 그 경구약을 조제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앞서 말한 여러가지 일들 때문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겠다. 병원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보통 나이트 실습을 하는 학생 간호사는 없으니까, 이 학생은 열시가 땡하면 이브 실습을 끝내고서 퇴근을 할 것이고, 버스를 타고 페이스북에 "아 오늘 힘들었어" 같은 글을 써댈 계획이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이 초조해하는게 느껴졌지만 도리가 없었다. 켈룩거리는게 영 신경이 쓰인다. 평소라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내켜 최대한 빨리 컴플레인을 내치고서 응급입원실에 전화를 건다. 수십초가 지나도 받지 않는다. 체념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딸각대는 소리가 들린다. 수간호사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받으셨다. 얘기가 통하겠다 싶어 애살 있게 통화를 해본다.

아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병동약국이에요. XXX 환자분 경구약 albis PASA MTM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학생이 받으러 왔더라구요. 근데 저희 조제가 조금 복잡한 상황이라, 지금 바로는 약을 못 드릴 것 같아요. 그것 말구 날록손은 바로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습 나온 학생이 집에 가야되지 않을까해서요. 네 그렇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학생은 날록손만 손에 쥐어다줄게요. 네. 수고하세요.

끙끙 앓던 학생이 안에서 통화하던 내 목소리를 어찌 들었는지 표정이 밝아진다. 밝아진 표정으로 저 가면 되나요? 하는 눈빛을 보내온다.

네, 그것만 가지구 가면 되요. 수고 많았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학생이 올라간 시간이 아마 열시 반쯤이였는데, 아마 인계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봤자 버스도 지하철도 끊길 시간이였겠지. 오지랖을 부릴거면 조금 더 착실하게 부렸어야 하는건데, 미안할 일이 아닌데도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든다.


#3
음, 그러니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게 아마 열한시쯤이였던 것 같다. 일을 정리하고서 담배 한대를 태우러 나가려는 찰나였다. 계단을 오르는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분이 한 분 오셔서 창구에서 대기하신다. 환절기라 어린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는 일이 잦다. 보호자인가 싶었다. 오늘도 담배피긴 글렀구만.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퇴원약 받으러 오신거죠? 영수증 좀 확인....
선생님, 저 아까 그 응급입원실 학생이에요.
..네? 아? 아.. 아! 아 네.
덜 바쁘신가봐요.
네 뭐 그냥. 차려 입으니까 못알아보겠네요. 무슨 일이에요, 문제 있어요? 설마 아까 그?
아하하 아뇨 아니에요 그런 끔찍한 말씀을 헤헤 저 퇴근 했어요. 버스타러 나가려다 생각해보니 막차가 끊겼더라구요.
아 그렇구나.. 그래도 집에는 가야죠. 저 나가는 길인데 같이 나가요.

나가는 길에 직원약을 챙긴다. 진통제하구 감기약 하루치 정도면 되려나.
내일도, 내일의 내일도 실습을 나올 학생이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한다니, 이정도 배려는 해줘도 되지 않나 싶었다.

#4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병원 밖까지 나섰다. 낯설은 실습에 대해 궁금한게 그리도 많은지 요모조모한 것들을 묻는다. 최대한 아는대로 대답해준다.

근데 학생 나도 잘 몰라요 이제 일년차거든요 어헣어헣↗.
아 그러시구나 생긴건 일년차처럼 안생기셨는데 어헣어헣↗.
아니 학생도 마땅히 학생같진 않은데.. 어헣어헣↗.
네? 뭐라구요?
아.. 아니에요.

질문이 끝나고 농지거리도 끝나니 할 말이 없다. 빨리 들어가서 노닥거릴 시간동안 쌓여있는 처방전을 해결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직원약이 만져진다. 아참, 이거나 줘야겠다. 저기 학생...하고 운을 떼는 순간 저기 선생님...

네 학생 먼저 말해요.
저 선생님, 감사해서 그런데 커피라도 한잔....
네? 아....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근데 지금 일이 바빠서
아..그러시구나..
학생 그러지말고.. 음, 내일 데이에요?
네. 데이.
나 내일 비번이거든요. 데이 끝나구 나오는 길에 잠깐 차나 한잔 해요.
.....음.
그리구 이거 받아요. 직원약인데, 먹으면 금방 나을거에요. 일찍 자구요. 들어가요. 참, 학생. 번호 찍어줘요. 여기 폰
네..






p.s 니쿄님과 같은 꽁트를 원하셨다면 fail. 일하다 짬내서 쓴거라서 아주 난필 난문입니다. 죄송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2/04/11 01:40
수정 아이콘
이런 훈훈한 이야기에 제 제목을 가져다 쓰다니...........
12/04/11 01:52
수정 아이콘
무슨 외계어들의 향연이.... 결론은 받으신거죠?
一切唯心造
12/04/11 03:17
수정 아이콘
봄이 오는군요 [m]
12/04/11 09:08
수정 아이콘
봄 인공호흡한건가요.
숨을쉬네요 봄이 크크 [m]
김연아이유리
12/04/11 09:13
수정 아이콘
이건 후속편이 있어야 할것 같은데...
냉면처럼
12/04/11 10:14
수정 아이콘
요즘 다른 내용으로 위장한 자랑글이 많이 올라오네요
이러지 맙시다

ㅜㅜ
DragonAttack
12/04/11 16:17
수정 아이콘
이게 꽁트라니... 도대체 웃음 포인트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리고 궁금하니 후속편도 올려주시길~
불량품
12/04/11 16:46
수정 아이콘
꽁트라 해서 들어와서 읽었는데 가슴 한켠이 쓰리네요.. 약주세요..
Darwin4078
12/04/11 17:53
수정 아이콘
아니 의사양반, 꽁트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산적왕루피
12/04/11 18:36
수정 아이콘
으아니..!! 의사양반. 이게 무슨 봄바람 부는 소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0185 [일반] 미국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직업 6가지... [20] Neandertal7721 12/11/07 7721 0
39319 [일반] 캐드펠 수사와 슈가맨 [2] epic3738 12/09/24 3738 0
39272 [일반] 구한말 흔한 기부왕 [7] happyend5347 12/09/21 5347 8
39083 [일반] 양승조 의원이 발의한 의료법 80조 개정안(내용수정) [81] GoThree6316 12/09/11 6316 0
39044 [일반] 딸아이의 4번째 생일 [28] 영혼의공원4880 12/09/07 4880 1
38973 [일반] [잡담] 나의 일본드라마 BEST 15 (2) [40] 슬러거11929 12/09/02 11929 0
38269 [일반] 용서한다는 것... [14] 해소3948 12/07/22 3948 1
38202 [일반] 피부 관리..에 대한 고민 [98] Siver Tiger8509 12/07/17 8509 1
37799 [일반] 그때의 난 뛰는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지만 행복했었지. [17] 바람모리3934 12/06/20 3934 0
37636 [일반] 내 인생에서 최고는 너였어...... [28] 가슴이아프다6047 12/06/10 6047 1
37630 [일반] 응급실에 갔다왔습니다.(배탈, 식중독 조심하세요) [10] The xian6955 12/06/10 6955 0
36605 [일반] 여느때와 다름없는 약제부에서 벌어진 꽁트. [11] 영혼3990 12/04/11 3990 0
36525 [일반]  이 남자를 폭로한다. [111] Hook간다10706 12/04/08 10706 0
36339 [일반] 일본인 여자와의 연애.... [16] Eva01014818 12/03/31 14818 0
36242 [일반] 훅간다의 요즘 [8] Hook간다5920 12/03/27 5920 0
35891 [일반] 방을 뒤적이다가.. 그리고 병원에서... [15] Hook간다5929 12/03/12 5929 0
35679 [일반] 요로결석 체험후... 후기(?) [31] 복제자8968 12/03/02 8968 0
35637 [일반] 24년 인생살면서 느껴본 최악의 고통(부제: 요로결석ing,...) [45] 복제자11088 12/02/29 11088 0
35626 [일반] 처제가 날 변태라고 부르는 이유.. [69] Hook간다21164 12/02/29 21164 7
35456 [일반] 첫 발걸음 [4] TheGirl3478 12/02/20 3478 1
34594 [일반] 실화괴담 좋아하시나요? [23] 우리고장해남5638 12/01/10 5638 0
34014 [일반] [음악] 내맘대로 2011년 인디결산 1탄 [18] 코리아범3965 11/12/21 3965 2
33141 [일반] 49만원짜리 라식 라섹 강남역 xxx 안과와 간만에 강남가본 촌놈의 느낌. [24] 깜풍9430 11/11/16 943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