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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4/08 21:40:48
Name 글곰
Subject [일반] [티슈는 알고 있다] 큰 의미 없는 초단편 소설입니다.
음. 갑작스레 떠오른 삼류 수준도 못 되는 구상을 오십분만에 뚝딱뚝딱 쓴 초단편 소설입니다. 말 그대로 장편(掌篇)이네요.
평범한 남자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비일상적으로 써 보고 싶었습니다.
혹은, 그냥 약간 저질스럽게나마 웃어 보자고 쓴 이야기입니다. 넵. 전혀 고상하지 못한 소실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이, 내일이 일요일이라는 우울함을 잠시나마 잊으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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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늦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티슈곽은 내 책상 위에 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했지만,  그러고 나서야 오늘은 술 비슷한 것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는 문간에 서서 망설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경찰에 전화를 해야 하나? 119를 부를까? 하지만 뭐라고 이야기하지? 티슈가 울고 있다고? 차라리 정신병원에 전화를 해서 내 상태를 봐 달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서 있자 티슈곽이 울먹이며 말했다.

  “안 들어오고 뭐하는 거예요?. 당신 방이잖아요.”

  내가 뭘 해야 할지 가르쳐준 그녀에게 고마워하며, 나는 얌전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소 어색하게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내가 항상 놓아두던 책상 귀퉁이가 아니라 책상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티슈곽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움직인 걸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우선 티슈곽이 울고 있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터였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울음을 그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뭘 말이야?”
  “나,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조차 나오지 않아, 나는 벌린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선언하듯 가차 없이 말했다.

  “내 뱃속에 당신의 아이가 들었단 말이에요. 책임지지 않을 생각인가요?”
  “무슨 헛소리야!”

  그제야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화를 냈다.

  “그동안 나를 그렇게 취급하고도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부끄럽지 않나요? 내 인격 따위는 무시한 채 나를 당신 욕정의 배출구로만 대한 주제에!”

  내가 미친 게 거의 틀림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애당초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티슈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내가 티슈를 산 건, 두루마리 휴지보다 조금쯤 더 부드러운 휴지를 쓰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 그러니까 컴퓨터로 특정한 동영상을 보면서 거 뭐냐, 남자의 고상한 자기 위안이랄까, 아니면 본질적 욕구의 자기주도적 발현과 해소랄까, 암튼 그런 작업이 끝난 후의 후속 조치 말이다. 그리고 임신이란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물리적으로 만난 결과다. 그렇다면 설마?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는지 티슈곽이 끄덕였다.

  “맞아요. 이제 당신도 깨달은 모양이군요.”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하찮은 상식 따윈 이미 믹서기에 넣어져 흔적조차 없이 철저히 분쇄된 후였다. 내 정자 때문에 티슈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터무니없었기에 오히려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당신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당신,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와 두 달 후에 결혼하잖아요.”
  “......그런데?”
  “당신의 인생을 파괴하고 싶지는 않아요. 전후 사정이야 어쨌거나 당신은 내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거나 하는 삼류 영화 같은 장면은 기대하지 말아요.”

  그런 기대 따윈 없어.

  “아무튼 그래서, 나는 떠나겠어요.”

  그녀는 당당히 선언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끔뻑이고, 다시 세 번쯤 더 끔뻑였다.

  “떠난다고?”
  “당신이 모르는 곳으로. 다시는 당신이 나를 찾을 수 없을 곳으로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침묵했다. 그런 내게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은 채 그녀는 창가로 향했다. 책상에 면한 그 창문은 이미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열린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다, 문득 생각난 듯 내게 말했다.

  “결혼한 후에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의 그녀가 나처럼 관대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명심하지.”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뛰어내렸다. 나는 급하게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뿐인 골목은 빛보다 어둠이 많았다. 나는 그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두 달 후, 나는 결혼하면서 집을 옮겼다. 그 외에도 사소한 변화 몇 가지가 있었다. 이를테면 티슈를 쓰지 않게 되었다든지, 컴퓨터 속의 은밀한 동영상들을 모두 지웠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이야깃거리도 하나 있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지 일 년 남짓 지났을 무렵, 늦잠을 자던 주말 아침에 누군가가 초인종을 울렸다. 아내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나를 재촉했고 나는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나와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자 나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식당 광고지와 무료신문 따위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얌전히 놓은 물건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걸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주유소 따위에서 흔히 나눠주는 조그만 휴대용 티슈였다. 하지만 껍질에는 아무 광고 문구도 적혀 있지 않았다.

  “누가 왔어?”

  아내의 졸린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누가 장난쳤나 봐.”

  그리고 나는 다시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이미 티슈는 사라진 후였다. 나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쉬었다. 깊은 한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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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08 21:49
수정 아이콘
들켰군요.
Neandertal
12/04/08 22:05
수정 아이콘
물티슈는 괜찮을까요?...
12/04/08 22:21
수정 아이콘
지난 날 주인공의 욕정의 해소와 자기 위안을 위해 저지르게 되었던 잦고 잦은 미필적 고의의 실수가 결혼을 하기 직전에
수면에 떠올라 갈등을 고조시켰으나 마치 스스로 침몰한 타이타닉 호의 운명처럼 실수의 결과물 또한 자취를 감추는데,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이상 몇십년을 돌아와도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세상의 이치 덕분인지 결혼 후 생활 속에서
문득 그 때에 내가 저지른 일들은 아직도 여전히 나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생리를 가진 현실의 부조리함과 그러한 현실을 이겨낼 수 없는 스스로를 탓해보는 현대 사회의 흔한 남성상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12/04/08 22:23
수정 아이콘
크크 재밌게 잘 봤습니다
은하관제
12/04/08 22:26
수정 아이콘
크크크
김태호
12/04/08 22:3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티슈곽의 임신이라니요! 글쓴분의 팬이 될 거 같습니다 흐흐
메롱약오르징까꿍
12/04/08 23:00
수정 아이콘
그럼 전 휴지통을 임신시킨건가요...?
siam shade
12/04/08 23:52
수정 아이콘
아무 문구없는 티슈는 자식인가요??
진중권
12/04/08 23:54
수정 아이콘
주로 우리집 변기가 임신했다는 자책형 개그를 자주 구사하기는 하는데 말이죠.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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