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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1/28 22:18:0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광개토 - (4) 동북아의 패자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해 적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것도 좋은 전술이니까요.
...가끔 그러다가 나라 기둥뿌리가 뽑히는 대참사가 일어나긴 하지만 -_-;;
이전 글에서 pioren님이 쓰신 댓글입니다. 뭐 낙랑군 점령 이후에는 요동과 한강 쪽에서 전선 두 개를 이뤄 싸우는 게 고구려에겐 일상이었죠. 그 중 5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낸 건 확실히 무리였습니다. 기세가 좀 죽었다 해도 뒤에서 후연이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요동 점령이 400년 이후였다면...
남정 직전,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조공합니다. 하지만 후연은 무례하다는 이유로 고구려에 총공격을 가하죠. 애초에 조공한 것이 후연의 발을 묶으려는 용도로 보이고, 후연 역시 그걸 알아채고 공격해 왔을 겁니다.
신성, 남소성이 함락되고 700여리의 땅을 뺏기고 고구려 인구 5천호를 자기네로 옮긴 후에 후연군은 돌아갑니다. 고구려가 이 때 요동을 먹고 있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상황이 조금 달라지지만, 어쨌든 남소성까지 뺏긴 이상 수도 국내성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죠. 그런데 딱히 위기 의식은 안 느껴지네요. 뭐 이런 마음이었겠죠?
"올 테면 오라우! 먼저 오는 새x부터 개박살 내주갔어!"
아니면 고구려 병사들끼리 "개박살!"을 구호로 삼았던가요. 추억 돋네요.
1. 복수설치
... 효종이 내세운 북벌의 명분이었습니다만 왠지 어울리네요.
원래 후연이 치고 온 후에 다 빠진 건지, 오자마자 아우라에 밀린 건지 402년이 되면 잃어버렸던 남소성과 신성을 되찾습니다. 여기에 단 2년 후인 402년에는 전장이 요서지방의 숙군성으로 옮겨갑니다. 이 때 숙군성을 지키던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죠.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고구려의 파상공격은 계속돼서 요서의 연군까지 털리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이 연군이 대릉하를 넘어서 공격했다는 것 때문에 베이징 인근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일단 전 이 쪽입니다.
http://cafe.naver.com/booheong.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7637&
여기에 따른 이글루스 야스페르츠님의 간략한 지도.
http://xakyntos.egloos.com/2482068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후연 내에서는 막장 행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으며 안 그래도 위험한 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게 됩니다. 405년에 역공을 벌여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자기가 막타 치겠다고 (...) 아니 자기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서 고구려군에 시간을 벌어 주었고 결국 막아내죠. 이 때 왕후까지 데리고 가마를 타고 입성하겠다고 기다리랬답니다. -_-;
그 해 말에는 더 막장 행각이 벌어지는데 -_-;; 거란 치겠다고 갔다가 무서워서 머얼리 도망갔다가 목저성을 치는 일을 벌인 거죠. 대체 뭘 한 건지 -_-;
고구려는 이렇게 요서까지 틈틈히 공격해 가면서 요동의 지배권을 굳힙니다. 다만 그 과정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전 편에 썼듯 요동 지배 시점이 언제인지도 논란이고, 연이 공격했을 때 어디까지 먹혔을지, 되찾으면 또 어디까지 되찾았을지 알 수 없거든요.
역개루에 라이트온님은 광개토대왕비의 407년 부분을 요동 점령으로 해석하시더군요. 보통 이를 백제에 대한 공격으로 보는데, 동원된 병력이 남정 때와 동일한 5만 대군이었다는 것, 적에게서 뺏은 갑옷이 만여 벌이나 된다는 점 등을 들어서요. 역덕들 사이에서는 이게 정설인 듯. 어쨌든 금방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꿈에도 그리던 요동은 고구려의 품으로 들어 왔습니다.
2. 만주의 패자
요동 지배의 의미는 큽니다. 고조선-연-진한-전후연-고구려-당-발해(?)-요-금 뭐 기타 등등 이 땅을 점령한 국가들은 애초에 강대국이었거나 이 땅을 차지한 후 강해졌죠. 병자호란 때 청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도 선양을 점령한 후였죠.
지도만 봐도 요하를 중심으로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뭐 이 땅이 미개척지라는 말도 있던데 그건 넘기고 -_-; 이제 베이징 쪽으로 또 산맥을 넘지 않는 이상에야 이런 평야를 또 보기 힘들죠. 또한 이 지역은 풍부한 철 자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명 해 보신 분이라면 욕심 안 가지는 게 이상하죠?
+) 이런 한반도의 철 분포를 다룬 지도를 보았는데, 참 재밌더군요. 우선 함경도 쪽, 즉 옥저 지방과 낙랑군이 있던 평양에 철이 집중적으로 돼 있습니다. 고구려가 옥저 먹고 낙랑군 먹고 요동까지 먹으려 한 이유가 나타나는 거죠. 한편 경상도 쪽에는 역시 가야가 있던 남쪽으로 줄줄이 있죠. 신라가 가야 먹고 강해진 이유가 있는 겁니다. 반면 전라도 쪽에는 참 -_-; 없더군요. 충청도에서 경상북도 쪽에 좀 있던데, 이를 보면 백제가 굳이 남진 안 하고 낙랑군을 노리거나 충청도 쪽으로만 만족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백제의 경우 먹을 거야 어차피 남아 도는 상황일 테니까요. 인구수로 따지면 남쪽의 마한 소국들도 만만치 않았을 거구요.
곡창지대도 그렇지만 이런 고대에 중요한 철 자원의 분포에 따라 고대국가의 확장이 벌어지는 게 참 재밌고... 문명이 생각납니다. 뭐 이렇게 실제 그들의 확장을 이해할만한 단서라 볼 수 있겠네요.
요동 점령의 가장 큰 의의 중 하나는... 역시 때려도 때려도 죽지 않는 요하 방어선이 생겼다는 것일 겁니다. 이렇게 시리즈물 쓰게 된 첫 글에 잘 나타나 있죠.
https://pgr21.net/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divpage=5&sn=off&ss=on&sc=on&keyword=연개소문&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216
아우아우 추억이 ㅠㅠ
이런 점에서 보면, 그리고 광개토대왕 때부터 요서를 여러 차례 찌르면서도 정작 점령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이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걸로 보입니다. 이런 천혜의 방어선을 두고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뭐 우리 입장에서야 아쉽겠지만... 대신 광개토대왕이 선택한 건 늘어난 영토를 다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양에 여러 차례 신경을 쓴 것과 다음대의 장수왕은 아예 평양으로 천도 후 강력한 남진을 편 것을 보면 광개토대왕의 의지를 알 수 있을 듯 하네요.
+) 들은 얘긴데, 조선 초에는 화북 평야의 생산량과 한반도의 생산량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대충 따져도 화북 평야는 한반도의 1.5배, 거기에 조선시대에는 북쪽이 별로 개발되지 않은 걸 생각하면 한반도의 생산량은 참 어마어마하죠. -_-; 뭐 거긴 밭 농사고 한반도는 논농사였습니다만.
이렇게 밀릴대로 밀린 후연에서는 모용운과 풍발의 반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됩니다. 이 모용운은 후연의 뒤를 이어 북연을 세우죠. 기존의 연나라가 둘로 쪼개진 겁니다. 그리고 이 모용운이... 성을 고씨로 바꿉니다. =_= 그는 이전에 연에 끌려갔던 고구려계,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일을 벌인 건데 여기서 성을 갈아 버린 것이 참 의미심장하죠. 광개토대왕은 이를 축하하며 종족의 연을 베풉니다. 고구려에 상국 행세를 하던 후연에 있어서 굴욕이었지만, 이렇게 북연은 고구려에게 기대게 되죠. 이 때문에 북연을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상하관계가 뒤바꼈을 순 있겠지만 이 정도는 아닌 듯 합니다. 이후 북연이 멸망하는 과정을 고구려는 철저히 무시하거든요. (...) 북연의 마지막 왕 풍홍이 고구려에 망명하기는 하는데, 북위가 북연의 수도 용성을 점령하기 직전에 병력을 파병해 거기 인구를 모조리 고구려로 옮긴 뒤 성을 껍데기만 남기고 후퇴했다고 합니다. 북위로서는 머엉 할 뿐이었죠. 북위와 직접 맞서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요하 서쪽으로 굳이 갈 생각은 없었나 봐요.
이렇게 연나라와의 전쟁도 끝나고, 408년 아들 거련을 태자로 삼습니다. 이후에는 내정에 힘쓰다가 410년 생애 마지막 원정을 하죠.
3.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이번에 대상이 된 곳은 동북쪽 동부여, 고구려에게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혹은 이전부터 그랬는데 후연 때문에 봐주고 있었을지도) 직접 토벌하러 갑니다. 동부여의 5부가 모두 고구려에 투항했고,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만강 유역과 동북쪽까지 완전히 고구려의 땅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크고 아름다운 고구려 지도가 완성되죠. 남쪽이야 아직이구요.
오호십육국이 차츰 정리되며 북쪽의 북위와 남쪽의 유송-제로 중원이 양분되었고, 기존의 북방민족이 있던 자리에는 유연이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쌓은 고구려까지... 이렇게 4강 체제가 만들어집니다. 뭐 사실 광개토대왕이라도 북위를 이길 정도의 상황은 못 됐겠지만, 북위도 고구려를 만만히 볼 수 없었죠. 남북조 모두에서 고구려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이런 중국을 통일한 수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를 노렸죠.
이 무렵 고구려의 영토, 특히 북쪽과 동쪽의 영토는 애매합니다. 북부여의 후신이라는 두막루와 물길, 서쪽의 거란 등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이 고구려에 어느 정도 편입됐는지는 애매하거든요. 뭐 중국식으로 영토를 만들면 이들의 영토를 모조리 고구려로 만들어도 되겠지만요 (...) 거기에 장수왕 이후로 틀어지지만 남쪽의 백제와 신라 모두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였죠. 뭐 이런 식으로 따지면 고려와 조선의 영토도 한창 때는 만주로 꽤 올라가겠지만 반대로 몽골 때는 고려도 몽골의 영토가 되는지라 -_-a
이렇게 샌드위치로 살던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단 20년, 영토가 어떻느니 하더라도 이런 모습에는 하악댈 수밖에 없죠. 광개토, 영토를 크게 넓히다, 과장이 필요 없는 그의 업적입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전성기는 계속되죠. 나머지는 다음 편에.
광개토대왕비에는 한 가지 경향이 나타나는데, 후연과의 전쟁보다는 백제, 신라, 동부여와 싸운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마저 이전 편에 말했듯 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백성이었는데 배반 때린 것을 강조하죠. 그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왜, 백제는 고구려를 배반하고 왜에 붙어서 깨뜨린 것이고, 신라는 불쌍하게 왜에 당하고 있어서 도와 준 것이며, 동부여는 고구려의 지배에서 빠져나가려고 해서 토벌했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고구려-백제-신라간의 민족의식이 시작되었다고 말 하기도 합니다. 뭐 결과론적으로 확실히 복속된 대상을 이들로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동질성을 느끼긴 한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거야 워낙에 논란이 많으니 여기까지. :)
이런 강력한 모습을 보여 줬던 광개토대왕은 동부여 원정이 끝난 지 불과 3년 후, 413년에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하늘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광개토대왕비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용이죠. 그 아래 묘를 지키는 수묘인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정비하는데 이 부분은 넘기구요.
참 굵고 짧았던 삶, 그가 더 살았다면 어찌 됐을지 하는 if 얘기는 넘깁시다. 이 정도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업적이니까요. 이렇게 고구려는 전성기가 되었고, 20년만에 많은 영토를 획득했습니다. 이제 이것을 정비할 군주가 필요했죠. 모든 것은 그의 아들 고거련에게 이어집니다.
아들 고거련, 장수왕은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찬양하는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비를 세웁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업적과 당시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죠. 많은 논란에 휩싸인 상태이지만, 이 광개토대왕비는 지금도 만주에서 굳건히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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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예고했듯 외전, 요서경략설 얘기를 다루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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