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일본군이 후퇴한 후부터 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까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려고 합니다. 우선 그 사이의 강화 회담 및 그게 깨지는 상황, 그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 재침이 거의 유력해진 상황에서 조선의 대응이죠.
시작해 보죠.
1. 강화회담의 성립
자. 오랜만에 임진왜란편 마지막으로 돌아가 보면요.
행주 대첩 이후 일본군은 2월 29일 작전회의를 열고 3가지 계획을 히데요시에게 전합니다.
(1) 3월에 히데요시의 도해 계획 연기
(2) 군량은 4월 11일까지뿐이므로 타개책이 필요
(3) 전라, 경상 양도의 보급차원이 용이한 지역에 축성을 해 장기전 계획을 수립
3월 중순 히데요시로부터 철수 명령이 하달되고, 명이 강화사를 보내고 명군이 요동으로 철수하면 조선 왕자를 조선에 송환하고 4월 8일부로 한성에서 철수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죠. 이 과정에서 조선의 입장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명에서는 사용재와 서일관을 강화사로 위장시켜 보냈고, 18일에 일본군은 철수하죠. 조선의 두 왕자들을 앞세우고 (송환한다는 약속 안 지켰죠) 조선의 풍물패들을 대동한, 개선 행진 같은 철수였습니다.
4월 20일 한양을 수복한 권율은 이들을 추격하려 하지만 명에서 막습니다. 이후 류성룡 등이 화친하지 말고 싸워서 몰아내야 한다고 명 장수들에게 요청했지만, 이런 말만 들었죠.
「왜이(倭夷)는 순종을 하는데 조선은 도리어 배반한다. 」는 말도 있었으며, 심지어 우리들을 군문(軍門)에 잡아다가 조사하기까지 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차마 아뢸 수가 없습니다.”
(93년 4월 24일)
철수한 일본군은 12개의 본성과 6개의 지성을 축조해서 거기에 머뭅니다. 이와 함께 철저한 해안 요새화로 조선 수군은 이전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 하고, 오히려 빨리 적을 치지 않는다고 욕만 먹죠.
하지만 이 강화회담은 시작부터 꼬여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일본이 요구한 강화사는 송응창이 위장한 것이었고, 일본은 두 왕자들을 풀어주지 않았죠. 일본군은 철수했지만 여전히 상주, 선산, 인동, 대구 등에 분산 주둔했고, 송응창은 이를 내쫓기 위해 명군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피해 왜성으로 갔고, 명군은 상주, 선산, 거창 등을 점령하고 남원, 전주도 병력을 주둔시켰습니다. 이후에도 일본군 철수는 계속 지연되었죠.
강화사로 나고야로 건너 간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히데요시는 뱃놀이에 수백 척을 동원할 정도로 대우해 줬다고 합니다. 명이 자신을 인정해 줬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면서 "조선군이 약속을 어기고 퇴로를 막았다"느니 하면서 조선을 욕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왕자들이 풀려나고 진주성은 폐허가 돼 버리죠.
히데요시의 조건을 받은 강화사는 7월 15일에 부산에 도착해 8월 6일 한양으로 귀환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조건은 도저히 들어줄 것이 아니었죠.
(1) 명의 황녀를 일본 왕의 후궁으로 보낼 것
(2)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
(3)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4) 명, 일 양국의 무역 재계
등이었죠. -_-; 물론 명의 요구는 히데요시의 항복과 일본군 완전 철수였고, 책봉하더라도 무역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2. 고니시와 심유경
이 상황에서 곤란해진 것은 양 쪽 모두였죠. 특히 명은 8월에 1만 정도만 남기고 (조선도 일본이 철수할 거라 생각했는지 군량이 부족하니 오천만 남고 가 달라고 하자는 등의 건의도 보입니다) 철수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아서 곤란했습니다.
명은 파병을 강력히 지지했던 석성부터 현지 지휘관들까지 모두 강화를 원했습니다. 명 내부에서도 강화에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대세를 뒤엎지는 못 했죠. 송응창의 뒤를 이은 고양겸은 선조를 압박해서 94년 9월 "일본의 봉공을 허락해서 사직을 보존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하죠. 당시 조선에서도 이정암 등이 "계속 싸우면 백성들만 힘들어지니 화친해서 빨리 보내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봉공마저도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상황에서 히데요시의 요구를 명에 그대로 전한다는 건 자살행위였죠. 이제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의 사기극이 시작됩니다. 고니시의 경우 한두가지로 이것을 정의하기 힘듭니다. 전쟁이 힘들다는 것은 최일선 지휘관으로 확인했고, 히데요시가 까막눈이니 어떻게 속아 넘길 수 있을 것이며, 이게 일본을 위한 것이다... 이런 것일까요? 어쨌든 고니시의 의도는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던 것이었습니다. 에... 가토만 빼구요.
심유경의 의도는 쉽게 이해 갈 수 있습니다. 석성이 보내긴 했지만 그의 입지는 너무나도 약했습니다. 명에서 강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심유경을 믿어도 되냐였으니까요. 결국 자신이 맡은 강화를 어떻게든 성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석성 역시 강화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었죠.
가짜 항복 문서를 가진 사신이 명으로 향합니다. 이 때가 1594년 12월이죠. 어느새 강화가 시작된 93년에서 94년을 넘어 9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명은 95년 1월 이종성과 양방형을 책봉사로 파견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부산에 도착한 때는 95년 11월. 이를 알게 된 히데요시는 마침내 철군을 명하죠. 고니시, 가토를 비롯해 일본군의 주력은 철수하고 거점을 지키는 병력 2만 수준만 남게 됩니다. 전쟁이 드디어 끝날 것인가 하는 순간이었죠.
96년 1월, 고니시는 심유경과 함께 히데요시에게 갔고, 돌아와서 통신사를 요청합니다. 이것을 조선의 항복 사신으로 위장하려 한 것일까요? 한편 96년 4월, 책봉사의 정사인 이종성이 일본군 진영을 탈출해 버립니다. -_-; 계속 시간을 끄니까 무서웠던 거죠. 보시면 알겠지만 이 책봉사 일행은 정말 느긋~~~~~합니다. 결국 부사 양방경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위장했고, 6월에야 출발합니다. 이어 황신(!)이 8월에 뒤따라 출항하죠.
조선에 남은 명군도 일본군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에 설랬을 겁니다. 명군이야... 좀 아쉬울 수도 있지만 -_-; 일본군도 조선에 와서 고생은 많이 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이들은 물론 전쟁 당사자인 조선의 의도와도 전혀 다른 것이었죠.
3. 교섭, 결렬
히데요시는 9월 명 사신을 환대합니다. 조선의 황신은 인질(대신과 왕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냐며 거절하죠.
그렇게 시작된 "책봉식" 히데요시의 기쁨이 어땠을까요? 하지만 동상이몽이었으니... 조선의 왕들이 그랬듯 황제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무릎을 끓어야 했고 최고의 예를 갖추어야 했지만... 히데요시는 그것도 몰랐고 왜 그래야 됐는지도 (명이 항복한 줄 알았으니) 몰랐죠. 당당하게 앉아 있는 히데요시. 심유경은 무릎에 종기가 난 데다 예절을 몰라서 그런다고 무마시키죠. 이렇게 책봉례는 끝나죠.
이튿날, 히데요시는 축하연을 열면서 자신을 모시는 중에게 책봉서를 읽어보라고 시킵니다. 이 때 고니시는 중요한 부분은 빼고 읽으라고 합니다만... 무서웠던 것일까요? 그는 그대로 다 읽어버리고 맙니다. 히데요시는 당황했죠. 달라는 조선 4도는 어디 가고 꼴랑 자기를 왕으로 봉한다는 내용이었으니까요.
약간씩 말들이 다릅니다만, 자기를 속인 고니시를 죽이려 했다가 살려줬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아무래도 가장 큰 공이 있는 측근 고니시를 죽이기 어려웠다는 것도 있고, 고니시가 무서워하기는커녕 당당하게 "이건 조선에 출병한 모두의 의견이다"면서 이 사기극에 참가한 다이묘들의 명단을 보여줘서 차마 죽일 수 없었다는 것도 있고... 가지각색이더군요.
이렇게 어이 없이 지루하게 진행된 강화 회담은 이렇게 어이 없이 끝납니다.
재밌는 건 이에 대한 음모론이 있더군요. 히데요시가 고니시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다시 선봉으로 (2군이었지만) 기용한 것,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진주성을 치거나 경주 등을 노리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경상도 내에서 전선을 만들다시피 한 것을 통해 이것이 히데요시와 고니시가 서로 짜서 재침공을 준비하는 시간을 번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더군요. 그 기간 동안 왜성이 완공되고 수군을 크게 늘린 것 등을 통해서요. 거기다 가토는 그 사실을 알고 반대하면서도 히데요시에게는 알리지 않았죠. 그 긴 기간 동안 과연 히데요시를 속일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음모론의 핵심입니다.
뭐 사료적 근거는 없는 것 같으니 이런 얘기가 있다고 생각해 두시면 될 듯 합니다.
4. 조선의 사정
조선에서도 어떻게든 강화 회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전하려 했습니다. 94년 4월 초 승병의 총수 유정을 서생포의 가토 진영에 보내죠. 그는 7월 12일 다시 가토에게 갑니다. 하지만 두 번 다 가토가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 4도 할양 등을 요구했고, 유정은 거부하면서 두 번 다 결렬됩니다. 12월 21일에도 가서 얘기하지만 여전히 "왕자와 사신을 인질로 보내라"고 하면서 또 결렬...
짐작하셨겠지만 이 유정이 바로 유명한 사명 대사, 그리고 저 회담이 "조선에서 제일 귀한 보물은 니 모가지다"라고 했던 회담들입니다. 뭐 다 결렬되긴 하지만요 -_-;
11월 21일에서는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고니시와 강화 회담을 했는데 여기서 고니시는 "명에 대한 봉공을 허락 받는데 조선이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김응서는 "일단 무조건 철수해라"고 하면서, 이것도 결렬...
나름 자기 목소리를 내 보려고 한 조선이지만,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명이 "조선이 이렇게 나오면 명군은 모두 철수한다"고 협박하면서 모두 무산됩니다. 그 후에는 그냥 끌려갈 뿐이었죠.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선조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명 지휘관들을 최대한 대우해주고 조선의 입장을 전하는데 힘 쓴 건 당연한 거겠죠. 하지만 이 기간 정말 뚜렷하게 보이는 건 이거였죠. 선조는 이렇게 많이 "이것"을 합니다.
25년(92년) 10월 19일, 11월 7일, 11월 23일
26년(93년) 1월 13일, 1월 25일, 8월 30일, 11월 16일, 윤 11월 16일, 윤 11월 24일
27년(94년) 4월 5일, 5월 27일, 7월 9일, 8월 28일, 9월 18일
28년(95년) 1월 18일 29년(96년) 8월 27일
92년 말부터 94년까지 보이죠. (위 일자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겼습니다. 더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이것은...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종 때부터 왕의 선위 선언은 신하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죽었거나 늙어서 크게 아프지 않은 이상 신하들은 계속 이를 반대해야 했죠. (아니 세종은 말년에 아픈데도 신하들의 반대에 선위를 못 했을 정도였죠) 이것이 몇 일 째 이어지고 세자 역시 몇 일 째 무릎 끓고 명을 물러 달라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할 때 뿐이었죠.
간단합니다. 충성 서약이었습니다. 92년의 선위야 명으로 도망가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평양을 회복한 이후의 선위는 그저 신하들을 흔들어 놓으려 한 것이었죠. 95년부터는 충분히 했다 싶었는지 거의 안 보이죠. 선조가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이거였던 겁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거짓 충성을 받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죠. 이 선위 쇼에 이어서 선조를 뒤흔든 사건이 터져 버립니다.
5. 몽학아 한양 가지 마라
... 제목은 그냥 생각 나서요.
93년은 크게 흉년이 들었고, 전염병이 돌면서 조선 백성, 조선군, 일본군, 명군까지도 이에 시달립니다. 중국에서 급히 군량을 보내 줄 정도였죠. 강화가 진행되고 군량이 떨어지면서 조선군은 급격히 축소됩니다. 이후 조선군은 명의 보조만 하게 되었죠. 94년, 95년에 뭘 비료로 썼는지 2년 연속 풍년이 들면서 사정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철수하지 않은 일본군과 특히 명군에게 시달렸고, 그나마 살 만 하게 된 거지 다수의 조선군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백성들은 쌀로 술을 빚어 마셨죠. 세기말의 분위기였던 걸까요.
이런 가운데에서 27년 1월, 조정에는 급보가 오죠. 현 경기도 과천시의 청계산에 반란 세력이 있으며 춘천, 해주, 충청도, 전라도에 그 무리가 산재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토벌을 명하여 송유진 등이 붙잡혀 옵니다. 그들을 문초해서 나온 이름이 바로 이산겸.
이산겸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서자로 조헌의 의병군에 참가했다가 금산성 전투에서 살아 남은 이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나온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조는 이산겸이 정말 관련되었을지 의심하는 류성룡의 말에 이렇게 답 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全州)로 돌아가겠는가. 송적(宋賊)이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眩惑)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94년 2월 14일)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름이 나온 이상 죽어야 된다는 거죠. 이후 선조는 이산겸을 옹호하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의병장 하나가 적이 아닌 아군, 그것도 임금의 손에 죽었습니다. 수정실록에서는 이를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이산겸을 의심했다"고 했는데, 조정의 얘기에서 누군지를 숨길 때는 보통 임금이 잘못 한 말이죠.
그리고 96년 7월, 충청도에서 이몽학이 난을 일으킵니다. 그는 의병을 내세우면서 기효신서를 통해 휘하 병력을 훈련시켰고, 이시발 밑에 소속되었습니다. 이 때 조선의 상황을 보고 한현 등과 함께 난을 일으키죠. 장소는 충청도 홍산. 6일에 임천과 홍산을 함락시키고, 청양, 정산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킵니다. 임천 군수 박진국이 포로가 되었고, 이시언이 이를 토벌하려다 두 번이나 패배합니다.
이 때 이몽학이 홍주를 포위하자 목사 홍가신이 굳게 지켰고, 이몽학은 물러나면서 "장군 김덕령과 영천 군수 홍계남 등은 우리와 공모되었으니 마땅히 함께 서울로 향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난중잡록은 반군이 지나던 곳마다 "밭을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하던 자는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적었습니다. 많은 호응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어 조경남은 "아! 이것이 어찌 그 본심일까?"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몽학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백성들이 조선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뜻 합니다.
결국 이들은 권율이 토벌하게 되고, 여기서 이몽학을 죽입니다. 이어 한현이 남은 병력을 수습했는데, 이시언이 홍가신과 함께 토벌하여 한현은 생포되어 참수당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정난공신이 되었죠. 이렇게 이몽학의 난은 얼마 되지 못 하고 끝납니다.
문제는 그 후폭풍이었죠.
사로잡힌 한현은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 과 "곽재우, 고언백"을 자기 편이라고 진술했습니다.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6. 충용은 스러지고
김덕령은 상을 이유로 임진년의 거병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계속 김덕령을 추천했죠. 맹장이라는 이미지만 있지만 그 역시 유학자였고, 성리학에 밝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기골장대한 모습과 그 용력으로 주변의 기대를 샀죠. 김천일 등 의병장들이 의기는 강했지만 약골인 사람이 많았다는 것과 생각하면 확실히 비교할 수 있습니다.
김덕령이 93년에 거병하자 이정암은 그에게 관직을 주고 병력을 지원하자고 장계를 올립니다.
하지만 많은 전설들과는 달리 그의 실제 공은 크지 않습니다. 거병이 늦었고, 그 때는 이미 휴전이 된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조정은 김덕령의 능력을 높이 사서 (병력이 3천여인데 기마병이 강했다고 하죠) 그 군대에 "충용군"이라는 호칭을 내리려 하고, 결국 94년 1월 선전관에 제수합니다. (아직 공을 세우지 못 해서 그렇다는군요)
94년 1월 송유진의 역모에 한 번 이름이 오르지만 다행히 별 벌을 받지 않고, 진해, 고성 등으로 투입돼서 장문포 전투에 투입되기도 합니다.
호랑이 두 마리를 잡아서 일본군에게 팔자 일본군들이 두려워 했다느니 하는 전설은 많죠. 하지만... 그렇게 많은 기대를 받았던 김덕령은 이렇게 참소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이 때 이름이 언급된 곽재우는 붙잡혔지만 곧 풀려났고, 다른 이들 역시 크게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김덕령의 고문 과정에 대해서도 야사에 적힌 게 많습니다. 묶인 밧줄을 힘으로 끊으면서 "도망가려면 이렇게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해서 철쇄로 묶었다던지, 역시 밧줄을 끊고 궁궐 담을 한 차례 넘었다가 돌아와서 역시 도망갈 수 있었다고 했다든지 하는 것이죠.
실록에 나타난 것은 압슬형 (자기 조각을 바닥에 깔아놓고 무릎 끓린 다음 위에 무거운 돌을 올립니다. 무릎이 박살나죠) 을 당하고도 무릎으로 걸어서 자기의 무죄를 밝혔다고 하는 등의 모습이 보입니다.
선조는 김덕령 거병 당시부터 김덕령을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공이 없다고 하면서 은근슬쩍 김덕령을 깠거든요. 20일간의 감옥 생활과 여섯 번의 고문,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여러 해 종군하여도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 하여 충성도 펴지 못 하고 효도에도 어기었으니, 죄가 이에 이르니 만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중략) 다만 원하옵건대 죄 없는 최담령은 죽이지 마옵소서"(난중잡록)
고문 당하는 상황에서도 충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선조의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김덕령이 형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賊)이로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 때 심문하기 위해 끌고 올 때도 힘을 부릴까 무서워서 큰 나무에 묶어서 끌고 왔다고 합니다.
조경남은 "김덕령이 살아 있었다면 정유년에 어찌 전라, 충청도 적이 쳐들어올 수 있었으랴"고 했고 일본에서 김덕령의 생존을 권율에게 물은 후 서로 축하하며 "전라, 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과장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난중잡록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충용장군. 말 그대로 충성과 용맹 두 개로 표현할 수 있는 김덕령은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습니다. 이후 그의 부하였던 최담령은 겁쟁이인 척 하며 폐인 노릇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수정실록에는 이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7. 적이 다시 올 것이다
93년에 류성룡은 명나라 낙상지의 권유에 따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로 훈련도감을 설치합니다. 이 때 나온 것이 유명한 삼수병, 포수, 사수(궁수), 살수(보병)으로 분류하는 거였죠. 그 인원은 4500명으로 조선이 사병을 해체한 후 처음으로 등장한 직업군인이었습니다. 특히 포수나 그에 관련된 기술자들은 일본에 부역하는 등의 죄를 지어도 용서하거나 가벼운 벌만 주었을 정도로 대우했고, 류성룡은 이들 하나하나를 아껴서 남쪽으로 보낼 때 병사 하나하나의 이름을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이어서 류성룡은 94년 속오군 체제를 건의했고, 이에 따라 지방의 체제가 속오군으로 변했고, 수령들 역시 무관 출신 영장을 보내서 군사권을 나누었습니다. 주로 문관들이 군사권을 맡던 임란 전과 달라진 것이죠. 물론 후에 지방의 수령이 영장을 맡는 겸영장제로 바뀐 걸 보면 조선은 역시 조선입니다. -_-;
휴전과 군량고갈, 전염병으로 인해 조선군은 크게 줄었고, 선조는 조선군을 양성하기보다는 명군에 더 의지했습니다. 조선의 사정상 힘들었던 면도 있지만, 그만큼 장수들을 믿지 못 했던 것이 큽니다. 이순신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 선조의 왕권에 대한 트라우마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후 조명연합군의 남진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조선군의 수는 적었고, 정말 유별나게 장수에게 병력을 집중 지원해 줬을 때는 단 한 번,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였습니다.
딱히 그의 능력이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침이 확실해질 무렵 조정의 신하들은 여전히 조령, 죽령, 추풍령의 세 길목을 막는 것을 강조했지만, 선조는 이를 거절하며 적은 반드시 호남으로 올 것이니 이 곳을 중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죠. 이랬던 군주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라는 거죠. 임진왜란편에서 누누이 언급했듯 재능 낭비였습니다. 바보짓도 능력이 있어야 하죠. 문제는, 그 바보짓 중 가장 컸던 것이 정유재란 자체의 원인이 돼 버렸다는 것이지만요.
통신사로 갔던 황신이 돌아오고 재침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에 선조는 산성의 수축 (이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과 청야 작전을 명 합니다. 이에 경상도는 곽재우의 화왕산성 등 산성 수비로 전환해서 96년 말부터 97년 초까지 청야 작전을 감행하고 모든 물자를 산성에 비축하게 됩니다. 이것을 맡은 것은 이원익으로, 실록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김경진님은 "경상도에서 제대로 이루어졌고, 전라도에서는 장수 교체의 문제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끝내 못 찾아냈습니다. -_-; 사실 청야만 제대로 하고 조선 수군이 건재하면 일본군은 여전히 군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임진란 때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각 지방의 군량을 노획한 것이었으니까요.
선조는 곧바로 명에 통보하고 원군의 재파병을 청합니다. 한편으로는 각 지방에 적의 재침 가능성을 알리고 방어선 확립을 명 합니다. 경기도의 경우 여주-양근-광주-한성 남한강 일대였고 강원도의 경우 평행-울진, 경상좌도의 영주-영월 등지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1597년, 정유년이 밝습니다. 이전 편에서 밝혔듯 그것은 조선군의 핵심 수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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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편은 이렇게 구성하겠습니다.
1. 한산도는 나라의 관문이거늘 - 원균이 패했을 때 어떤 선비가 했던 평가입니다. 왜 주장을 그리 바꿨냐는 거죠. 이순신의 파직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칠천량 이전 원균의 졸전 기록도 넣어 보죠.
2. 칠천량, 한산이 무너지다 - 두 말 할 필요 없죠. 길어질 경우 둘로 나누겠습니다.
3. 무너지는 호남 - 휴... 왠만하면 직산전투까지는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 그 분이 오셨습니다.
5. 명량, 천행 - 길어질 경우 두 편으로 나누겠습니다.
6. 호랑이 사냥 - 1차 울산성 전투 및 반 년에 넘는 대치기간 (늦어진 가장 큰 이유예요 ㅠ) 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7. 꿈의 끝 - 히데요시가 죽은 후 조명연합군의 반격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히데요시의 사세구 (일본인들의 시로 된 유언) 가 "오사카의 일도 꿈, 또 꿈이었죠. 임진왜란도 꿈인 건지...)
8.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 ... 말이 필요 없죠?
9. 왜란이 끝나고 - 그 후일담입니다. 길어지면 두 편으로 끝내겠습니다.
이거 결국 임진왜란 장편 삼부작이 되었네요.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 >_<
김덕령 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현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게 기억 납니다. 논란이 많았고 지금도 많은 환단고기는 홍범도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지원하거나 참여했고, 그 수를 따지면 한국 독립운동사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태백교"라는 종교 하나에 이렇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는 거죠. 물론 그 사람들이 환단고기를 봤다는 기록은 전혀 없지만요. 신채호도 단기고사의 중간본을 냈다고 했는데 정작 "조선상고사"에서는 단기고사를 정면 반박하는 부분들이 많더군요.
결국 이들의 이름을 팔았다는 것밖에 되지 않겠죠. 환단고기 논쟁에서 감춰진 일면입니다.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집어 넣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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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곽재우와 함께 충무공께서 일기에 불같이 뒷담화해놓은게 생각나는군요. 생각해보면 충무공은 이순철을 능가하는 모두까기인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오래사셨다면 명나라황제도 깠을지 모르겠네요..
흔히 임진왜란 7년을 생각하면 초반의 일본군의 미친듯한 진격때문에 조선전체가 7년내내 전쟁의 참화에 말려든것처럼 보이지만 이몽학의 난이 조선이 전쟁중에서도 나름 안정을 찾은 반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라 전체가 일본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면 이몽학의 난에 그렇게 많은 병력이 모일리도 없었고 토벌군이 제대로 활약하기도 힘들었겠죠.
저도 개인적으론 고니시가 히데요시를 속였다기 보단 히데요시가 오히려 고니시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었단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왜냐하면 고니시의 이 속임수자체가 너무 엉성하고 들통난 과정도 너무 황당하죠. 책봉서의 핵심을 빼고 읽으라했는데 글읽는 이가 얼떨결에 다 읽어 버린다.... 고니시가 고작 저런 속임수를 썼다면 고니시는 너무 멍청한 놈이죠.
앞으로 전개될 내용중 4번.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문구만 봐도 뭉클하군요.
이 장계를 원문으로 본적이 있는데 상유십이(尙有十二) 미신불사(微臣不死)란 문장을 한동안 계속 되뇌이고 다닐 정도로 저에겐 정말 그 어떤 문구보다 아름답고 그 어떤 것보다 슬프며 장엄하고 고결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누가 저런 문장을 만들어 낼수 있을까요?
김덕령 사사건은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의 시선이 은근히 다른 부분 중 하나라...
선조실록보면 선조가 앞장서서 김덕령을 죽이려 든 것처럼 써 놨는데 수정실록보면
덕령이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이에 덕령은 사실대로 답변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상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
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 수정실록 29년 8월 1일
이렇게 나와버립니다.(...) 한쪽에선 죽이려 드는데 다른 한쪽에선 살리려 들었다는 기기묘묘한 상황.
선조실록이 주가 되고 수정실록은 보충버전이니 선조실록에 중점을 둬야 하지 않나 싶은데 선조실록수정청의궤를 보면 '선조실록 그거 이이첨이 아예 사초를 자기 집에 갖다놓고 맘대로 써내려갔다고 말 많아요' 하고 있으니 또 그렇고. 오항녕 교수님 같은 분은 수정실록쪽에 좀 더 신뢰를 두신 거 같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고...
번외편으로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 대한 얘기도 한번 다같이 해봤음 좋겠네요. 시중에 있는 원균옹호론으로 가득찬 책들이 일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수정실록은 이순신과 같은 가문인 대제학 이식이 주도했기에 이순신을 의도적으로 띄우고 원균을 깍아내렸다라는 내용인데 당최 서인이 주도한 수정실록이 왜 이순신을 옹호하고 원균을 깍아내렸다는건지... 그 논리를 이해할수가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