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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북벌을 성공해 무도와 음평등을 평정한 제갈량은
다시 승상으로 복직이 된다. 또 이해 마침 손권은 스스로 참칭을 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실제 우리가 촉이라 부르는 나라는 당시에는 스스로 한, 혹은 계한이라 칭하며
자신이 실제로 후한의 정통성을 이은 국가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적대국도 아닌
동맹국이 황제를 자칭한다는 건 자신들의 정통성을 버리는 행위라 생각했는데,
제갈량은 여기에 대해 대신들을 설득하며 위위와 진진등을 보내 손권의 정호를 축하해주었다.
231년 마침내 제갈량의 4번째 북벌이 실행되는데,
연의와 다르게 실제로는 이 때가 제갈량과 사마의가 직접적으로 교전을 했던 첫번째 북벌이다.
제갈량은 촉과 한중의 험한 지형을 극복하고자 목우를 사용해 식량조달을 하고
기산을 포위한 뒤 북으로는 선비족인 가비능을 설득해 제갈량에 호흥하게 하도록 한다.
사마의는 당시 장합등과 함께 장안에 주둔하여 기산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는데,
장합이 군사를 나누어 주둔시키려하자 사마의는 그러면 각개격파될 가능성이 있다며
전군을 한대 모아 제갈량과 전면전을 하기에 이른다.
이 때 제갈량은 오히려 반대로 군을 나누어 한쪽은 그대로 기산을 포위하게 만들고
자신은 직접 사마의와 전면전을 치루러 간다.
사마의는 이를 대적해 곽회 비요등을 보내나 그대로 격파당한다.
마침 제갈량은 식량조달을 위해 그 주위의 보리를 수확하는데 이 때 사마의의 본대와
조우하지만 사마의는 외진 지형에 숨어 대적하지 않자 제갈량은 그대로 거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곽회와 비요의 군대가 격파당하고 자신의 땅에서 제갈량이 수확을 하는데도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사마의를 두고 위나라 내부에선 여러가지 말들이 돌기 시작한다.
이 때 장합이 사마의에게
적이 교전을 청하는데도 우리가 그것에 응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고 응당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진군하는 적과 대적할 필요가 있다고 권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또 산에 올라 진을 세운뒤 싸우려하지 않았다.
이에 가허와 위평등이 차례로 청하며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라고 고할 때도 사마의는 교전을 망설인다.
마침내 주의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사마의는 마침대 제갈량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고
장합에겐 하평을 공격하게 하고 사마의 자신은 중도를 따라 제갈량에게 향했다.
이에 대적해 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등을 보내 사마의의 군을 대파하고
갑수(갑옷 입은 군사) 3천급, 현개(철갑옷) 5천령, 각노 3천장을 노획하는 엄청난 대승을 이루게 된다.
결국 사마의는 패주하고 영채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대승속의 기쁨도 잠시 곧 이엄(혹은 이평)에게 서신이 도착한다.
이엄은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장마비가 쏟아져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음으로,
제갈량에게 후퇴하여 돌아오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제갈량은 식량수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후퇴를 결정한다.
이 때 마침 사마의는 장합에게 명해 추격하도록 명하는데, 장합은 거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낸다. 사마의는 장합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어쩔 수 없이 추격을 하게 되고 결국 중간에 다시 교전에 응한 제갈량 군의
화살을 다리에 맞고 사망한다.
그렇게 제갈량이 돌아오게 되자 이엄은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오십니까"
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엄은 자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책임을 벗어나고자 제갈량이 계속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유선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이에 화가난 제갈량은 이엄이 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공개해
이엄의 잘못을 분명하게 들어나게 한다. 이에 이엄은 변명하고 사죄하지만
격분할대로 격분한 제갈량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관직을 박탈한 뒤 서민이 되게 하고
그 뒤를 그의 아들 이풍에게 잇게 함으로써 제갈량의 네 번째 북벌은 이렇게 또 아쉬움을 남긴채
끝나게 된다.
이 사건을 꽤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이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는 이엄을 제거하고자 한
계책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 부분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공을 칭하라 할 정도로 제갈량에게 호의적이었으며,
(물론 제갈량은 끝내 사양하며 죽을 때까지 받지 않는다.)
두 번째는 제갈량이 이엄을 제거하기 위해 포기해야할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4번째 북벌에서 사마의에게 그렇게 엄청난 대승을 거뒀음에도 정치적 라이벌 하나를
제거하려 모든 걸 포기하기엔 제갈량이라는 인물의 그릇은 그렇게 작지 않았다.
세 번째는 이엄을 제거한 뒤에 그의 아들 이풍에게 그 직위를 그대로 이었다는 것에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한 정치적 라이벌의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제갈량은 이풍에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내 상황을 잘 설명하게 하고 결국 이풍은 끝까지 자신의 일에
충실함을 보인다.
마지막은 이엄이 죽었을 때의 반응인데, 이엄보다 제갈량이 먼저 죽자
이엄은 제갈량은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을 확신했지만,
제갈량의 후계자는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격분해서 죽었기 때문이다.
234년 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은 다시 시행됐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야곡을 겨쳐
출병하고 이 때 목우에 이어 유마가 사용됐다. 이전과 다르게 퇴각이 힘든 무공의 오장원을 점거해
여기에서 끝을 볼거다라는 의미를 내비치며 사마의와 위남에서 대치한다.
제갈량은 군량이 이어지지 못해 또 북벌에 실패할 것을 염려해
군사를 나누어 둔전하고 오랫동안 주둔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게 된다.
즉, 쉽게 말하면 남의 국경땅에 들어가 군량이 모자르니 대놓고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양옹주를 나누어버려 자연스럽게 양주를 흡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제갈량은 계속해서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의는 교전하지 않는다.
강유가 조예의 명이 있으니 적은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나
그에 대해 제갈량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이 있더라도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확신만 있다면
반드시 출전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백여일이 지나도 사마의는 끝내 출전하지 않고 제갈량은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는 것으로
북벌은 끝이 나고야 만다.
이 때 제갈량이 나이는 54세이고 아래는 그가 한 유언이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 다섯경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을 때에는 따로 조달할 것이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림으로써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죽고나니 실제로 이와 같았다.
그리고 제갈량 사후 그에 대한 평이다.
손권(孫權)이 제갈 무후(諸葛武侯:제갈량의 시호)를 칭찬하기를,
“진실함은 음양을 감동시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하였고,
사마의(司馬懿)는 그의 군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으며,
종회(鍾會)는 촉(蜀) 땅에 들어가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
무후가 적국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이겠는가.
무후가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고
이평(李平)이 슬퍼하다 죽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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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북벌은 겉만 보면 단순히 식량 조달이 안 되 아무것도 못하고 끝난 전쟁.
이라고 단정짓기 쉽지만, 실제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한니발을 영웅시하는 건 우리가 믿는 가치관이 언제나 절대적인 승리, 뿐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연의에 대한 반발심으로 제갈량은 단순한 정치인으로 여겨지고 있음에
그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끝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유비)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조(崩殂-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때입니다. 그러나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성청(聖聽-임금이 귀로 듣는 것)을 널리 열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충간(忠諫)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됩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관부)은 모두 한 몸이니 척벌장비(陟罰臧否-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유사(有司-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平明-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됩니다.
시중(侍中), 시랑(侍郎)인 곽유지(郭攸之), 비의(費禕), 동윤(董允)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向寵)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軍事)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督)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영중(營中)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行陳)을 화목(和睦)하게 하고 그 우열(優劣)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한 것이 바로 선한(先漢-전한)이 흥륭(興隆-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後漢)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무명옷;평민)로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성명(性命-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문달(聞達-이름이 알려져 등용됨)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려(草廬)를 세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구치(驅馳-분주하게 힘씀)할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傾覆)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危難)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유비가 제갈량을 찾아온 이래)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謹愼-삼가고 조심함)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갑(兵甲-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흉(姦凶)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구도(舊都-옛 수도, 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분(職分-직책과 본분)이며, 손익(損益)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遺詔)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 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表)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