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7/26 15:17:30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167
Subject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3) - 경시제, 공신들을 왕으로

경시제가 궁궐에 들어섰을 때, 궁녀 수천 명은 예전처럼 나열되어 있었고, 종과 북, 가마와 수레까지 모두 정연했다. 그러나 그 자신만은 구푸린 채 돗자리를 긁고 있었다.

그는 과연 진정한 황제가 맞았을까?


지금까지 이야기


전한과 후한 사이, 짧게나마 다시 일어난 한나라가 있었다. 그 황제는 경시제 유현, 후한을 세운 광무제의 팔촌 형이다. 농민 반란군 녹림군에서 추대되어 즉위한 그는, 유력한 경쟁자이자 유능한 장수였던 광무제의 형 유연을 제거했다.

이후 녹림군은 장안 인근에서 봉기한 세력과 손잡고 신나라의 왕망을 죽이고, 그 머리를 효수했다. 그러나 경시제는 녹림의 장수들에 의해 옹립된 군주에 불과했으며, 수도 장안을 안정시키고 새 한나라의 권위를 각지로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안에 도착한 경시제


경시제가 장안으로 막 입성했을 때의 상황을 《후한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처음에 왕망이 패망했을 때, 유일하게 불타 없어진 것은 미앙궁뿐이었고, 그 밖의 궁궐과 관청 건물은 하나도 파괴되지 않았다. 궁녀 수천

명이 후궁에 예전처럼 나열되어 있었고, 종과 북, 휘장과 장막, 가마와 수레, 기물과 의복, 태창(국고), 무고(무기고), 관청과 시가지는 옛날과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경시제가 장안에 들어오자 장락궁에 거처하며 전전(前殿)에 올라갔는데, 낭관과 관리들이 차례로 뜰에 도열하였다. 경시제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느껴 고개를 숙이고 자리의 돗자리를 긁으며 감히 그들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뒤늦게 도착한 여러 장수들에게는사로잡은 것과 노략질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물었는데, 좌우의 시관(侍官)들은 모두 궁궐에서 오랫동안 일한 관리들이라, 이 말을 듣고 서로 놀라며 마주보았다.


미앙궁은 불탔지만 다른 궁궐들은 무사했고, 미앙궁과 규모가 비슷하며 미앙궁 동편에 있는 장락궁이 새 한나라의 궁궐로 선택되었다. 이 궁궐들에는 궁녀 수천 명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의외로 신나라가 망한 후에도 약탈당하지 않았다. 신나라 멸망시의 혼란은 철저하게 미앙궁에 국한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에서 살펴본 신도건의 강압적인 태도가 장안 주변의 민심은 불안하게 했지만, 장안성 내에 일정 수준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갖춰진 신나라의 유산을 경시제에게 인계하는 데에는 경시제의 사촌 유사(劉賜)의 임무도 무시할 수 없다. 유사는 23년 음력 10월에 유수를 하북 순행에 천거한 후, 승상이 되어 장안으로 먼저 가 종묘와 궁실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24년 음력 2월 유현이 장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이미 신나라 시절부터 일했을 오래 된 시관들이 궁궐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궁궐의 제도가 갖춰져 있는 것은 유사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RR_LhaCQrOx8mr6rxsDeS_psYnk.png

광무제 유수의 조정. 경시제의 팔촌 동생 광무제는 미숙했던 경시제와는 달리 제왕의 책임을 능히 감당하였다.

경시제가 장안으로 들어오는 데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경시제가 장락궁의 옥좌에 올라,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불안했다. 경시제는 위엄 있게 정비된 궁궐의 모습에 압도되어, 전각에 올라서도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깔린 돗자리만 긁고 있었다. 이는 중국 고전에서괄석(刮席)’이라 하여, 부끄러움과 위축된 심정을 나타낼 때 쓰이는 표현이다. 당나라 시인 이한은 《몽구》(蒙求)라는 시에서 서진의 어리석은 황제 혜제와 경시제를 함께 풍자하며, “유현은 자리를 긁고, 혜제는 개구리 소리를 듣네라고 표현했다.

또한, 경시제는 뒤늦게 도착한 장수들에게 전공을 묻는 대신사로잡은 것과 노략질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라고 질문하여, 주변에 늘어선 시관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화다.

이처럼 경시제가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긁었다는 이야기를 두고는 비판도 있다. 중화민국의 역사학자 장태염은, 당나라의 사가 유지기의 견해를 인용해초택에서 거병한 영웅이 궁전 앞에서 자리만 긁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이는 광무제가 경시제를 모멸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후한서》 유현전이 유난히 경시제의 나약하고 어리숙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이례적인 서술 태도를 보이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시제가 이후 대규모로 이성제후왕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권한을 넘긴 행적을 보면, 단순히 조작된 이미지라고 보기 어렵다. 경시제는 실제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능숙하게 통치하지 못한 면이 분명히 있었고, 이는 후술할 여러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유지기나 장태염의 견해는초택에서 거병했다는 단일 사건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경시제의 전반적인 행적을 간과한 단견으로 보인다.

 


경시제, 14공신에게 왕위를 내리다

jNMOLuuT1uT0YFAjsigQIWY6_Lc.png경시제의 제후왕 책봉과 당시의 독립 세력의 분포도.

CO1IiZbGPjikT38YXB5raWV_pCE.png경시정권에서 군 단위 봉토를 받은 제후왕 6인의 왕국 주변 지도. 범례는 그림 2를 따름.


비록 유망의 죽음으로 경시제 외에 공식적으로 황제를 일컫는 이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중국 전역이 경시제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회남에서는 신나라의 전 여강태수 이헌(李憲)이 여강군 일부를 통치하며 회남왕을 자칭했다. 익주에서는 신나라의 전 촉군태수 공손술(公孫述)이 가짜 한나라 사절을 내세워 그에게서 보한장군·촉군태수·익주목 등의 직함을 받는 형식을 취해, 한나라의 권위를 빌린 독자 정권을 수립하고 있었다. 농서에서는 유흠의 속관 출신인 외오(隗囂, 외효)가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의 간쑤성 일대에 해당하는 10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중 외오는 24년에 숙부 외최와 형 외의와 함께 입조해 경시제에게서 우장군으로 임명되지만공손술과 이헌은 끝내 복속되지 않았다. 안정군 삼수현에서는 민중에게 추대된 노방(虜芳)이 경시제에 복속되어 기도위에 임명되었다.


시기는 불명확하나 청주에서는 장보(張步)가 경시제가 파견한 낭야태수 왕굉의 부임을 막았으며, 서주에서는 경시제의 지배를 받아들인 농민 반란군 적미의 일당인 동헌(董憲)이 동해군에 눌러앉았다. 형주에서는 진풍()이 남군 기현 여구향(현 후베이성 이청시 서북)과 그 일대를 점거했고, 전융(田戎)은 남군 이릉현(현 후베이성 이창시)을 장악했다.


더욱이, 경시제가 장안으로 들어오기 전, 하북 순무를 맡은 유수는 왕랑(王郞)이 성제의 아들 유자여를 사칭하여 스스로 천자로 즉위한 사건에 대응하느라 이미 고전하고 있었다. 이는 23년 음력 12월이었으며, 여남의 천자 유망을 처치한 지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결국 경시제의 유일무이한 황제라는 권위는 무너졌고, 명목상의 통치는 곳곳에서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신 세력의 일원으로 이일의 동생인 이송(李松)과 조맹을 주축으로 공신들을 모두 왕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직 대사마 주유만이 고조의 약조를 지켜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경시제는 먼저 유씨 종실들, 곧 자신과 동족인 용릉절후 가문의 일원들을 왕으로 삼았다.


태상장군·용릉후 유지(劉祉)는 정도왕.

승상·광한후 유사는 완왕.

유경(劉慶)은 연왕.

유흡(劉歙)은 원지왕.

대장군·흥덕후 유가(劉嘉)는 한중왕.

분위대장군 유신은 여음왕.


이 중 유지는 용릉병 거병에 참여하고 장안 입관에도 종군하였으며, 경시제 등이 속한 용릉후 집안의 장손으로서 경시정권 아래에서 용릉후 작위를 계승하였다. 유경은 뚜렷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유지의 숙부로서 종실 내에서는 역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흡도 경시제를 따라 장안 입관에 종군하였다. 유가는 평림병 시절 경시장군이던 경시제를 따랐으며, 완성 함락에서 공을 세웠고, 관군현에서는
지역 군벌 연잠(延岑)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유신은 여남의 자칭 천자 유망(劉望)을 무찌르고 그를 죽였다.

하북 지역에 연왕과 원지왕을 봉한 것으로 보아 당시 경시정권에서도 하북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연왕 유경은 이후 이렇다 할 행적 없이 적미에게 살해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끝까지 장안에 머물다가 장안으로 쳐들어온 적미에게 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원지왕 역시 원지에 부임한 흔적이 없고, 원지는 유수가 직접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한 군에 해당하는 왕은 한중군을 받은 유가, 정도군을 받은 유지, 광양군(연국)을 받은 유경으로, 나머지는 현에 봉해졌다. 전한에서는 왕망의 섭정기에 한 현의 이름으로 봉해진 왕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시제 때에는 이런 왕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먼저 유씨 종실들을 왕으로 봉한 것까지는 주유의 의견이 일부 수용된 것이지만이후에는 결국 공신들을 이성제후왕으로 봉했다.


정국상공 왕광은 비양왕.

성국상공 왕봉은 의성왕.

대사마 주유는 교동왕.

위위대장군 장앙은 회양왕.

정위대장군 왕상은 등왕.

집금오대장군 요담은 양왕.

서병대장군 신도건은 평지왕.

상서 호은은 수왕.

주천대장군·보한후 이통은 서평왕.

오위대장군 이일은 무음왕.

수형대장군 성단은 양읍왕.

대사공 진목은 음평왕.

표기대장군 송조(宋佻)는 영음왕.

윤준(尹遵)[1]은 언왕.


이들 중 왕광·왕봉·주유는 옛 신시병, 장앙·왕상·성단은 옛 하강병, 요담·진목은 옛 평림병, 이통·이일은 옛 용릉병 출신이며, 송조는 계통은 불명확하나 곤양 전투에 참여한 종조와 동일인물로 보이며 그렇다면 녹림의 제장 중 한 명에 해당한다.


왕광은 낙양성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주유는 회양을 공격해 신나라의 양주목을 죽였다. 그러나 그 주유는 멀리 산동 반도의 교동으로 보내고 장앙에게 대신 회양을 맡긴 것이다. 실제로 장앙은 이곳에 부임해서는 휘하 장군 요위의 반란으로 쫓겨나, 주유가 남긴 회양도위 잠팽이 요위를 무찔러야 했다.


신도건, 호은, 윤준은 녹림 시절의 활약이 불분명한 인물들이다. 신도건은 유연 1차 암살 시도 때 수의어사를 맡았고 장안 공격에서 서병대장군으로 이송과 함께 현지 군과 협력했었으나, 호은과 윤준은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공신의 일원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으므로 기록되지 않은 활약상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다.


이성제후왕들 중에서 한 군을 받은 인물은 교동에 봉해진 주유와 회양에 봉해진 장앙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현에 봉해졌다. 그리고 대부분 남양군과 인근 영천군·남군·진류군·여남군에 봉해졌으며 멀리 봉해진 인물은 동해군 음평현을 받은 진목과 산동 반도의 교동국에 봉해진 주유뿐이었다. 녹림이 오랫동안 체류한 남양군 위주의 이성제후왕 책봉은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보다는 논공행상의 의미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왕상은 등왕과 함께 행남양태수사에 제수되었으며, 포상과 처형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전권[專命誅賞]을 위임받았다. 남양군에 봉해진 공신들이 수두룩하니 남양군태수사를 맡은 왕상의 지위는 특별한 셈이며, “전명주상”이라는 이례적인 권한은 경시정권에서 이 이성제후왕의 권한의 단면을 보여준다. 왕상은 또 여덟 현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유씨 성을 받았다. 현에 봉해진 왕인데도 여러 현을 받은 것은 다른 왕들도 왕상처럼 여러 현을 받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덟 현이면 경시제가 주유에게 주려 한 교동국이 거느린 8현과 유사한 규모다.



다른 왕들 중에 왕상만큼 큰 권한을 받았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록이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이통과 이일은 둘 다 후한서 이통전이라는 열전이 있음에도 이통이 절을 지니고[지절(持節)] 형주를 진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지절 역시 황제가 권한을 위임해주었다는 징표이므로 이통 역시 왕상처럼 경시제에게서 일정 권한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왕상의 직위가 삼공이나 승상에 미치지 못하는 정위였다는 점은, 왕상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왕광·왕봉·주유·진목의 경우는 왕상과 같거나 더 강력한 권력을 부렸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내놓게 한다.



이러한 공신들의 권력 나눠먹기에 저항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끝까지 견지한 주유였다.


“신은 유씨 종실이 아니니, 감히 전범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러자 경시제는 주유에게 왕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유의 직책인 대사마까지 셋으로 쪼개 주유는 좌대사마(左大司馬)
삼고 승상 유사를 전대사마(前大司馬), 조맹을 우대사마(右大司馬)로 삼았다


남양 근처에 봉해진 대부분의 왕들과 달리 주유만이 산동 반도의 끝자락에 봉해졌는데, 그만큼 회양에 봉해진 장앙과 함께 지역 안정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그런데도 왕은 유씨만을 내세워 봉국에 가려 하지 않은 태도가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공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유의 논리는 공신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유는 동료들에게 외면당했으며, 그 결과 권한까지 3분의 1로 축소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이 주유가 실각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주유와 유사는 이일·이통·왕상 등과 함께 관동을 진무했고, 유사 대신 이송이 새 승상이 되어 조맹과 함께 조정 안을 맡았다. 이송은 일족 이통·이일과는 달리 제후왕에 책봉되지는 않았으나, 장안 공격에서 평지왕 신도건과 함께해 장안성을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경시제의 제후왕 책봉은 먼 곳에 봉해져 지역 안정과 통제를 맡은 왕들과, 옛 녹림의 근거지와 가까운 곳에 봉해져 공로를 인정받은 왕들로 나뉜다. 그러나 먼 곳에 봉해진 왕들은 부임조차 하지 않아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가까운 곳에 봉해진 왕들은 과도한 권력을 손에 쥐고 오히려 경시제의 왕권을 약화하는 존재가 되었다.



제후왕들을 임명하고 관직을 재정비한 경시제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다음 편에서 살펴보자. 



연표

23년 음력 12, 하북에서 왕랑이 자칭 천자가 됨.

24년 음력 2, 경시제 장안 입성 후 장락궁에 거처하며 정무 시작.

24, 입조한 외오를 우장군으로 임명.

24, 노방을 기도위로 임명.

24, 유씨 종실들을 제후왕으로 책봉.

24, 공신들을 이성제후왕으로 책봉.


요약

경시제는 장안에 입성했으나, 황제의 자리를 감당하지 못해 위축된 모습으로 정무를 시작했다.

각지에서는 경시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군벌과 자칭왕들이 등장했다

이에 종실과 공신을 제후왕으로 봉했지만, 통치 강화보다는 왕권 약화로 이어졌다.

 

주석

[1] 윤준은 《후한서》 광무제기의 표기를 따른 것으로, 유현전 등에서는 윤존(尹尊)으로 표기한다.

 


그림 출처

그림 1: 진사관(陳士), 《성제명왕선단록()》 중 「한 광무제」, 청대. 국립고궁박물원(타이베이) 소장. ⓒ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CC BY 4.0. www.npm.gov.tw


그림 2·3: 中央究院,《中華文明之時空基礎架構系統》第一版,(台北,20029月)。경시정권 제후왕·독립 세력 현황은 글쓴이 편집/추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닥터페인
25/07/26 16:08
수정 아이콘
후한의 기틀이 어느 정도 다져졌다는 걸 부인할 순 없겠군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4615 [일반] [팝송] 벤슨 분 새 앨범 "American Heart" 김치찌개857 25/07/27 857 0
104614 [일반] 설사의 행복(중요한 자리는 미리 싸세요) [12] 만렙법사1528 25/07/27 1528 11
104612 [일반] [웹툰 리뷰] 무한레벨업 in 무림 심플리뷰 (스포주의!) [9] 일월마가3000 25/07/26 3000 1
104611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3) - 경시제, 공신들을 왕으로 [1] 계층방정1883 25/07/26 1883 1
104610 [일반] <판타스틱 4: 새로운 시작> - 미약하지만 준수한. (노스포) [19] aDayInTheLife2792 25/07/26 2792 1
104609 [일반] 신과 거인의 시대 (바이킹 신화를 알아보자) 식별1565 25/07/26 1565 2
104608 [정치] 대통령이 청문회 한듯한 SPC 노사 간담화에 대하여 [64] 오컬트16005 25/07/25 16005 0
104607 [일반] AI시대에는 누가 노벨상을 수상할까요? [15] Categorization5418 25/07/25 5418 1
104606 [정치] 의대생이 사과도, 반성도, 재발방지 약속도 없이 돌아옵니다. [245] 발이시려워15495 25/07/25 15495 0
104605 [일반] 동기부여와 정신승리 번개맞은씨앗3548 25/07/25 3548 0
104604 [일반] 7월초 기준 미장/중국장/국장 개인투자자들 성적표 [33] 독서상품권6262 25/07/25 6262 0
104603 [정치] '북한과 통모’ 시도했나, '몽골 공작' 수사 [24] lightstone5177 25/07/25 5177 0
104602 [정치]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에 사우나 설치 [65] lightstone7545 25/07/25 7545 0
104601 [정치] [번역] 트럼프의 관세 전쟁, 유럽보다 미국이 더 큰 대가를 치르는 이유 [17] KOZE6289 25/07/24 6289 0
104600 [정치] 2030의 4050 혐오, 단지 위선과 여성우대 때문일까 [150] 방구차야8745 25/07/24 8745 0
104599 [일반] 이런저런 이야기 [10] 공기청정기2307 25/07/24 2307 6
104598 [정치] 이준석의 예견된 실패, 자초한 비극 [78] 딕시8322 25/07/24 8322 0
104597 [일반] 얘, 느 집에는 이런거 없지? - Fig.1님 책 이벤트 인증입니다 [2] Broccoli1988 25/07/24 1988 4
104596 [일반]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 리뷰[스포주의] [16] 메카즈하1632 25/07/24 1632 1
104595 [일반] 중요한 건 내가 우위에 서는 것이다. 도덕에서라도. [2] 223.321612 25/07/24 1612 5
104594 [일반] 만약 제가 비열한 사람에 대한 사적 처벌을 목격했다면 [1] Pygmalion2468 25/07/24 2468 1
104593 [정치] 李대통령 지지율 64%…국민의힘 지지율 17% 최저치 경신 [57] Davi4ever6654 25/07/24 6654 0
104592 [정치] "다신 안 그럴거죠? 믿어요" '법원 폭동' 다 선처한 판사 [64] 카린6884 25/07/24 688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