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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7/22 01: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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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1024px-Standard_of_Ur_-_Peace_Panel_-_Sumer.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시민들(civility)에 의해 구성된 도시들(civilitas)은 서로 모여 제국을 형성하고, 문명(civilisation)을 낳는다. 도시의 시민들은 고전에 대한 교양을 쌓고, 글줄을 쓰는 능력을 길렀으며, 도시의 행정을 담당하는 통치 엘리트로서 거듭난다. 제국은 서로 비슷비슷한 양식을 지닌 도시들을 영원히 재생산하는, 자가복제의 길을 걸음으로서 서서히 형성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5세기에 벌어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적어도 서유럽 지역에 국한된(로마의 나머지 절반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이후로도 일천년간 유지된다)문명사적 재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Genseric_sacking_rome_456.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1. 어째서 제국의 서쪽 절반만 몰락했을까?

 이에 대해서 지금껏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여러 장기적, 구조적 원인들과 우연적, 단기적 사건들을 들어 설명하고자 했다. 구조적으로는 제국을 두 개 이상으로 분할해 통치하는 정치적 방식의 도입이나, 우연적으로는 야만인 집단의 쇄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고위 정치인들의 전략적 실책 등이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지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들이야 어찌되었건, 한 번 몰락이 시작되자 더이상 돌이킬 수는 없는 되먹임고리가 형성되었다. 제국의 분할은 다시 서로마에서 갈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분열로 되풀이되었고, 반달족의 카르타고 침탈은 세수의 고갈과 그로 인한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Alaric_entering_Athens.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2. 로마 내부로 쇄도해들어온 야만인 족장들은 대부분 그들의 토착언어와 라틴어 모두를 구사할 줄 아는 이중언어 구사자였으며, 문화적으로도 그러했다. 

 그들은 로마의 귀족처럼 옷을 입었고, 로마의 귀족들과 통혼했으며, 로마의 고전들을 탐독했다. 야만인 족장들이 토착 로마인들과 다른 점은 오직 그들이 물려받은 조상 대대로의 계보와 이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로마에 두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실패한 야만인 지도자들 및 그들의 세력은 완전히 로마화되었지만, 성공적으로 도시와 요새를 정복한 이들은 피지배민들과 자신들을 명확히 구분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고트족이나 프랑크족 등으로 정체화했다. 그리고 제국이 멸망한 옛 터에는 이런 독립적인 야만인 지도자들의 정치체가 수없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Europe_and_the_Near_East_at_476_AD.pn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3. 제국이 여러 개의 정치체로 쪼개지자 그동안 삐걱거리며 유지되었던 관료제는 자연스레 붕괴되는 수순을 맞이했다. 

 늘상 지중해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이동하던 세금과 식량은 뚝 그쳤고, 가장 많은 세금이 쓰이던 군대는 직격타를 맞았다. 새로운 야만인 지도자들은 따라서 그들의 새로운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 대신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렇게 제국의 오랜 전통인 (한 번 뿌리 뽑히면 다시 도입하기 힘든) 세금 제도가 서유럽에선 서서히 사라져갔다.


Plan_mediaeval_manor.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실로, 새로운 야만인 통치자들은 세금 대신 토지를 선호했다. 토지 기반의 완전히 새로운 경제 체제, 이것이야말로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귀족이 지극히 부유했던 것과 달리, 중세의 영주들은 다소간 질박한 생활을 했다는 하나의 고정관념이 있다. 이 고정관념은 대체로 사실이다. 위대한 영웅들을 숭배하는 야만전사들에게 주기적인 세금이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가 아프면 비겁하고 역겨운 세금 장부를 불태우는 의식을 통해 질병을 극복하려고 했다.


Codex_Manesse_149v_Wolfram_von_Eschenbach.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4. 그렇게 귀족들은 실제로 중세에 들어 가난해졌다. 

 지역과 도시간 상업망이 쇠퇴했고, 사치품들은 훨씬 희귀해졌다. 많은 도시들과 시골의 장원들이 버려졌다. 지역 단위의 수공업 커뮤니티는 맥이 끊겼다.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고전 문학작품들이 사라졌다. 알음알음 세대를 거듭하여 전해져 내려오던 인류의 수많은 암묵지들이 영원히 역사의 망각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옛 제국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Grégoire_de_Tours,_Histoire_des_Francs,_livres_1_à_6,_page_de_frontispice.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5. 새로운 종교, 기독교는 확실히 제국의 유산을 다음 세대로 계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에 대한 가장 역동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역사학자, '투르의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시다. 그는 갈리아 속주의 원로원 조상을 둔 갈로 로망 계열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야만인 지도자들에게 평생을 충성했다. 그와 같은 당대의 주교들은 유의미한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도시와 왕국들 사이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주교들은 심지어 가장 잔혹하고도 악명높은 군사 지도자들에 맞서서 대놓고 반대의견을 표출할 수도 있었다.


3042px-Germaanse_volksvergadering_(cropped).jpg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경청하는 국회의원들


 6. 로마의 공공성도 다소간 야만적 요소들로 인해 비틀렸음에도 여전히 살아남았다.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나가고있는 '의회'가 바로 야만인들에 의해 새롭게 도입된 대표적인 요소다. 북방 자유민들의 정치적 공동체는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형태의 의회를 형성해 그들의 사법적, 정치적, 왕권적 정의를 정당화했다. 국왕은 국가의 중대사를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의논해야했고, 또한 중대한 사법적 판결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끝.)



참고문헌:

Reynolds, Susan. Fiefs and vassals: the medieval evidence reinterpreted. OUP Oxford, 1994.

Fried, Johannes.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Wickham, Chris. Medieval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16.

세부적인 내용은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시리즈나 Cambridge Medieval Textbooks 시리즈의 책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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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원
25/07/22 04:04
수정 아이콘
좋은 시리즈 감사드립니다.
다람쥐룰루
25/07/22 07:02
수정 아이콘
로마에서 황제에게 공인받은 여러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가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임명하는 종교가 된것도 재밌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7/22 08:55
수정 아이콘
높아진 권위에 적절한 클레임조작을...
깃털달린뱀
25/07/22 09:14
수정 아이콘
프랑크같은 게르만족이 지배층을 형성했는데도 어째 언어는 죄다 로망스어 계통이라더니 애초부터 지배층도 라틴어 이중언어 구사자였군요. 어쩐지 언어 동화가 너무 완벽하게 됐더라니...
25/07/22 14:22
수정 아이콘
근데 신기하네요 아예 이민족이고 언어계통도 다른데 대부분 이중언어를 구사했다니
예를 들어 우리나라도 한자를 배웠지만 중국어를 다 할 줄 알았던건 아니잖아요?
닉네임을바꾸다
25/07/22 14: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그래봐야 같은 인도유럽어족이라서...습득난이도가 그나마 나았을겁니다
한중일은 서로 어족이 다르다고요
如是我聞
25/07/22 18:48
수정 아이콘
한중일 어족이 서로 다르다니....
그래서 중국 쪽 어족 자원이 고갈되어서 우리 바다로 불법조업오는군요!
Ashen One
+ 25/07/22 19:49
수정 아이콘
중국은 전혀 다르지만, 한일은 어족은 다를지라도 방언 수준으로 비슷한 언어이긴 합니다.
공부해보면 놀랄 정도로 언어가 비슷해요.
제 대학시절 일드 좋아하던 친구가 딱히 공부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만큼 언어 자체는 흡사하죠.
닉네임을바꾸다
+ 25/07/22 19: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뭐 언어동조대라고해서 문법은 비슷하게 가긴 했죠...몇몇 단어는 발음도 비슷하고...
신기한건 바다건너서 언어동조대인데 땅이 연결된 중국하고는 아니라는거...크크
그리고 방언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죠...상호 의사 소통성이 낮으니까...어느정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택도 없는 요건이라...
메가트롤
25/07/22 11:38
수정 아이콘
잘 보고 갑니다
안철수
25/07/22 14:34
수정 아이콘
본문을 기념하여 에픽게임즈에서 문명6 무료 배포 중입니다.
Ashen One
25/07/22 18:18
수정 아이콘
잊고 있었는데 정보 감사합니다. 스팀에 같은 버젼으로 갖고 있지만, 에픽에서 공짜로 받는 맛이 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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