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왕세자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고 한다. 웨일스 왕자가 아니고, 웨일스 공이다. 본디 웨일스 공은 잉글랜드 왕의 신하가 아닌 독립된 국가인 웨일스의 군주를 가리키는 작위다. 그러나 13세기 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하고 그 작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넘겼고, 이로써 웨일스 공은 왕세자의 상징이 되었다. 현 영국 왕 찰스 3세도 즉위 전에는 웨일스 공이었으며, 지금은 찰스의 아들 윌리엄이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영국처럼 왕세자에게 세자 전용 작위를 주는 관례가 있다. 영국에서 보듯, 이런 세자 전용 작위는 국가의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왕권이 미약하거나 통제력이 불안정한 지역에 부여되었다. 왕세자의 상징성을 빌려 그 땅을 나라 안에 잡아두고자 하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림 1 프랑스 왕세자(도팽)의 문장. 가운데 방패에는 프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 문장과 도피네 지역을 상징하는 돌고래 문장이 교차되어 있다. 이를 둘러싼 붉은색의 고리는 프랑스 왕실 최고 훈장인 성령 기사단의 휘장이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프랑스가 왕국이었을 적, 왕세자의 칭호인 도팽도 마찬가지다. 도팽은 말 그대로는 ‘돌고래’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도피네 지역의 영주를 말한다. 영국에서 왕세자에게 잉글랜드에 병합된 웨일스를 맡긴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왕세자에게 도피네를 맡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웨일스는 이미 잉글랜드의 일부가 되었지만, 도피네는 프랑스 왕세자의 영토가 된 뒤에도 한동안 법적으로는 프랑스 바깥,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제후령이었다. 이 제국의 정식 명칭은 ‘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이니, 글 제목대로 프랑스 왕세자는 ‘독일의 제후’였던 셈이다. 이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1378년, 프랑스 도팽 샤를(후의 샤를 6세)은 도팽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제국대리인으로 임명된 적도 있었다!
어쩌다가 신성 로마 제국령이 프랑스 왕세자에게 넘어갔을까? 그리고 그 왕세자는 왜 제국 제후 노릇을 했을까?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역시, 중프랑크 왕국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도피네는 중프랑크 왕국령에서 1032년 신성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가, 1349년부터는 프랑스 왕세자의 영지가 되고, 1457년부터는 프랑스 왕의 직할령이 되었으며, 1789년 프랑스 혁명 때에야 비로소 ‘진짜 프랑스 땅’이 되었다.

그림 2 프륌 조약(855). 부르군디아 왕국이 상하로 나뉘어 있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mpire_carolingien_855-fr.svg)
북해부터 로마까지를 잇는 길쭉한 띠 모양의 중프랑크 왕국. 그 서남단에는 부르군디아 지역이 있었다. 고대 말기, 게르만족의 일파 부르군트족이 정착한 곳이기에 ‘부르군디아’(Burgundia)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의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방부터 스위스 서부를 지나 프랑스 동남부의 도피네(그르노블 일대)·프로방스(마르세유 일대)까지 이어져 있다.
다만 처음 프랑크 왕국이 나뉜 베르됭 조약(843) 때 서부는 서프랑크 왕국이 가져가 훗날 부르고뉴 공국으로 발전했다. 나머지 부르군디아는 로타르 1세가 죽자 아들들 셋이 맺은 프륌 조약(855)에서 다시 갈라졌다. 이때 론 강을 기준으로 상류(로잔·제네바 일대)와 그 지류인 손 강 유역(브장송 일대)은 상부르군디아에 속했고, 중류(리옹·비엔·그르노블·발렌스)와 하류(아비뇽·아를·엑상프로방스·마르세유 등) 일대는 하부르군디아에 속했다. 이 중에서도 비엔·그르노블·발렌스 일대는 훗날 도피네로 불리게 된다.
로타르 1세의 세 아들들 중 둘이 자녀 없이 죽자, 로타르의 동생인 동프랑크 왕 독일인 루트비히와 서프랑크 왕 대머리 샤를은 메르센 조약(870)으로 조카들의 영토를 나누었다. 875년에 루트비히가 죽자 부르군디아 전역이 샤를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877년에는 아들 말더듬이 루이가 이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말더듬이 루이가 879년에 32세로 요절해 어린 두 아들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만 남게 되자, 말더듬이 루이의 외삼촌인 부르군디아의 비엔 백작 보소가 귀족과 주교들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보소를 말더듬이 루이의 후계자로 인정하며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지만, 보소는 카롤링거 가문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카롤링거 일가는 그를 반란자로 간주하고 연합 공격을 준비했다. 루이와 카를로만 형제는 880년 서프랑크를 나눠 가지기로 합의하고, 동프랑크의 뚱보왕 카를과 함께 보소를 공격했다. 이들은 부르군디아 북부를 탈환하고 비엔을 포위했으나 끝내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후 각지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계승자가 점차 사라지면서, 카를이 884년 보소의 프로방스 왕국을 제외한 카롤루스 제국 전역을 통합했다. 그러나 마침내 카를도 887년 죽어 카롤링거 왕조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림 3 9-10세기 부르군트 왕국.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arte_Hoch_und_Niederburgund_EN.png)
부르군디아는 카롤링거 왕조 없는 세상을 맞이했다. 권력 공백 속에서 상부르군디아 귀족들은 888년 벨프 가문의 루돌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서 옛 부르군디아는 세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에 속한 서부는 부르고뉴 공국이 되었고, 중프랑크계 지역은 상부르군트 왕국과 하부르군트 왕국으로 각각 나뉘었다.
프로방스와 부르군트 왕국, 곧 하부르군트 왕국의 보소의 뒤는 어린 아들 루이가 이었고, 루이는 장성한 후 또 다른 도피네 지역의 도시인 발렌스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아직 도피네라는 이름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보소와 루이가 비엔과 발렌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이 지역이 당시 하부르군트 왕국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루이는 황제가 되고서도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왕위를 노리다 패배해, 그 대가로 시력을 잃고 말았다. 루이의 육촌 형제인 아를의 위그가 섭정을 맡아 루이를 대신하면서, 이후로는 아를이 대신 주목받게 된다.
상부르군트 왕 루돌프 2세와 하부르군트 섭정 위그는 이탈리아 왕위를 놓고 다투었고 위그가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위그는 머저르족과 안달루시아 해적의 침입에 고전하던 끝에, 이탈리아 왕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겨우 왕위를 얻은 하부르군트를 933년 루돌프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두 부르군트 왕국은 통합되었고, 2차 부르군트 왕국(고대 부르군트족이 세운 1차 왕국과 구분하기 위한 명칭), 또는 수도가 아를에 있었기에 아를 왕국이라고도 한다.

그림 4 11세기경 신성 로마 제국 지도.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르군트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콘라트 2세 치세에 병합되었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oly_Roman_Empire_11th_century_map-en.svg)
루돌프 2세의 아들 평화왕 콘라트는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토 1세를 자신의 섭정으로 두는 등,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032년, 콘라트의 아들 루돌프 3세가 아들이 없이 죽자, 루돌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2세와 맺은 조약에 따라 하인리히의 후계자 콘라트 2세가 아를에서 아를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렇게 아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또 다른 자치 왕국이 되었고, 황제들은 아를에서 대관식을 열어 따로 아를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현 스위스 서부와 프랑스 동남부를 이루는 아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가 이곳에 발을 들이밀려면 1349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도피네였다.

그림 5 1250년경 사보이·도피네(분홍색)·프로방스 일대의 지도. 알봉(Albon), 그르노블(Brenoble), 브리앙송(Briançon)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avoy,_the_Dauphine_and_Provence_around_1250_(134037781).jpg)
아를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황제는 이 지역을 이탈리아 장악을 위한 거점 정도로 여겼을 뿐 직할 통치를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아를 왕국은 수많은 영주들과 주교후들의 영역으로 쪼개지는 혼란 상태에 놓였다. 이 중 도팽의 근원이 되는 알봉 백작이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비엔 교외 지역, 비에누아의 영주인 알봉의 기그 1세(Guigues I)는 우아장(Oisans, 1035), 그레지보당(Grésivaudan, 1050경), 브리앙송(Briançon, 1053경) 등 주변 영지들을 손에 넣었다. 이와 함께 1035년 이후로는 백작으로 불렸고, 그의 친척들은 그르노블과 발렌스 주교가 되었다. 이후 기그 1세의 자손들은 ‘기그’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했다.
새로 얻은 영지들을 통합하기 위해 알봉 백작이 고른 새 수도는 바로 그르노블이었다. 본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는 비엔이었다. 비엔은 로마의 식민 도시로 시작해 3세기에는 비에넨시스 관구의 수도였으며, 기독교화 후에는 비엔 대주교구가 설치되었다. 비엔 대주교의 권력이 컸기에 알봉 백작은 비엔 대주교를 피해 작은 도시 그르노블을 골랐다.

그림 6 돌고래가 그려져 있는 비에누아의 도팽 문장.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auphin_of_Viennois_Arms.svg).
12세기, 알봉의 기그 4세는 자신의 문장에 돌고래를 그려 넣었고, 그 때문에 르 도팽(Le Dauphi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로 인해 그 자손들은 작위 이름을 알봉 백작에서 비에누아의 도팽으로 바꾸었고, 그 영지는 도피네(Dauphiné)라는 이름을 얻었다. 도팽이라는 작위와 도피네라는 지역 이름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도팽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도피네 내 지역들이 존재했다. 비엔과 발랑스는 주교의 통치 아래 독자적으로 움직였으며, 그르노블에서는 영주와 주교의 권력이 공존했다. 14세기, 움베르 2세(Humbert II, 프랑스어로는 욍베르 또는 욍베르트로 표기되며, 발음도 이에 가깝다)의 치세에 도피네의 수도 그르노블은 점차 성장했다. 1339년에는 그르노블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1340년에는 정의 법정이 그르노블로 이전했다. 이 대학은 현재 그르노블 알프 대학교(UGA)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프랑스 남부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연구 중심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림 7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에게 도피네를 판 도팽, 움베르 2세의 초상화.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auphin_Humbert_II.jpg).
프랑스는 점차 도피네를 비롯한 제국 서부에 영향력을 확대해 갔으며, 사보이 백작과 알프스 영토를 놓고 갈등을 벌인 도팽 움베르 2세가 화의를 맺도록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중재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도팽의 주군인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는 프랑스를 견제하자 움베르 2세에게 아를 왕위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싸우던 사보이 백작 역시 아를 왕국에 속해 있어, 움베르는 아를 왕위를 수락하면 주변과 불가피하게 갈등에 얽힐 것으로 보고 결국 거절했다.
1335년, 움베르 2세가 유일한 아들을 잃었다. 마침 돈도 없던 움베르는 자신의 영지를 팔고자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낸 나폴리의 왕 로베르토, 교황 베네딕투스 12세, 그리고 명목상의 주군인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와 접촉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에 1343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와 협상을 벌여 도피네를 발루아 왕가에 팔기로 했다. 처음에는 필리프의 막내아들 오를레앙 공 필리프에게 주기로 했으나, 1344년에 바꾸어 맏아들 노르망디 공 장(후의 장 2세)을 움베르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림 8 도피네를 프랑스 왕에게 양도하는 움베르 2세. 그림 출처: Alexandre Debelle, “L'Abdication d'Humbert II”. Source: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27Abdication_d%27Humbert_II_(Alexandre_Debelle).PNG)
1349년 3월 30일, 움베르와 필리프는 로망쉬르이제르에서 로망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움베르는 필리프에게 막대한 거금(약 40만 에퀴로 추정)을 받고 도팽에서 물러났으며, 필리프의 손자로 곧 왕이 될 장 2세의 아들인 샤를(후의 샤를 5세)이 새 도팽이 되었다. 이후로 프랑스 왕세자가 도팽 작위를 지니고 도피네를 다스리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에서 도피네는 프랑스 영토가 아닌 독자적인 정체로 취급되었다. 도피네 사람은 기존 지역 특권을 보장받았고, 조세 감면과 독자적인 법이 시행되었다. 이렇게 프랑스 왕가의 땅이지만 프랑스 왕국에 속하지 않는 특수한 지위를 지닌 도피네가 탄생했고, 1349년 7월 16일 샤를이 리옹에서 즉위하면서 발루아 왕가의 초대 도팽이 되었다.
이 매각은 도팽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므로, 도팽의 통치를 받지 않는 비엔 대주교령은 매각 후에도 독립적인 주교후로 남았다.

그림 9 브르타뉴 조약(1360) 후의 지도. 1349년 구매한 도피네 때문에 프랑스 영토가 동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France_at_the_Treaty_of_Bretigny.jpg)
프랑스 왕세자의 영토가 된 도피네의 귀족들은 백년전쟁(1337-1453) 중 프랑스 편에 서 푸아티에 전투(1356)나 아쟁쿠르 전투(1415)에 참전했다. 한편 제국은 프랑스 왕세자가 제국 제후령을 금전을 주고 양도받은 이 사태를 우려했다. 황제 카를 4세는 타협 끝에 1378년, 도팽 샤를(후의 샤를 6세)을 부르군트 왕국의 제국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도피네는 여전히 제국의 지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프랑스 왕세자의 지배 아래 놓이는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1420년, 아쟁쿠르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영국은 프랑스에 트루아 조약을 강요했고, 이에 따라 도팽 샤를(후의 샤를 7세)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게 된다. 프랑스 왕세자 자리는 영국 왕 헨리 5세가 차지했고, 섭정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를 계기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도피네에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하려 시도했다. 그는 황제의 봉신이자 도피네 남쪽에 있는 오랑주 공국을 지배하던 샬롱아를레이(Chalon-Arlay) 가문의 루이 2세를 샤를 6세가 도팽 시절에 맡았던 부르군트 왕국의 제국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이 조치는 프랑스 내전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선량공)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의 이 계획은 현실성이 없었다. 야심만만한 루이는 기회주의적으로 지기스문트, 프랑스 왕 샤를 6세, 선량공 필리프 사이를 오가면서 충성을 바쳤기에, 끝내 그 누구의 신뢰도 받지 못했다.
백년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사보이 공과 오랑주 공을 충동해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도팽 샤를의 봉토인 도피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1430년, 오랑주 공의 군대가 도피네 군에 패하면서 이들의 위협은 무력화되었다.

그림 10 샤를 7세의 초상화. 샤를 7세는 아들 도팽 루이(루이 11세)를 추방하고 도피네를 프랑스 왕의 속령으로 만들었다. 그림 출처: 장 푸케, c.1480.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harles_VII_de_france.jpg)
프랑스 왕세자가 도팽이라는 칭호를 갖게 된 이후, 왕세자들은 대체로 도피네보다 왕국 전체의 정치에 집중했으며, 그 결과 도피네는 방치되어 왕실의 봉토라기보다는 반자치적인 귀족들이 서로 다투는 혼란 지대로 전락했다. 도팽 샤를이 즉위하여 ‘승리왕 샤를’이 되자, 도팽 자리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루이(훗날 루이 11세)는 도피네 귀족들의 다툼을 금지하고,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받았다. 도팽 루이의 치세 중인 1448년에서 1450년 사이, 오랫동안 독립적인 주교후국으로 남아 있던 비엔이 자율권을 포기하고 도팽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르노블 주교와 로망 수도원장도 잇따라 도팽의 권위를 인정했다.
루이는 도피네의 도로망과 시장 체계를 정비하고, 1452년에는 발랑스 대학을 창설하는 등 지역 행정을 개혁하며 도피네를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 샤를 7세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1457년 샤를은 루이를 도피네에서 추방하고 이 지역의 삼부회에 자신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피네는 실질적으로 프랑스 왕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고, 오늘날 1457년은 도피네가 완전히 프랑스에 편입된 해로 간주된다. 이로써 도피네는 더 이상 왕세자의 개인적 봉토가 아니라, 프랑스 왕권이 직접 작용하는 국왕령의 일부로 재편되었다.
황제 지기스문트는 과거 영국 왕 헨리 5세와 도피네 양도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도피네의 법적 지위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또한 도피네는 프랑스의 법제에도 완전히 통합되지 못했다. 1539년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어를 행정 언어로 규정한 빌레르코트레 칙령은 도피네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1540년 도팽 자격으로 별도의 아브빌 칙령을 도피네에 반포한 후에야 유효하게 되었다.
아브빌 칙령은 도피네가 여전히 별개의 법적 공간임을 보여주었다. 도피네는 프랑스 왕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명백한 프랑스의 일부였지만, 동시에 그 칙령은 ‘프랑스 왕’이 아닌 ‘도팽’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도피네가 아직 완전히 왕국에 통합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살펴본 도피네의 역사는, 제국 제후령에서 프랑스 왕세자의 봉토로, 그리고 다시 프랑스 왕의 영토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 총독이 다스리는 땅이 되었음에도, 도피네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제국 제후령에 해당했다. 이는 주민의 소속이 국가가 아니라 봉토에 따라 결정되던 당시 사회 제도의 일면을 보여준다. 국민이 국가를 창설하는 시대가 되어야 이 복잡한 제도가 비로소 청산된다. 그리고 도피네는, 바로 그 전환의 도화선이 된다.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도피네를 완전히 프랑스에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앙시앵 레짐의 모순이 한계에 다다른 프랑스 왕국은, 재정 파탄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 흩어진 세금 특혜 지역을 폐지하고 단일한 과세 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이 세금 특혜의 역사적 배경은 다양하지만, 도피네는 브르타뉴·프로방스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의 땅이지만 프랑스는 아닌’ 지역, 즉 원래 프랑스 왕국의 법적 영토 밖에 있다가 왕에게 귀속된 곳이었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등 제3신분이 성직자 제1신분과 귀족 제2신분을 뒤엎은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제2신분과 제3신분이 손을 잡고 왕에게 대항하는 형태의 봉기도 있었다. 이제 설명할 도피네의 수도 그르노블에서 1788년 6월 7일에 발생한 ‘타유의 날’이 그러했다.

그림 11 타유의 날. 그림 출처: Alexandre Debelle, La Journée des Tuiles à Grenoble, 1889. Sourc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site « classes.bnf.fr » (https://classes.bnf.fr/essentiels/grand/ess_1667.htm)
그르노블은 수공업이 번성한 도시로, 이 시기에는 프랑스 경제 쇠퇴로 주 산업인 사치품 판매가 주춤하면서 점차 귀족, 그 중에서도 프랑스 고등법원의 판사들, 곧 법복귀족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재정장관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은 이 법복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의 대표를 2배로 늘리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처럼 국왕과 정부는 귀족과 제3신분 양쪽의 이해관계에 모두 개입하는 개혁안을 추진했다.
그르노블의 법관들이 도피네 삼부회를 소집하려 하자 프랑스 정부에서는 군대를 보내 이를 해산하려 했다. 그르노블 시민들은 법관들과 연합해 도시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켜 법관들을 연행하려는 군대를 막아섰다. 이때 시민들이 집에 올라가 지붕의 타일을 집어 던졌기 때문에, 이 사건을 프랑스어로 타일을 뜻하는 ‘타유의 날’이라고 한다. 시민들의 봉기로 군대에서 풀려난 법관들은 결국 12일 왕의 명령으로 도시 밖으로 추방되었으나,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령관은 그르노블 밖에서 도피네 사람들이 회의를 열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 12 비질 회의. 그림 출처: Alexandre Debelle, Assemblée des trois ordres du Dauphiné au château de Vizille le 21 Juillet 1788,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ssemblee_des_Trois_Ordres_au_Chateau_de_Vizille_en_1788.png)
도피네 사람들 약 540명은 7월 21일 비질의 죄드폼(테니스의 조상격 스포츠) 경기장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50명의 성직자, 165명의 귀족, 276명의 제3신분 대표들이 참석해 제3신분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이 회의에서 도피네 삼부회와 프랑스 삼부회를 조속히 열 것을 요구했으며, 삼부회 없이는 세금을 낼 수 없다고 결의했다.
더 나아가, 본디 브리엔 재정장관의 개혁안에 원래 포함되어 있었으나 법관들이 철회하려 했던 ‘제3신분의 대표 수 2배 확대’ 조항도 복원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분별로 1표씩 행사하던 전통을 깨고 최초로 1인당 1표씩 행사하는 혁신적인 원칙을 도입해 정치적 대표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전국 삼부회(1789)는 이 원칙을 6개월 뒤 채택한다.
타유의 날은 본디 제2신분과 제3신분의 연합으로 국왕의 명령에 저항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질 회의에서는 제3신분의 대표성을 강화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제2신분이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기 위해 제3신분을 끌어들였다가, 오히려 제3신분이 독립적인 정치 주체로 각성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타유의 날과 비질 회의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혁명 전야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특히 비질 회의는 제3신분의 정치적 대표성 강화와 1인 1표 원칙을 통해 이후 전국 삼부회의 흐름을 미리 예고한 선례로 평가된다. 이 회의에 참여한 변호사 앙투안 바르나브(Antoine Barnave), 장조제프 무니에(Jean-Joseph Mounier), 장폴 디디에(Jean-Paul Didier) 등은 이후 국민의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혁명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림 13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이자, 해체 직전의 도피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auphine_in_France_(1789).svg)
이처럼 그간 프랑스이되 프랑스가 아닌 미묘한 위치에 있던 도피네는, 타유의 날과 비질 회의라는 사건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내부의 복잡다기한 지역들은 전부 ‘프랑스 공화국’이라는 한 나라로 맺어졌고 지역마다 다른 특권들과 법률, 세금은 모두 사라졌다. 도피네 역시 혁명 정부에서 이제르(Isère), 드롬(Drôme), 오트잘프(Hautes-Alpes) 세 데파르트망으로 나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도피네는 이 과정에서 결코 수동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을 이끌며 ‘프랑스 왕의 통치’는 거부했으나 ‘프랑스 국민’이 되는 데에는 앞장섰다.
그 동안 프랑스 왕국은 도피네 등 원래 전통적인 프랑스 왕국 바깥으로 계속 확장했으되, 이 지역을 프랑스 왕의 지배를 넘어서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합병하는 것은 꺼리고 있었다. 이는 이 지역의 원 주인인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국이 유지되는 동안은 봉토는 영주에게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상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결과, 프랑스는 카페 왕가의 소유물이 아닌 프랑스 국민의 것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형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령이던 도피네, 프로방스, 독립 왕국이던 브르타뉴 등은 모두 프랑스 국민이 사는 곳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새롭게 정의된 국민국가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곧 프랑스가 왕정 시대에는 감히 선포하지 못했던 ‘제국의 영토 일부를 정당하게 통합했다’는 주장을, 혁명 정부가 실현한 셈이었다.
프랑스 혁명 정부의 등장은 프랑스 왕국만을 허물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의 상징인 신성 로마 제국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제국은 프랑스 혁명을 분쇄하려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 시도가 실패하자 들불처럼 번지는 프랑스 혁명의 기세를 막고 최대한 제국을 지켜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해, 결국 제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훗날 혁명 정부를 전복하고 제정을 실시한 나폴레옹 정권이 패망한 뒤에도, 혁명 직전의 프랑스 영토는 이제 새로 정의된 ‘프랑스 국민의 프랑스’로 인정받았다. 1789년, 도피네는 더는 ‘왕의 땅’도 ‘신성 로마 제국의 유산’도 아닌, 논란의 여지 없는 프랑스의 일부, ‘순도 100%의 프랑스’가 되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통합 시도는 실패하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도는 성공했다. 도피네의 역사도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프랑크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 프랑스로 만들려 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오직 프랑스 혁명만이, 아래로부터 도피네를 프랑스로 만들었다.
그리고 도피네가 해체된 이후, 각 도시들도 아래로부터 자신을 구성해 나갔다. 이 글에서는 옛 도피네에서 가장 큰 도시인 그르노블의 예를 들고자 한다.

그림 14 그르노블 대학교 주 캠퍼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maine_universitaire_Grenoble.jpg)
그르노블 대학은 1339년 도팽에 의해 설치된 중세 대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현대적 대학으로 탈바꿈한 것은 19세기 산업화와 함께였다. 20세기 들어 그르노블은 주변 연구 거점들과 연계하며 과학기술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그르노블 대학교도 이에 발맞춰 과학 연구 중심 대학으로 변모해갔다.
1968년에는 68운동의 여파로 과학기술의 조지프 푸리에 대학, 사회과학의 피에르 망데 대학, 인문학의 스탕달 대학으로 분할되었지만, 2016년 이들 대학이 다시 통합되어 오늘날의 그르노블 알프 대학교(UGA)가 되었다. 이후 연구 성과와 국제화를 통해 2023년 상하이 대학 랭킹에서 프랑스 고등교육기관 중 5위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는 UGA가 프랑스 정부의 엘리트 대학 육성 사업(IdEx)에 선정된 것도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프랑스 대학이면서도 비교적 많은 외국인들이 캠퍼스로 들어오는 등 개방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다. UGA는 세계 유수의 정치인들과 과학자들을 배출했으며, 20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제라르 무루도 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일본의 마사코 황후도 이곳에서 유학하며 학문적 연을 맺었고,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잠깐 이곳에 적을 두었었다.
UGA는 1339년 도팽이 창설한 대학의 전통을 기념하지만, 오늘날의 위상은 1789년 이후 산업화와 과학기술 성장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르노블 시민들도 사회-학생-대학 연계, 수많은 스타트업 양성 등으로 적극 참여하여 지금과 같은 세계 경쟁력 있는 대학교를 만들어냈다.

그림 15 1968년 그르노블 동계 올림픽 개막식.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ade_olympique_-_Grenoble_1968.jpg)
그르노블은 1968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도 세계에 알려졌다. 최초로 컬러로 중계되었고, 전자 시간 기록 장치와 도핑 검사가 처음 도입되는 등, 첨단 과학기술의 쾌거를 알린 올림픽이기도 했다. 진보된 기술장비를 도입하여 대규모 인공 시설을 활용하기도 했으나, 이는 현재에는 애물단지로 남은 경기장을 남겨 과학기술의 진보가 도시 발전의 모든 해답은 아니라는 교훈도 함께 남겼다.

그림 16 현대의 도피네. 초록색은 이제르, 카키색은 드롬, 청록색은 오트잘프 데파르트망. 노란색은 현재의 이탈리아에 속한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arte_du_Dauphin%C3%A9.svg)
도피네에서 갈라져 나온 세 데파르트망, 이제르, 드롬, 오트잘프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오트잘프는 프랑스에서 제일 높은 도시인 알프스 산맥의 브리앙송이 있는 곳으로, 프랑스가 알프스 너머까지 품은 야심이 끝내 멈춘 곳이기도 하다. 주도 가프는 알프스 산맥과 산기슭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특히 남쪽의 프로방스로 통하면서 오트잘프 데파르트망은 이제르나 드롬과 달리 프로방스알트코프다쥐르 레지옹에 속하게 되었다.

그림 17 왼쪽부터 이제르, 드롬, 오트잘프 주의 문장. 모두 도팽의 돌고래가 들어가 있다.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lason_d%C3%A9partement_fr_Is%C3%A8re.sv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lason_d%C3%A9partement_fr_Dr%C3%B4me.sv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lason_d%C3%A9partement_Hautes-Alpes.svg). 이 그림은 세 그림을 합하여 편집했음.
드롬의 주도 발랑스는 한때 루이 11세가 세운 대학교가 번창했지만, 종교개혁과 위그노 추방의 여파로 쇠퇴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대학이 폐쇄되었다. 오늘날 발랑스는 19세기에 철도망의 형성과 함께 마르세유와 파리를 잇는 주요 경유지가 되었고, 20세기에는 대학도 복구되어 현재는 UGA의 일원이 되었다.
도피네는 한때 중프랑크 왕국 서남부에 속했고, 부르군트 왕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 점차 프랑스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도피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왕과 영주가 아니라 도피네 사람들이었다. 중프랑크 왕국을 그 구성원들이 한편은 베네룩스로, 한편은 스위스로, 한편은 독일과 프랑스로 나뉘어 재정의했듯, 도피네 역시 위로부터의 결정에 따르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소속을 정의해 나갔다. 그렇게 프랑스 왕세자의 땅, 왕의 땅이던 도피네는 마침내 프랑스 땅이 되었고, 도피네 사람들은 프랑스 국민이 되기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