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4/15 12:04:19
Name Poe
Subject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7
8. 질문지, 질문지, 질문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를 가진 아동들이 재활 치료라는 걸 시작하려면 진료부터 봐야 한다. 어느 병원이든 마찬가지다. 진료에 따라 재활 프로그램 자체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움직이지 않는 근육을 움직이게 해 주고, 기능하지 않는 신체 기관을 기능하게 해 주는 것이기에 세부 내용과 진행 순서 등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쓰는 도구나 방법론은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전국 어디든 재활실마다 분위기나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다.

게다가 진료라는 것도 대부분 설문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역시 대동소이하다. 의사가 아이를 이리저리 살펴서 병명을 정답지처럼 딱 내주기를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동이 평소 보이는 행동이나 발달 과정에 대해 묻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부모가 먼저 작성해야 한다. ‘이름을 부르면 쳐다보나요?’, ‘두 손가락으로 콩을 집을 수 있나요?’, ‘계단을 5개 이상 혼자 오를 수 있나요?’, ‘니은이나 디귿과 같은 자음을 발음할 수 있나요?’, ‘엄마를 쳐다보면서 엄마라고 부르나요?’

아내가 하도 이 센터 저 병원을 돌아다니는 통에 우리는 이런 질문지들을 꽤나 많이 작성했어야 했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어차피 아기 상황을 의사가 판단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모에게 묻는 형국이고, 그 진료 결과에 따라 재활 프로그램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센터나 병원에 갈 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니 짜증이 났다. 게다가 우리 아이의 경우 ‘진료 결과’라고 할 만한 게 나온 적도 없었다. 다들 “너무 어려서 확정할 수 없고, 더 지켜봐야 한다”는 답을 이리저리 다양한 표현으로 할 뿐이었다. 나중에는 의사가 뭐라고 할지 예상한 채 진료실에 들어갔고, 토씨 한두 개 틀린 것에 불과한 답을 2분 만에 듣고 나오기도 했다.

어느 날 접수대에서 비슷한 질문지를 받아 들고 온 아내한테 애꿎게 짜증을 냈다.
“또 질문지야? 이번 의사 레퍼토리 내가 맞춰볼까? 아니, 당신도 다 알지 않아?”
노련한 아내는 이미 진작부터 내가 풍겼던 분위기를 통해 내가 짜증 낼 걸 감지했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질문지를 꾸역꾸역 채워나갔다. 나의 짜증은 독백이 됐다.
“이럴 거면 진료 결과를 병원들끼리 공유하고, 부모들이 집 근처 재활 센터만 가게 하면 얼마나 좋아? 이게 뭔 낭비야?”

아내는 날 다룰 줄 알았다. 질문지에 시선을 두고서, 내 짜증에 질문으로 답했다.
“막내가 손가락을 쓰기는 하지?”
아이는 뭘 들고 있질 못했다. 장난감을 눈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걸 쳐다보면서 움키려고 손을 허우적거려야 정상인데, 우리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장난감에 시선도 주지 않았고, 따라서 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천장의 전등만 응시했다. 빛 외에는 외부 자극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러니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해서 손에다 장난감을 쥐어주면 그제야 그걸 잠깐 쳐다봤는데 손에 힘이 없어 놓치기 일쑤였다. 놓친 장난감은 아이의 시야 밖으로 떨어졌고, 아이는 다시 멍한 상태가 됐다. 아내는 그 잠깐 장난감 쥔 순간들을 머릿속으로 전부 그러모아서 ‘손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희망으로 치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내 짜증을 일찍부터 감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아내의 그 말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소망을 붙들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병원의 어느 질문지에든 우리가 제출한 답은 대부분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였고, 그걸 매번 우리 스스로 답을 적어가며 재확인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아니요, 우리 아이는 아직 부모를 알아보지 못해요.’
‘아니요, 우리 아이는 아직 엎드리지 못해요.’
‘아니요, 우리 아이는 아직 움직이지 않아요.’

질문지를 열 때마다 홍수 같이 쏟아지는 현실 앞에서 난 비효율적인 의료 시스템에 대한 짜증으로 버티고 있었고, 어느 새 엄마가 된 이 작은 여자는 반드시 찾아올 파도타기의 때를 기다리듯 소망의 줄기를 더듬으며 견디고 있었던 것을 그때 알았다. 매번 ‘아니요’라던 답이 하나라도 ‘예’라고 바뀌는 순간들을 얼마나 기대하면서 질문지를 풀었을까.

하지만 진료는 정확해야 했고, 난 아내의 희망을 다음으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가지고 할 수 있다고 하기는 힘들지. 막내는 아직 손 못 써.”
“... 그렇지?”
“하지만 될 거야. 우리 계속 기도하고 있잖아.”
“빨리 이 질문지 작성이 힘들어졌으면 좋겠다. 지금은 다 ‘아니요’라서 너무 쉬워.”
솔직히 그때 난 마음속으로 ‘그날이 올까?’라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막내처럼 조용히 순서를 기다렸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5/04/15 12:12
수정 아이콘
항상 쉽지않은 이야기들을 잘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5/04/15 12:51
수정 아이콘
기도에 응답받길 바랍니다.
25/04/15 13:46
수정 아이콘
그날이 오도록 기원드립니다
25/04/15 14:04
수정 아이콘
같은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날이 오시기를
25/04/15 14:30
수정 아이콘
행복한 순간만이 있길 바랍니다.
Cazellnu
25/04/15 15:05
수정 아이콘
의사가 아이 처음 몇분보고 뭘 안다고 판단을 하는게 더 위험하죠.

희망과 이성이 공존하면서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교차되는게 일종의 괴로움입니다.
해바라기
25/04/15 18:44
수정 아이콘
저도 같이 기도할게요!
젤리곰
25/04/15 19:39
수정 아이콘
힘든 시간들이실텐데 담담하게 잘 풀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분의 노력이 꼭 좋은 결과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25/04/15 20:05
수정 아이콘
질문지...정말 공감되네요

그나마 어릴땐 되고 안되고 명확하던 것들이 아이가 자랄때마다 대답하기 모호한 문항이 더 늘어나는데다가 o,x 만 있고 중간이 없기에 저같은 선택장애 엄마는 갈수록 빡침이 올라오는 경험을 하게됩니다.하물며 복지관 같은곳은 공공기관이라 이해는 하지만서도 계속 이어서 하는 그룹 프로그램인데도 해마다 또 검사를 받고 똑같은 설문을 하고 그러다보니 진절머리가 나요

불과 지지난달 대학병원서 5년만에 토탈검사를 받을 일이 있었는데 진료 1주전 집으로 엄청난 서류 뭉치가 날아와서 애 자는 새벽시간에 졸면서 신생아때부터의 기억을 되살려 15년치를 작성하고 메일로도 작성하고 한달 기다린 검사결과는 내가 평소 아이를 보며 판단했던거와 달리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고...전 아마도 이게 마지막 검사가 되지않을까 생각은 합니다만 두분은 아직 열심히 달리실 구간이죠.

아이의 혼자 남을 미래를 생각하면 솔직히 불안하고 깜깜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 개인으로서의 일상은 주변에서 생각하는것보다는 아이로 인해 행복할때가 훨씬 더 많아요.어떤 아이든 자식이 주는 기쁨은 형태만 다소 다를뿐 똑같은것 같아요.조금 다른 행복이 있고 조금 다른 어려움이 있고...
뭐 저는 그렇네요 ^^;;

항상 응원드리고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일반] [공지]자게 운영위 현황 및 정치카테고리 관련 안내 드립니다. [28] jjohny=쿠마 25/03/16 15186 18
공지 [정치]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300382 0
공지 [일반]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54680 10
공지 [일반]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57291 3
104075 [일반] 대화의 방식 : SRPG와 RTS [30] 글곰4583 25/04/15 4583 14
104074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7 [9] Poe3561 25/04/15 3561 33
104073 [일반] 서울대 교수회가 제시한 "대한민국 교육개혁 제안" [74] EnergyFlow8984 25/04/15 8984 3
104072 [일반] “내 인생은 망했다, 너희는 탈조선해라”…이국종 교수, 작심발언 왜? [338] 궤변14235 25/04/15 14235 22
104071 [일반] 런린이가쓰는 10km 대회 준비&후기 [12] Jane4456 25/04/15 4456 5
104070 [일반] Nothing Happens. [4] aDayInTheLife2934 25/04/14 2934 6
104068 [일반] [역사] IBM이 시작해 도시바가 완성한 저장장치 / 저장장치의 역사 [16] Fig.12951 25/04/14 2951 6
104067 [일반] 현대차의 자율주행 기술은 어느정도 일까요? [74] 또리토스5975 25/04/14 5975 0
104065 [일반] 최근 보는 웹소설들 [33] 비선광6285 25/04/14 6285 3
104064 [일반] 오늘자 시총 10조 코인 먹튀 발생... [56] 롤격발매기원12980 25/04/14 12980 4
104063 [일반] 기억나는 가게 손님들 이야기. [14] 인생의참된맛5809 25/04/13 5809 6
104062 [일반] [웹툰]로판인가? 삼국지인가? '악녀는 두번 산다' 추천 [17] 카랑카5816 25/04/13 5816 1
104061 [일반] 스스로 뒤통수 후리게 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겨자의 낭만 [3] Poe5236 25/04/13 5236 21
104060 [일반] 남북통일이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한 이유 [126] 독서상품권9969 25/04/13 9969 2
104059 [일반] 제67회 그래미 어워드 수상자 [10] 김치찌개5491 25/04/13 5491 2
104058 [일반] [서평]《출퇴근의 역사》 - 통근을 향한 낙관과 그 이면 [2] 계층방정3009 25/04/12 3009 5
104057 [일반] 나스닥이 2프로 가까이 오른 어제자 서학개미들 근황 [35] 독서상품권9532 25/04/12 9532 0
104056 [일반] [역사] 한국사 구조론 [27] meson5733 25/04/12 5733 11
104055 [일반] 오사카에서 찍은 사진들 [14] 及時雨5172 25/04/12 5172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