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계엄(戒嚴)의 경계할 계(戒)를 다뤘다. 오늘은 계엄의 나머지 한자, 엄할 엄(嚴)을 이야기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嚴은 바위 암(嵒)의 뜻과 감히/구태여 감(敢)의 뜻과 소리를 합한 형성자고, 敢은 논란이 많으나 일단은 돼지 시(豕)와 오른손을 나타낸 또 우(又)의 뜻과 달 감(甘)의 소리를 합한 형성자다. 즉 嚴은 甘의 2차 형성자다.
嚴은 금문에서 그 자원이 드러난다.
왼쪽부터 嚴의 금문 1, 2, 3, 초계 문자, 고문, 소전. 출처: 小學堂
《설문해자》에서는 嚴을 “가르치는 명령이 급함이다. 부르짖을 훤(吅)의 뜻을 따르고 험준할 음(⿸厂敢)이 소리를 나타낸다.”라고 풀이한다. 즉 敢의 윗부분을 덮은 부분을 언덕 한(厂)으로 본 건데, 금문에서는 이 한자의 중간이 삐죽하게 솟아 있어 메 산(山)으로 보인다. 그리고 입 구(口)가 2개 있는 게 보통이지만 3개를 쓰기도 한다. 그러므로 敢의 윗부분을 덮고 있는 한자는 입 구(口) 세 개가 겹친 물건 품(品) 밑에 山이 있는 바위 암(嵒)이 된다.
추 시구이의 풀이에 따르면, 嵒은 口가 모여서 대중의 말이 많음을 나타내고, 敢은 허탄할 함(譀)의 초문으로 과장된 말을 뜻한다. 이 둘을 합해서, 원래는 말이 많고 과장된다는 뜻인데, 이에서 말이 장엄하고 엄중하다는 뜻이 인신되었다.
嚴은 금문부터 지금의 뜻인 엄중, 장엄의 뜻으로 쓰였다.
嚴은 소전을 거치면서 와전되었지만 그래도 금문은 분석하기 쉬운 편인데, 敢은 더 어렵다. 우선 갑골문이 지금의 敢의 짜임이 아니다.
왼쪽부터 敢의 갑골문 1, 2와 2를 해서로 바꾼 것. 출처: 小學堂
갑골문에서 敢은 돼지 시(豕)와 그 돼지를 잡는 도구로 되어 있으며, 이 도구를 잡는 손도 보인다. 돼지는 흉포한 짐승을 상징하며, 그 짐승을 도구를 잡고 사로잡으려 하는 모습에서 용감함, 과감함이란 뜻이 나왔다. 감히, 구태여란 뜻은 이에서 다시 인신된 것이다.
왼쪽부터 敢의 금문 1, 2, 3, 진(晉)계 문자, 제계 문자, 연계 문자, 초계 문자, 진(秦)계 문자, 고문, 주문, 소전, 예서 1, 2. 출처: 小學堂
금문은 갑골문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다 그 구성 요소도 난잡하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다. 허신은 《설문해자》 소전을 기초로 해서 예 고(古)가 소리를 나타내고 손이 마주보는 ⿱爪又가 뜻을 나타낸다고 설명했고 한국의 한연수 교수도 이 설을 따랐다.
그러나 금문에서 敢이 들어가는 형성자인 嚴의 금문 1처럼 古를 구성하는 口가 아예 없는 한자도 있기 때문에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러 금문에서는 이 부분이 口가 아니라 달 감(甘, 금문 1) 또는 갑골문의 돼지 잡는 도구의 형상(금문 2)을 하고 있기 때문에, 허신이 손톱 조(爪)로 본 부분은 돼지 시(豕)가 일그러진 것이고 돼지 잡는 도구가 변형돼 소리를 나타내는 甘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무기나 사냥 도구를 본뜬 글자인 홑 단(單) 같이 보이기도 한다.
敢의 금문 중 하나. 돼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듯하다. 출처: 小學堂
敢은 전국시대에 들어서도 풍부한 용례가 있어 전국시대의 다섯 계통 한자에 모두 남아 있는데, 금문의 난잡한 모습이 점차 정리되면서 《설문해자》의 고문이나 주문, 소전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
지금의 敢은 소전이 아니라 주문을 이어받았는데, 豕와 甘이 뭉개져서 마치 한글 티읕 밑에 달 월(月)을 받친 듯한 모습이다. 이게 예서에서 더 뭉개져 장인 공(工)과 귀 이(耳)가 합쳐진 듯한 글자가 됐고 又도 변형돼 지금의 모습이 됐다.
敢에서 소리를 나타내는 달 감(甘)의 자원도 살펴보자.
왼쪽부터 甘의 갑골문, 금문, 진(晉)계 문자, 초계 문자, 소전, 예서 1, 2. 출처: 小學堂
甘은 갑골문에서부터 나타나는 오래된 한자다. 지금은 입 구(口)와 많이 달라졌지만, 원래는 口 안에 점이나 가로줄을 더한 한자였다. 옛날 口는 네모가 아니라 한글 비읍처럼 생겼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소전까지도 그 형태를 유지했지만, 예서 2에서부터 입 구(口)의 위쪽 가로 획이 길게 삐져나와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본디 입 안에 무엇을 문다는 것을 나타낸 甘은, 그 문 것의 맛을 본다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에서 달다는 뜻이 나온 지사자다. 미각 중에 제일은 단맛이었나 보다.
달 감(甘, 감미(甘味), 고진감래(苦盡甘來) 등. 어문회 4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甘+土(흙 토)=坩(도가니 감): 감과(坩堝: 도가니) 등. 인명용 한자
甘+手(손 수)=拑(입다물 겸): 겸구(箝口/拑口/鉗口), 겸마(箝馬/拑馬) 등. 인명용 한자
甘+豕(돼지 시)+又(또 우)=敢(감히/구태여 감): 감청(敢請), 용감(勇敢) 등. 어문회 4급
甘+木(나무 목)=柑(귤 감): 감귤(柑橘), 밀감(密柑) 등. 어문회 1급
甘+水(물 수)=泔(뜨물 감): 미감(米泔: 쌀뜨물), 미감수(米泔水: 쌀뜨물) 등. 인명용 한자
甘+疒(병들어기댈 녁)=疳(감질 감): 감질(疳疾), 하감(下疳) 등. 어문회 1급
甘+糸(가는실 멱)=紺(감색/연보라 감): 감청(紺靑), 석감청(石紺靑) 등. 어문회 1급
甘+邑(고을 읍)=邯(조나라서울 한|사람이름 감): 한단(邯鄲), 강감찬(姜邯瓚) 등. 어문회 2급
甘+酉(닭 유)=酣(술즐길 감): 감흥(酣興), 반감(半酣) 등. 어문회 특급
甘+金(쇠 금)=鉗(집게 겸): 겸자(鉗子), 곤겸(髡鉗: 머리를 깎고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 등. 어문회 준특급
甘+黑(검을 흑)=黚(검누를 겸): 인명용 한자
拑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拑+竹(대 죽)=箝(재갈 겸): 겸구(箝口/拑口/鉗口), 겸마(箝馬/拑馬) 등. 어문회 준특급
敢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敢+木(나무 목)=橄(감람나무 감): 감람(橄欖), 감람석(橄欖石) 등. 어문회 준특급
敢+目(눈 목)=瞰(굽어볼 감): 감제고지(瞰制高地), 조감(鳥瞰) 등. 어문회 1급
敢+喦(바위 암)=嚴(엄할 엄): 엄격(嚴格), 계엄(戒嚴) 등. 어문회 4급
敢+門(문 문)=闞(범소리 함, 바라볼 감): 감택(闞澤: 삼국시대 오나라의 학자) 등. 급수 외 한자
嚴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嚴+人(사람 인)=儼(엄연할 엄): 엄연(儼然), 윤엄(尹儼) 등. 어문회 1급
嚴+山(메 산)=巖(바위 암): 암석(巖石), 화강암(花岡巖) 등. 어문회 준3급
嚴+日(날 일)=曮(해다닐 엄): 조엄(趙曮: 조선 시대의 인물로, 일본에서 처음 고구마를 들여옴) 등. 인명용 한자
嚴+犬(개 견)=玁(오랑캐이름 험): 험윤(玁狁/獫狁) 등. 어문회 특급
闞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闞+目(눈 목)=矙(엿볼 감): 특급 한자
甘에서 파생된 한자들.
달 감(甘), 감히/구태여 감(敢), 엄할 엄(嚴) 이 세 한자는 뜻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소리는 비슷하다. 혹시라도 이 셋의 뜻 사이에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甘은 달다는 뜻의 원시중국티베트어 *s-klum에 어원을 두며, 머금을 함(含), 달 첨(甛), 귤 감(柑) 등과도 연관된다. 상고한어로는 벡스터-사가르에 따르면 /*[k]ˤ[a]m/으로 발음했다.
敢은 '감히 ...한다'는 뜻의 원시중국티베트어*s/m-wam에 어원을 둔다. 상고한어로는 벡스터-사가르에 따르면 /*[k]ˤamʔ/으로 발음했다.
嚴은 티베트어로 장엄함을 뜻하는 རྔམ་པ་ (rngam pa), 티베트어로 높음을 뜻하는 རྔམས (rngams)와 동계어이며, 발판, 골격을 뜻하는 버마어 ငြမ်း (ngram:)도 동계어일 수 있다. 상고한어로는 벡스터-사가르에 따르면 /*ŋ(r)am/으로 발음했다.
이렇게 상고한어로는 셋의 소리가 비슷해서 甘이 나머지 둘의 소리를 맡게 되었지만, 중국어의 친척 언어들과 비교해 보면 그 전에는 조금 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甘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대부분 단순히 甘의 소리만을 썼지만, 일부는 달다는 뜻을 따랐다.
柑(귤 감)은 木(나무 목)의 뜻을 따르고 甘이 소리를 나타내며, 甘의 뜻을 따라 단 나무 열매인 귤을 뜻한다.
酣(술즐길 감)은 酉(닭 유, 酒(술 주)의 원형)의 뜻을 따르고 甘이 소리를 나타내며, 甘의 뜻을 따라 술을 달게 즐김을 뜻한다.
嚴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엄하다, 크고 높다는 뜻을 따른다.
儼(엄연할 엄)은 人(사람 인)의 뜻을 따르고 嚴이 소리를 나타내며, 嚴의 뜻을 따라 사람이 위엄이 있어 공경할 만함을 뜻한다.
巖(바위 암)은 山(메 산)의 뜻을 따르고 嚴이 소리를 나타내며, 嚴의 뜻을 따라 산의 위엄을 보이는 높은 언덕, 바위를 뜻한다.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甘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嚴은 嵒(바위 암)의 뜻과 敢(감히/구태여 감)의 소리를 딴 형성자고, 敢은 豕(돼지 시)와 又(또 우)의 뜻과 甘의 소리를 딴 형성자다. 甘은 입 안에 단 것을 문 모습을 딴 지사자다.
甘에서 坩(도가니 감)·拑(입다물 겸)·敢(감히/구태여 감)·柑(귤 감)·泔(뜨물 감)·疳(감질 감)·紺(감색/연보라 감)·邯(조나라서울 한|사람이름 감)·酣(술즐길 감)·鉗(집게 겸)·黚(검누를 겸)이 파생되었고, 拑에서 箝(재갈 겸)이, 敢에서 橄(감람나무 감)·瞰(굽어볼 감)·嚴(엄할 엄)·闞(범소리 함, 바라볼 감)이 파생되었고, 嚴에서 儼(엄연할 엄)·巖(바위 암)·曮(해다닐 엄)·玁(오랑캐이름 험)이, 闞에서 矙(엿볼 감)이 파생되었다.
甘은 파생된 한자들에 달다는 뜻을, 嚴은 파생된 한자들에 위엄이나 높다는 뜻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