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북유럽 삼국의 민족학교 등지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10세기 무렵 바이킹의 삶을 체험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가지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커리큘럼에는 바이킹의 롱하우스 건축 체험,
롱쉽 항해체험, 바이킹 의복 제작 작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귀여운 공예품들도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은 아주 평화롭다.
이런 체험학습을 제공하는 학교들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바이킹 문화는 기실 농부, 어부, 그리고 장인들로 이루어진 비폭력적인 문화라고 한다.
...사실일까?
확실히 근래의 수정주의적 접근은, 천년묵은 고정관념과 달리 바이킹들의 (덜 주목받았던) 평화로운 모습을 강조했고, 또 그런 평화로운 생활상 또한 바이킹 문화의 일면임이 분명하다.
바이킹들의 문헌에 따르면 바이킹들은 실로 젠틀맨이었다.
칼과 도끼보다는 분명, 전통과 명예가 존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바이킹의 평화로운 모습(무역이나 문화적 성취, 탐험과 개척, 정착과 교류 등) 뿐만아니라, 바이킹의 잔혹한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잔혹함에 대한 묘사는 보통 외부인들, 그리고 피해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를테면 철저한 약탈과 방화에 대해 보고한 기독교 수도승(修道僧)들의 기록에서...
만일 바이킹 체험학습이 이러한 피해자들의 의견도 조금 존중하는 방식으로 수정된다면 어떨까?
일단 돼지나 말의 머리를 절단한 뒤, 연회장 한가운데에 돌려 보이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해안가를 약탈한 직후엔 십자가를 숭배하는 '이교도' 수도승의 머리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참수는 보통 도끼나 칼로 목을 쳐냄으로써 이루어졌는데, 동맥이 시원스레 끊어지면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광경을 연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희생들은 오딘을 위해 바쳐지는 영광을 얻게 된다.
롱쉽 항해 체험학습 뒤에는, 해안가에 내린 학생들이 각종 향정신성 식물을 섭취하는 커리큘럼이 배치되어야하는데, 이는 강렬한 환각을 일으켜 학생들을 뛰어난 광전사로 개조시키기 위함이다. 바이킹의 약탈은 속도가 생명이었고, 재빠르게 인근의 민가나 수도원 등을 치고 빠져야했다. (약간의 짬이 난다면 적절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반격할 사기를 꺾기 위해 살아남은 몇몇 민간인들이나 성직자들을 말뚝에 산채로 박아놓는 변주를 줄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피해자 입장을 반영한 체험학습이 시행된다면, 어느 나라에서건 관련자들은 구속을 면치 못할 것인 바, 우리나라에서라면 야간주거침입절도죄, 특수절도죄, 특수강도죄, 강도강간죄, 해상강도죄, 강도살인죄에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 범죄단체조직죄... 등 이루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여러 범죄 사실이 인정될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이킹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볼 수는 없겠지만, 상상해볼 수는 있다.
바이킹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바이킹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바이킹들이 가졌던 심성은,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생겨먹었길래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오늘날까지 갖게된 것일까?
오늘은 그 첫번째 주제, '바이킹 약탈의 원인'이다.
# 약탈과 정복 사실에 대한 간략한 기술
바이킹의 약탈은 8세기 후반 무렵, 브리튼 제도와 프랑스 서부 해안 등지에 모습을 드러내며 시작되었다.
9세기 초엔, 본격적인 대규모 습격이 시작되었는데 이런 습격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가 시작되는 11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습격은 점차 정착으로 전환되었다.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지역, 잉글랜드 동북부의 데인로 지역, 아일랜드의 더블린 지역,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헤브리디즈 제도,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맨섬과 앵글시 섬이 곧 그들의 새로운 근거지가 되었다.
습격과 정착은 해로와 수로를 따라 더 먼곳까지 이어졌다. 이슬람 세력이 통치하며 번영하던 화려한 도시들이 잇달아 불탔다.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의 운없는 해안가 도시들 운명도 그와 비슷했다. 동쪽으로 간 바이킹(바랑기아인)들은 강을 거슬러 오늘날의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대에 키예프 루스, 폴로츠크 공국, 투로프 공국 등을 세웠다.
바이킹의 롱쉽은 세계 너머에까지 닿았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빈란드가 새롭게 개척되었다. 바이킹들이 기실 콜럼버스 이전 최초의 신대륙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열거해보면 의문이 더 구체화된다.
이들은 왜 약탈을 시작했을까?
세상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만큼의 폭력, 그리고 그로인한 끝모르는 재물의 획득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자손 대대로 목숨을 바쳐 8세기말부터 11세기까지, 무려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순조 시기부터 오늘날까지가 딱 200년이다) 남이 일군 것을 빼앗는 데에 열중했던 것일까?
1. 배고파서
가장 전통적인 설명은, 바이킹들이 배고파서 약탈했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자연환경은 척박했고, 농경지와 목초지는 늘상 고갈 상태였다. (중세 온난기의 따스한 기후로 인해 증가한 인구수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힘든 시기에 놓인' 바이킹들은 '어쩔 수 없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떠났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무려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생캉탱의 두도(Dudo of Saint-Quentin)라는 11세기 노르망디의 역사가는 자신의 저서(Historia Normannorum)에서 북구인들이 무분별한 성관계를 행해 무수히 많은 자손을 낳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필연이었다고 서술했다. 두도의 관점은 바이킹들에 대한 다소의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이킹들의 초기 습격은 오로지 약탈에만 치중되어있었고, 토지를 획득하고 영구적으로 정착하는 데에는 한동안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인구문제는 바이킹의 꾸준한 습격에 대한 한가지 동인이 될 수는 있어도,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약탈의 여정을 떠났다.
2. 종교적 열망
어쩌면 종교적 열망때문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도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연대기에서 바이킹들은 종교적 광신자들로 묘사된다. 그들에 의해 수없이 많은 교회와 모스크가 불살라졌다. 수없이 많은 성직자들이 살해당하고 말뚝에 박혔다. 이는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졌다.
그러나 생각이 유연하고 비도덕적이기까지 한 북구의 신들 입장에서는 잔혹한 이 광경이 그저 유쾌한 복수의 한 장면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기실 바이킹의 첫 습격이 있기 이전까지, 오늘날의 북부 독일 지역의 색슨족은 30여년간 이어진 카롤루스의 성전에서 처참히 학살당하고 기독교로 강제 개종당했다.
신성한 나무는 그 뿌리가 뽑혔고, 우듬지는 비스듬히 누운 채 불티를 뿜어냈다.
얼마 지나지않아 덴마크의 왕 구드프레드(Gudfred)는 카롤루스가 통치하는 프리슬란트 지역에 수백 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그는 스스로를 작센과 프리슬란트의 정당한 통치자로 선포했다. 프리슬란트 군도의 지역 수비대는 모두 패퇴했고, 주민들은 철저히 약탈당했다. 그러나 구드프레드가 본국에서 암살당하자, 바이킹들의 복수는 짧게 끝났다.
바이킹들의 이 복수가, 정말로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의 바이킹들은 카롤루스 대제의 영토보다 브리튼 제도 약탈에 더 열을 올렸다.
그들은 복수심에 불탔다기보다는, 그저 교활한 신들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일 수 있다.
또한 색슨족이 믿었던 그 신앙이 북유럽 바이킹들이 믿었던 것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는지, 그들끼리 얼마나 깊은 종교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바이킹들은 생각보다 현실적이었고, 종교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가졌다. 이들이 훗날 누구보다 재빠르게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1세기 아이슬란드의 개종은 이들이 종교에 대해 갖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률자문인(Lawspeaker)이자 족장이었던 토르게르(Thorgeir Ljosvetningagodi)는 오랜 묵상 끝에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결정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북구신들을 위한 희생제의나 영아 살해의 전통 또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새롭고 합리적인 신앙과 오랜 전통은, 바이킹들에겐 양립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이와 같은 바이킹의 '종교적 유연성'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는데, 십자가와 함께 묻혀있는 토르의 망치 부적이나 기독교식 고분과 이교도식 화장터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것 등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3. 혼란을 틈타 (무역, 혼란, 선박)
바이킹들은 늘상 굶주렸거나 종교적 광신에 차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약탈자로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다. 무역 전통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뛰어난 선박 건조 기술이 바로 그것들이다.
바이킹과 무역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역은 약탈과 상호보완적이었으며, 전쟁군주들이 그의 젊은 추종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었다. 무역은 9세기 초반에 시작된 바이킹들의 습격보다 더 이전부터 이루어졌고, 9세기 중반에는 여기에 약탈이 더해져 '노예'라는 획기적인 상품이 추가되었다.
바이킹의 노예 무역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하나로 묶은 뒤 동방의 실크로드와 연결지었다. 무역과 약탈 사이의 상호작용은 향후 수백년간, 피로 점철된 지리상의 발견과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사로 되풀이될 것이다.
8~9세기의 유럽은 정치적으로도 혼란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들은 서로 반목하며 제국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았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도 여러 정치체들이 난립하며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
바이킹들이 앵글로색슨인들의 왕국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을 때, 그곳에는 일곱 개의 왕국들이 존재했다. (Heptarchy)
언제 어디서나 뛰어난 족장의 비명횡사와 좌절한 실업자들의 대량발생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했다.
그리고 그 배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참나무의 나뭇결을 따라 쪼갠 판자가 클링커 방식으로 겹쳐져 용골을, 가벼운 가문비나무가 스트링거를 형성하여 매우 안정적인 동시에 유연한 항해를 가능케 했다.
종합하자면, 이 모든 요소가 바이킹들의 대담한 도박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배가 고팠고, 잔혹하고 영리한 신들을 믿었으며, 적들의 혼란을 틈타 재빠르게 습격하는 무역적 전통을 지닌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