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 소녀박가(小女朴哥) 자녀자매문기, 안동 금계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가
자식을 파는 자매문기(自賣文記).
흉년으로 살 길이 막막하자, 장남 명철(明哲)은 7냥, 차녀 명심(明心)은 15냥에 각각 진산댁(珍山宅) 노비로 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병술년 둔이(屯伊) 소지(所志), 안동 금계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가
안동 김생원의 노비 '어둔이'가 동료 노비(班奴) 차중(次仲)이 짊어지게된 양역(良役)의 면제를 호소하는 소지.
노비 중에는 양역(세금과 노역 등, 양인으로서 국가에 바쳐야하는 의무)의 가혹함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를 팔아 노비가 된 자도 있었다. 그런데 관의 실수로 인해 노비가 양역마저 이중으로 짊어지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끔찍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주인에 대한 의무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모두 져야 했으니.
해당 소지에서 '어둔이'는 같은 주인을 모시는 동료 노비(이를 반노(班奴)라고 했다) 차중(次仲)이 이런 억울한 상황에 놓이자, 그의 일가족이 대대로 40여년 간 석향리 하진촌에서 김생원댁 노비 생활을 했다며 그 동네 모든 사람도 다 알고 있다는 보증을 하고 있다. 노비들의 동료애를 엿볼 수 있는 문서다.
해당 문서에서 차중(次仲)의 어미 이름이 강아지(江牙之)라고 언급되어있는 점 또한 흥미롭다.
# 노비들의 이름
노비들은 실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강아지(江牙之, 姜阿只), 도야지(都也之), 송아지(松牙之), 망아지(亡阿只)와 같은 가축 이름,
물 긷는 물담사리(談沙伊), 똥 푸는 똥담사리, 소기르는 쇠담사리와 같이 역할에 따른 이름,
기특이 맹랑이 망나니 모지리 돌쇠 마당쇠는 양반이요,
썩을년(石乙年), 천치(千致), 똘마니(乭萬), 말종(唜宗), 말똥(馬㖯), 개똥(介同, 介屎), 똥산(屎山), 우연(偶然), 남근(男根)과 같이 도저히 사람에게는 붙이지 못할만큼 모욕적인 이름들로 불리곤 했다.
# 노비들이 했던 일
## 심부름
주인 곁에서 솔거하며 상전의 호적에 올라와 있던 사환노비(使喚奴婢)들은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았는데, 주로 나무 하고, 물 긷고, 땔감 패고, 집 수리하고, 밥 짓고, 장 담그고, 반찬 하고, 바느질 하고 방아 찧는 등 의식주에 관한 일들 뿐 아니라 주인의 귀한 자식을 돌보는 유모 노릇에, 그렇게 정성들여 기른 아가씨 혼인할 적엔 같이 따라가 죽을 때까지 수발드는 역할까지 하였다.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길쌈한다."는 말이 있듯, 계집종들은 누에를 키워 양잠을 했다.
이렇게 생산한 무명은 옷으로 만들어 입거나 이불을 만들었는데, 세금과 화폐 역할을 대신했기에 길쌈은 집안의 매우 중요한 중대사였다. 계집종들은 주인 소유의 누에 이외에도 자신들만의 누에를 기르기도 하였는데, 당연히 훨씬 열심히 길렀다.
## 농사
주인 곁에 살지만 같은 호적에는 올라와 있지 않던 앙역노비(仰役奴婢)는 주인의 농사를 대신 지었다. 정월에는 밭갈고, 2월에는 파종하고, 춘삼월에는 김매고 누에치며 병아리도 부화시켜야했다. 여름에는 보리를 수확하고 풀 베고 똥 퍼서 두엄만들었고, 마침내 9월에는 추수를 해야했다.
게으름을 피운다면 가차없는 매질이 따라왔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김을 매게 시켜놓았더니 그늘에 누워 자고 있는 종을 발견한 일화가 나타난다. 그 노비는 즉시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와 채찍으로 종아리를 마흔 대나 맞았다.
## 신공(身貢) 바치기
주인 곁에서 무제한적인 사역을 당했던 솔거노비들과 달리, 다른 지역에서 농사하면서 오로지 정해진 신공(身貢)만 꼬박꼬박 바치면 되는 외거노비들도 있었다.
호(戶)노비, 혹은 외방노비라고도 불렸던 이들은 독자적인 호를 구성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상전가 인근의 어디엔가 살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앙역노비(仰役奴婢)로 차출될 수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주인의 지배력은 지리적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자료에는 먼 곳에 사는 외방노비의 나이가 100세가 넘기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이들은 사실상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도망한 자들이었다.
### 상행위
농한기에, 튼튼하고 건강한 노비들은 등짐을 지고 거래의 길을 나섰다.
쌀, 콩, 보리, 각종 열매를 비롯하여 소금이나 청어가 주된 거래 물품이었다.
이 여정은 적게는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으나, 길게는 무려 2~3개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그토록 오래 걸리는 이유는 보통 여정의 도중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탓이었다. 겨울에 길을 떠난 노비는 동상에 걸려 엄지를 비롯한 신체말단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도 엄연히 지적 능력을 갖춘 존재였기에, 사람이 사람을 막 부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물건을 팔러 나간 노비는 자신이 팔 물건도 함께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기 물건은 다 팔아서 자기 살 물건 다 사왔음에도 대신 팔아주기로 약속한 주인 물건은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주인이 노비를 패버리고 싶어도 재산 상의 손해가 생길까봐 꺼리는 마음'을 예측하고 매맞을 각오를 한 것이다.
이런 똑똑한 노비들 중에서는 외방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재산을 통해 자식들을 면천시켰고, 주인의 돈을 대신 맡아 증식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리분별을 하는 양반이라면 이런 노비와 돈독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 간부
수노(首奴)라고 불리는 노비는 일종의 우두머리 간부 노비로서, 많은 노비들을 소유한 대가문이나 서원 등지에 존재했다. 이들은 토지 매매, 노비 매매, 제사 준비, 손님 접대와 같이 양반가에 필수적인 매우 복잡한 업무 등에 종사하는 일종의 엘리트 노비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노비들을 관리 감독하며 때로는 수공패자(收貢牌字:일종의 세금고지서)를 지닌 채 지방에 파견되어 외방노비들로부터 신공을 수취하는 특별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 특수한 노비
비자(婢子) 중에는 곡비(哭婢)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들은 상(喪)을 당한 상주를 대신해서 옆에서 울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조상의 죽음을 울면서 기념하는 것이 성의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보았던 당시의 풍습 때문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죽었을 때, 시장판의 여자들이 동원되어 곡(哭)을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와 같은 풍습이 왕가에서 양반으로, 양반에서 서인들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내노 중에서는 묘직노(墓直奴), 혹은 산직노(山直奴)가 있었는데, 이들은 주인집 조상들의 묘를 화재나 벌채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 죽음
노비는 자주 죽었다. 나이 사십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쇄미록』에서 오희문은 나이 칠십이 넘도록 주인 곁에서 봉사한 비(婢), 열금이 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좋은 음식을 내어주는 것을 꺼리며 어차피 죽을 거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수십 년 이상 함께 살며 가족 이상으로 부대끼고 살았던 열금이 마침내 죽자, 오희문은 "죽었지만 애석하지는 않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그 노비가 조금도 속이지 않고 늘상 근면하고 검소했다는 칭찬을 덧붙인다.
열금이 땅에 묻히는 날은 쌀쌀했기에, 주인은 노비의 매장지를 찾지 않았다. 의리명분 상, 주인과 노비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다. 어떤 임금은 충신을 몰라보는 법이고, 어떤 아비는 자식 묻힐 곳도 찾아보지 않을만큼 매정한 법이다.
## 강상을 범하고 도망하다
임진왜란 시절, 일가족이 왜군에게 살해당한 어린 주인을 잘 모셔 대가 끊기지 않게 한 노비가 있었다. 주인은 훗날 그 공을 잊지 않고 충노의 묘소에 비를 세우고 대대손손 벌초할 것을 명했다. 이런 삼강행실도 같은 경우는 분명 존재했지만 역노(逆奴)의 사례보다야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노의 사유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대체로 노비 자신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가혹한 신공에 견디다 못해 주인을 살해한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노비가 주인을 범하는 죄는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의 대죄로서, 강상(綱常)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일로 여겨졌기에,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은 파면되고 읍격(邑格)이 강하되는 등 노비 한 사람 어떻게 처리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양반은 역노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노비를 몰래 사적으로 처벌하는 등, 수없이 많은 은폐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와 같은 상황은 '주인이 노비를 괴롭히거나 죽이는 죄'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많은 경우에, 주인은 '노비가 분수를 모르고 덤벼댔기에' 처벌했노라 강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주인의 처벌은 매우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실록에만 40여 건이 넘는 역노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주인을 죽이는 것보다 더 소극적인 대처는 탈출, 즉 도망이었다.
노비는 끊임없이 주인의 감시를 피해 도망쳤고, 다시 잡혀오기를 반복했다. 잡혀오면 용서받을 수도, 혹독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혹독한 처벌에는 사적인 처벌과 공적인 처벌이 모두 뒤따랐다. 주인 앞에서 장을 수십대 맞고, 관아에 끌려가 옥에 갇힌 뒤, 칼을 찬 채로 그 다음날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노비들에게도 나름의 탈출구는 있었다. 조선 후기, 해안 도서지역은 도망노비들의 천국이었다. 이 지역의 궁방이나 아문에서는 이 도망노비들을 데리고 노동력으로 활용하며 주인의 추쇄(推刷)를 금지했다.
중세 유럽에서 "도시의 공기가 사람을 자유롭게(Stadtluft macht frei)" 했다면, 조선에서는 바닷바람이 노비를 자유롭게 했다.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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