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과한 일반화를 하자면, 한국은 평균이 없는 나라입니다.

국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동체는 상위권 10%와 하위권 10%가 아닌 중위권의 평균 80%를 기준으로 둡니다. 중간 계층을 위한 관습이 형성되고 거시적인 지향성 역시 그러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상위 10%를 기준으로 둡니다. 그 이하는 다 낙오자라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공적인 미디어 사적인 미디어 모두 그러합니다. 상위 10%가 평소 갈만한 식당, 상위 10%나 겨우 탈만한 승용차, 상위 10%에게나 별 부담 없을 해외여행, 상위 10%에게조차 부담스러운 고가의 아파트... 인스타와 카스에 올라오는, 남에게 보여줄만한 것들은 대부분 그러한 사회적-심적 검열을 거쳐 선별된 것들입니다.

그 높은 커트라인을 만족시키지 못할 나의 내밀한 흔적? 내 일상의 민낯? 그런 건 좀처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상위 10%라는 것이 이미 인증된 이들의 인간미와 갭모에를 비춰주기 위한 일종의 계획된 애교 정도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혼산 등 연예인의 일상적인 구질구질함을 탐독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갭모에가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이 상위 10%에서도 계층은 끊임없이 세분화되어, 내가 평생 벌 돈보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을 재산의 규모가 더 큰 경우(보통 금수저라고 합니다)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학벌과 라이센스에 의해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상위 1% 이내의 지위가 상징처럼 언급되곤 합니다.

예전에는 이 지위에 들어가는 업종이 비교적 다양했습니다만. IMF 전 몇 년 사이에 건축사가 떨궈져나가고, 2000년대 초반 회계사가 소리소문 없이 쭈그러들었으며, 그 이후 사시가 사라지고 변호사의 수입 하한선이 내려가며 이제는 남은 게 의사밖에 없습니다.

서연고 위에 버젓이 의치한이 군림하고, 의대 들어가려고 일년에 1억 가까이 들어가는 명문 재수학원에서 4수 5수를 마다하지 않는, 전국민이 의사만을 바라보는 세상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의사는 대부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종이니 딱히 이상한 일도 나쁜 일도 아니지만. 지금 한국에서 펼쳐지는 의사 올인의 시대는, 선택법이 아닌 배제법으로 멱살잡혀 끌려나온 상황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그리 하자 해서 한 게 아니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서 이리 되어버린 것입니다.

의사가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미래 먹거리와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직종이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다만 먹고 살 걱정 없이 충분한 돈을 벌고, 또 한창 때에 잘려서 무직자로 내몰릴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 이제 의사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수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석박사를 이수하고 난 이과 인재도 사기업에서 오십대 초반까지 버티기 어렵습니다. 교수로 자기 자리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지요.

문과는 말할 것도 없어서, 서울은행과 금융계 공기업에 들어간 극소수 이외에는 사방이 단두대 매치입니다. 기껏 라이센스를 딴 사람들도, 나이는 드는데 파트너 못 달까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변호사, 회계사 등. 개업해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타고난 넉살과 영업력을 지닌 소수입니다.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불안한 라이센스조차 없다면? 그냥 정글에서 목 내놓고 살아가야죠. 부모가 물려줄 충분한 재력 없이는 흔한 가죽갑옷(전셋집)조차 장만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내 주변에서 잘 하는 사람은 잘 하더라', '구석진 골목 3층에 있어도 맛집이면 손님이 다 알아서 찾아온다'라는 잔혹한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특출한 재능과 친화력같은 게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풍요로움을 얻기 위한 얼마 안 되는 티켓.

현 상황에서는 그 몇 장 안 남은 티켓이 의사인 것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이라면, 이 티켓의 수를 늘리고 티켓의 색깔도 다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소위 개천용이 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그를 위한 방식도 메디컬과 법조계 일변도에서 벗어나게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하지만 개도국에서 완전히 선진국으로 접어들지 못한 시점에서 성장이 멈춰버린(출산율을 보세요!) 이 나라에서 그런 거시적인 활력이 자생적으로 솟아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국민 전체의 공감대는 물론, 정치적 행정적인 의지가 이 방향으로 계속 흘러가야 겨우 실현될까 말까 하는 가망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지나 노력은 딱히 없었고, 그 와중에 20년 넘게 공급이 고정된 채 실비 펌핑까지 받은 의사만 마지막 보루로 남게 되었습니다.

(* 소위 메디컬 삼형제인 의치한 중 치과의사는 나름 필수재로서 견조한 지위를 점하고 있습니다만, 작년 여름부터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실비보험 커버가 안 되다보니, 한 번에 비보험 시술을 받으며 쌩돈을 덩어리로 지불하는 게 지금같은 고금리 시대에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한의사는 벌써부터 망조가 들어 점점 존재감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직역이라 딱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이번만 해도 전체 정원을 줄이기 위해 한의협이 한의대 티오를 빼서 증가 확정된 의대 티오로 넣어달라고 요청까지 했지요. 신규 한의사 라이센스의 공급을 대폭 줄여야만 기존 한의사라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소위 직종의 멸망각을 본인들도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년짜리 메디컬 계열 면허라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서울대 이공대 레벨 이상으로 선호되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입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여러 가지 있을 테지만.

현 정부는 남아있는 유일한 티켓인 의사 라이센스의 평가절하 및 가치훼손을 택했습니다. 소위, 강제적인 유상증자같은 조치입니다. 개별주식의 떡락을 노리고 주식수를 대폭 늘려버린 거죠.

전국민이 의사가 되려는 비정상적인 상황이고, 대체재가 없다는 부분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특혜와 선민의식이 이런저런 폐해로 이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의사들 문제 많죠. 분명히 해결이 필요한 상황이긴 합니다.

의사 이외에도 사람들이 뜻을 두고 추구할만한 자리가 만들어지도록 유도하는 쪽이 시간은 걸려도 더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방향일 텐데. 일단 단기적인 임팩트만 보고 딱 하나 남아있던 티켓을 찢어버리는 모습이.

참으로 조급하고, 근시안적이고, 잔머리만 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서야, 이제 개천용은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지금 사회에 불만이면 자살한 후 가챠 돌려서 좋은 수저로 다시 태어나는 걸 노려보라는 메시지만 남게 됩니다.

의사 올인 풍조를 포함하여 의료 분야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 예전 관련 게시물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보험과 실비보험 제도를 개편하고 건강보험료 요율을 대폭 올려야 합니다. 그게 정석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표 떨어져서 선거에서 질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정석 대신 편법만 택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디어에 잘 노출되지 않은 영역에서 큰 시야로 대계를 실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년에 국가 R&D 분야 예산을 기록적으로 깎아먹은 걸 보면.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기적으로 국가의 발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부분이 우선순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