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리, 정이라 하면 보통 한국사회에선 긍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반면 규칙, 원리원칙 등은 '답답하다', '숨막힌다', '정 없다' 등 부정적인 반응이 떠오른다. 규칙에 엄격하다는 독일은 고지식하고 답답한 나라라고, 매뉴얼의 나라라는 일본은 매뉴얼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답답해하거나 비웃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안되면 되게하라!'의 나라 아니던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내는 사람은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다.

세상에 완벽한 규칙이란 없다. 어떤 것이든 부족한 부분, 불합리한 부분은 존재하며 피해를 보고,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유도리', '정'을 통해 그 간극을 메꾼다. 얼마나 긍정적인가!

정말 그런가? 물론 그 유도리로 구제받은 사람에겐 긍정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럼 규칙을 지킨 사람들은?
'유도리'는 규칙을 부순다.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보상을 준다. 그렇게 규칙을 깬 사람은 생각한다. '내가 똑똑하구나.' 그렇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행동이 똑똑하게 보상을 얻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걸 제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규칙을 강하게 적용하려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럴 거면 누가 규칙을 지키나? 바야흐로 규칙이 쓰레기가 된 사회이다.


요즘 갑질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진상'에 대해 많이 접한다.

식당에서 아이도 먹을 것이라고 '낭낭하게', '덜맵게' 달라고 한다. 거기에 대해 거부하면 적반하장이다. '정이 없다', '다른 곳은 다 해준다', '그거 좀 해주는 게 뭐가 힘드냐?' 등. '돈 내고 정해진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는 규칙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 가게 주인이 강경하게 쫓아내거나 경찰을 부를 수 있는가? 법적으론 모르겠다. 다만 그게 가능하더라도 실제로 선택할 수는 없다. '서비스 좀 달라했다고 손님을 쫓아냈더라' 같은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다'라고 생각할테니까. 규칙을 깬 사람은 기세등등하게 이득을 얻고, 그걸 지켜나가려는 사람은 손해를 본다.

주민센터에서 무리하게 진상짓 하는 사람도 경찰이 강제로 끌어낼 수 있는가? 교사에게 우리 아이 좀 잘 챙겨 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개인 카톡으로 부탁하는 건? 그걸 선긋고 거절한다면 난리가 나지 않나?

보통 이런 일이 터지면 다들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 거라고. 아니다. 그냥 사회 전체가 그런 것 같다. 규칙을 강하게 집행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상황인데 지키는 사람만 바보지. 그리고 이런 사람이 많아질 수록 규칙은 더 쓰레기가 된다. 규칙을 지키거나, 하다못해 고치기보단 그냥 당장 규칙을 부수고 이득을 얻으면 그만이니까.


시스템, 규칙을 만드는 쪽도 그냥 문제가 터지지만 않도록 땜빵하고, '재량'이란 이름으로 담당자에게 떠넘긴다. 이쪽도 규칙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려만 할 뿐. 그런데 불확실한 규칙은 담당하는 개인에게 과한 책임을 부과한다. 재량껏 악성 민원인을 보내고, 학부모를 상대하라는 건 그냥 시스템이 없는 거다. 안되면 되게 하라? 안되는데 어떻게 되냐?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뭐라 한다고? 하...


물론 규칙이 완벽하다고, 피해를 보더라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난 자기 권리는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칙을 존중하면서도 권리를 챙기는 법? 규칙을 고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위이다. 억울하고, 잘못됐다고. 지금처럼 괜히 규칙 개무시하고 일선 담당자한테 난동 부리는 게 아니라.


규칙이 제대로 세워지고, 사람들이 규칙을 존중하고, 지키지 않는 자를 칼같이 배제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괜히 유도리 있게, 온정적으로 좋게 좋게 넘어가지 말고. 규칙이 잘못 됐으면 규칙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규칙을 바꾸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매 상황에 자기 권리 챙기기 위해 각자도생 하는 게 아니라 규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규칙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근로기준법? 초과 수당? 너는 그냥 일을 할 생각이 없구나?'

'가족같은 기업'이 조롱거리가 된 사회이다. '가족같은 사회'도 별로 지향할만한 사회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