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11/15 22:47:31
Name 칭찬합시다.
Subject [일반] 남자 아이가 빗속에 울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쎄요"

비바람이 치는 아침이었다. 비든 바람이든 하나만 불어도, 아니 화창한 날이어도 평일 아침에 집 밖을 나서야만 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텐데 하필 이런 날씨는 내 기분을 축 늘어지게 만들었다. 벌써부터 신발은 축축하고 바지 밑단도 젖어갔다. 바람에 이리 저리 움직이는 우산을 꽉 움켜잡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런 내 앞에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길을 막아섰다. 비바람이 너무 세다고, 학교 가기가 무섭다고.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했다. 자그마한 남자아이는 한 손에 깁스를 한 채 다른 한 손으로 휘청거리는 우산을 고정하려 애썼지만 잘 안되었는지 온 몸에 물기가 가득했다. '어쩌지? 이 아이 부모님께 연락해야 하나?' 온갖 생각이 들며 아이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어떻게 해줄까?"

아이가 답했다.

"학교까지 같이 가 주실 수 있어요?"

피터 싱어는 자신의 값비싼 정장을 망치지 않으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를 망설이는 이를 질책했고 나는 그의 일갈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지금 내 옷은 고급과는 거리가 먼 대충 인터넷에서 산 싸구려지만 이 아이도 물에 빠져 허우적 대지는 않았다. 빗물은 이미 내 양말까지 스며들었고 어쩌면 속옷까지 적실지도 모른다. 버스 시간은 촉박하다. 짧은 순간 이 모든 걸 생각하진 않았지만 훅 지나간 사고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내 입은 손익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방정맞게 행동했다.

"그래, 아저씨가 데려다 줄게. 학교가 어디야?"

어쩌면 아이는 내 행로 근처의 초등학교에 다닐지 몰랐다. 그렇가면 나는 그냥 내가 가아하는 길 중간에 그 아이를 바래다 주면 됐다.

"A초등학교에 다녀요"

아, 그 아이의 학교는 뺑 돌아가야 했다. 어쩌겠는가. 이미 대답해 버린 것을. 난 그 아이의 옆에서, 때로는 앞서가며 아이의 학교로 향했다. 짧은 대화로 그 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것을, 팔은 장난치다 넘어져 다쳤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어느덧 눈물을 그쳤고 자기가 울었다는게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등하교 도우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아(나 때는 학부모들이었는데!)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아이네 학교의 후문으로 도착했다. 아이는 감사하다 꾸벅 인사하고 학교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내 옷은 흠뻑 젖었고 버스는 다음 차를 타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감사를 표하는 어린 아이가 기특해서일수도, 누군가의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뻐서일수도, 내가 그리 사회에 닳아버린 어른으로 늙은 건 아니라는 자기 만족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글을 피지알에 써 받을 따봉에 싱글벙글했을 수도 있고. (아이고 좋은 일 하셨습니다 회원님~)

그 아이는 내게 감사했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감사한다. 내가 그래도 이렇게나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걸, 무가치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려줘서.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한루나
23/11/15 23:28
수정 아이콘
좋은 일 하셨네요. 꿈나무에게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산월(陳山月)
23/11/16 00:10
수정 아이콘
이런 자그마한 선행이 쌓여있기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지속되는게 아닐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23/11/16 00:21
수정 아이콘
혹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선행을 쌓아두고 월즈결승전을 기다리시는건 아니겠죠? 흐흐 덕분에 저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23/11/16 07:28
수정 아이콘
좋은 일 하셨네요 닉네임이 더 빛나 보이네요!
toujours..
23/11/16 07:45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수리검
23/11/16 07:54
수정 아이콘
아이고 좋은 일 하셨습니다 회원님~

싱글벙글해 주세요 빨리요
23/11/16 08:29
수정 아이콘
선생님의 선행을 아주 높이 칭찬합니다!
안아주기
23/11/16 08:50
수정 아이콘
가슴이 따뜻해져요.
바람기억
23/11/16 09:02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
김홍기
23/11/16 09:23
수정 아이콘
제목이나 도입부를 보고 소설인줄 알았는데 실화네요. 잘하셨어요
melody1020
23/11/16 09:33
수정 아이콘
칭찬합니다. 정말 잘 하셨어요.
아이를 도와줬는데 아이 엄마가 진상 부리는 결말이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면서 봤는데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네요.
부디 이런 선의와 선행이 거리낌없이 행해질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코리엠
23/11/16 09:48
수정 아이콘
칭찬합시다님~ 칭찬합니다~!!
바다로
23/11/16 10:03
수정 아이콘
좋은일 하셨습니다. 아침부터 기분좋아지는 글이네요. ^^
비상하는로그
23/11/16 10:10
수정 아이콘
멋있습니다.
따봉 척
23/11/16 10:15
수정 아이콘
따봉~
Winter_SkaDi
23/11/16 11:55
수정 아이콘
아이고 좋은 일 하셨습니다 회원님~

칭찬합시다.님 덕분에 추운 아침이 따뜻해졌어요. 감사해요.
아이 한 명이 아니라 피지알 전체까지 기분 좋게 만들어주셨으니 얼마나 가성비가 좋습니까 크크
23/11/16 14:32
수정 아이콘
아이고 좋은 일 하셨습니다 회원님~
쌍따봉 드립니다~~
23/11/16 19:32
수정 아이콘
이 아이는 자라서 이 좋은 기억으로 또 다른 선행을 하겠지요! 좋은 일 하셨습니다.
살려야한다
23/11/16 20:29
수정 아이콘
따봉 하나 드리고 갑니다
자유형다람쥐
23/11/19 18:39
수정 아이콘
아이고 좋은 일 하셨습니다 회원님~
멋진 어른이에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293 [정치] 이동관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에 준하는 방안 검토해야" [92] 빼사스14261 23/11/21 14261 0
100292 [일반]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hard money, 비트코인 등 [50] lexial11582 23/11/21 11582 9
100291 [일반] 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학 4점 문제들을 리뷰해봤습니다. [29] 물맛이좋아요9071 23/11/20 9071 11
100290 수정잠금 댓글잠금 [일반] 여초 사이트 등지에서 최근 화제가 되었던 폭행 사건 2개 [81] kien19696 23/11/20 19696 10
100289 [일반] 피싱? 사기 당했습니다. ㅠㅠ [51] 본좌12111 23/11/20 12111 17
100286 [일반]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질 우리에게 (feat. 결혼기념일) [7] 간옹손건미축9041 23/11/19 9041 18
100284 [일반] 교회는 어떻게 돌아가는가:추수감사절 [29] SAS Tony Parker 10389 23/11/19 10389 6
100283 [일반] [팝송] 트로이 시반 새 앨범 "Something To Give Each Other" [2] 김치찌개5623 23/11/19 5623 0
100282 [일반] (바둑) Ai 일치율과 치팅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 [21] 물맛이좋아요11504 23/11/18 11504 8
100281 [일반] 노스포) 산나비 리뷰 [11] 푸른잔향9855 23/11/18 9855 3
100280 [일반] 광주에서 무엇을 사가지고 와야될까요? [38] Marionette12839 23/11/18 12839 8
100279 [일반] 중국인의 한국입국이 생각보다 어렵더라구요. [72] Pzfusilier17654 23/11/18 17654 4
100278 [일반] 독전2 를 보고(스포X) [30] 캡틴백호랑이10662 23/11/18 10662 0
100277 [정치] 정부 행정전산망이 멈췄죠 [72] 똥진국17484 23/11/17 17484 0
100276 [일반] [육아] 같이놀면되지 [55] Restar8691 23/11/17 8691 21
100275 [일반] 답답한 환자들 [102] Goodspeed12989 23/11/17 12989 28
100274 [일반] 나의 보드게임 제작 일지 ② [10] bongfka8645 23/11/17 8645 10
100273 [정치] 여러 이슈들에 묻힌 합참의장 후보자 "김명수" [57] Croove13010 23/11/17 13010 0
100271 [일반] 적당히 살다 적당히 가는 인생은 어떠한가 [17] 방구차야9308 23/11/17 9308 15
100270 [일반] 피와 살점이 흐르는 땅, 팔레스타인 (9) 봉기 [1] 후추통7189 23/11/16 7189 15
100269 [일반] 엄마 아파? 밴드 붙여 [18] 사랑해 Ji10599 23/11/16 10599 166
100268 [정치] 대법, 尹대통령 장모 '잔고증명 위조' 징역 [123] 바밥밥바18279 23/11/16 18279 0
100267 [일반] 나의 보드게임 제작 일지 ① [16] bongfka9054 23/11/16 9054 1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