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녕하세요.
저번에는 바이탈과 레지던트의 단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장점도 있는데, 사람을 살리는 기쁨 이런거야 당연한 거라서 이번 글에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오늘 적는 내용은 의사가 아닌 사람도 이미 체감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의사인 사람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의료업과 관계없는 보편적인 내용입니다.
2. 레지던트 생활은 바쁩니다.
아침은 당연히 안 먹고, 점심도 안 먹을 때가 있습니다.
점심은 굳이 먹으려면 먹을 수야 있겠지만, 지금 당장 급한 일만 끝내고 밥 먹자 생각하다보면 점심시간이 지날 때가 많습니다.
밥을 먹더라도 밥 먹기 직전까지 일, 밥 먹자마자 일하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전여친이 점심먹고 커피타임 보낸다는 게 너무 부러웠었습니다.
하루종일 일하는 건 별 상관이 없는데, 일을 하다보면 실제로 몸이 두 개여야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몸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진 환자, 컴플레인하면서 의사 나오라는 환자, 지금 퇴원해야하는데 처방을 고쳐야하는 환자, 시술을 하는데 옆에서 대기해야하는 환자, 입원하고 싶다는 응급실 환자 등등의 일이 겹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뭘 안하면 죽을 것 같은 사람 먼저 하고, 나머지 일을 나중에 합니다.)
나는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데 간호사는 본인 일부터 빨리 해달라고 연락오고, 검사실은 지금 검사/시술하니까 지금 뭐 해달라고 하고, 교수는 본인 지시사항 지금 하라고 연락오고, 환자는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항의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잘 못 되었다는게 아니라, 이런 상황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의 좀 많이 뽑아서 로딩이 줄면 좋을텐데, 그렇게 하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은 둘째치고 애초에 아무도 공감 안 해줍니다.
병원이나 사회는 최저시급으로 일하는 레지던트 써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교수들은 "나때는 집도 못 갔어~" 이러고, 일반인은 '그거 레지던트 더 뽑으면 일 줄어드는 거 아님?' 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교수나 일반인이 잘 못 되었다기보단 전공의/펠로우를 부려먹는게 당연한 사회인식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도 힘든데 내 편도 없습니다. 일 다 하고 늦게 퇴근해서 집에 오면 현타가 옵니다.
3. 오히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바쁘기 때문에 얻은 것이 있습니다.
레지던트 이전처럼, 되는 대로 살면 레지던트 생황을 버티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덜 힘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크게 두가지로 나눴습니다.
신체적인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스트레스.
물론 몸이 힘들면 정신도 힘들고, 정신이 힘들면 몸도 안 움직이겠지만 대충 두 개로 나눴습니다.
그 둘을 줄이려고 현재 노력 중입니다.
4. 신체적인 스트레스1
일을 적게 하면 몸도 편하겠지만, 레지던트 신분상 제가 일을 조절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그나마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부분은 의학적 상태에 대한 판단과 환자/보호자 설명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게 많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판단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좀 더 아는 것이 많은 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이 추후 의학적 문제 발생을 줄일 수 있어 잠재적 시간 낭비를 줄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uptodate라고 최신 지견을 전세계 전문가들이 적어놓은 사이트가 있는데, uptodate는 신입니다.
그 외 서울대학교/아산병원 내과 매뉴얼이나 각종 질환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참고하여 공부 중입니다.
공부 시간이 상당히 걸리기는 하지만, 지금 공부하면 적어도 3년은 써먹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이득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환자/보호자 설명에 대한 시간 감축입니다. (설명을 대충 하거나 안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공부를 하는 게 환자/보호자 설명할 때도 큰 도움됩니다. 그리고 말하는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깨닫습니다.
환자/보호자가 묻는 내용에 대한 답변 자체가 기본적인 의학적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환자/보호자는 정말정말 쉽게 말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이해를 잘 못한다? 그러면 본인 하고 싶은 말만 계속 합니다.
'내가 예전부터 어디가 아팠는데, 어느 병원 가서 약 받았더니 효과는 없고 아프기만 하더라. 저번주에는 목욕탕을 갔더니 아는 할머니가 병원 가야한다고 해서 왔다. 그 할머니는 아파서 몇 년전에 삼성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뭐 하라고 해서 하니까~~~~'
일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이런 이야기 듣고 있으면 정신 나갈 것 같습니다.
요새는 무조건 두괄식으로 매우 쉽게 설명합니다.
입사 초기에는 '환자가 이렇게 아프고, 검사결과가 이렇고 추가로 이런 검사를 해야하는데 아직 확실하게 나온 건 없고 일단 이런 치료중입니다...'라는 식의 설명을 했었는데,
지금은 '환자의 몸의 이상은 두가지 있고, 첫번째는 현재 증상치료를 이렇게 하고 있고 원인을 해결하는 치료하기 위해 이런 검사를 했고 앞으로 결과에 따라 이런 치료를 할 거다. 현재 검사결과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두번째 몸의 이상은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와서 증상에 대한 치료는 이렇고 원인에 대한 치료는 이렇게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환자가 더이상 질문이 없게끔 설명하는게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발음, 성량도 중요합니다.
발음 안 좋은 교수님이 환자에게 설명하는 걸 듣고있으면, 진짜 전문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납니다. 유튜브 보니까 발음 교정하는 영상 많더라고요. 요새 모음 발음을 확실하게 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량은 뭐지 싶겠지만, 내과 환자는 노인이 많아서 앵간하게 말해선 잘 못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량 조절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제 음식점에서 알바생 부르는 건 누구보다 잘합니다.
5. 신체적인 스트레스2
방금 설명한 것이 신체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이고, 신체적 스트레스로 덜 고통받는 두번째 방법은 체급 자체를 늘리는 겁니다.
최근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는 집에서 운동하는게 좋더라고요.
일 끝나고 집에 누워있다가 시간 날 때 스쿼트나 팔굽혀펴기나 풀업을 하는데, 헬스장 가는 것보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실제로 체력이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운동해야죠.
저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액상과당도 안 먹고 최근에는 카페인도 끊었습니다. 카페인을 끊으니까 확실히 일할 때 졸리지만 언젠간 익숙해지겠죠.
잠도 충분히 잡니다. 늦게 일어나는게 아니라, 그냥 9시, 10시에 자버립니다.
분명히 인턴 때보다 몸이 많이 힘들 상황인데, 극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몸 비틀어가면서 찾다보니 결국 현재 컨디션이 인턴 때보다 낫다고 느낍니다. (대신 인생의 낙이 없습니다...)
6. 정신적인 스트레스
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뀌려는 생각을 가진 본인밖에 없다.'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습니다.
스스로 바뀌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 대부분 안 바뀝니다.
아무튼 일을 하면서 어떨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까 생각해봤더니,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근할 때부터 예상했던 바이탈 불안정, 술기, 협진 등은 '올게 왔구나' 정도이지 화가 나지 않는데,
갑자기 '선생님 이 환자 c-line 잡아야 될 거 같아요', '선생님 환자 산소포화도 낮아서 산소 드리는데도 회복이 안돼요. 와서 봐야할거같아요', '어 난데, 환자가 허리아프다니까 정형외과 협진 써' 등등 콜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상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줍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다고 했지만, 상황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선생님 오늘 CT 찍는데 실수로 저희가 환자 밥 드렸어요', '선생님 환자가 갑자기 집에 가겠대요' 등의 상황에서 화가 났었지만 최근에는 덜합니다.
간호사가 실수 안하고 밥을 안 줬으면 좋았겠고, 환자가 별 문제없이 입원을 지속하면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상황은 바꿀 수 없죠.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구나 하면서 문제 해결만 빠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정신승리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남들에게 논리로 지면서 하는 정신승리보단 낫다고 봅니다.
7. 제 삶이 빡세긴 한데, 이런 것들을 배우다 보니 레지던트를 시작한 것에 후회 없습니다.
다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