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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0/19 01:41:44
Name Hell
Subject [LOL] 10인 로스터 이야기 (수정됨)
PGR에 글은 정말 오랜만에 쓰는 것 같네요.

최근 직무상 금요일마다, 프로게이머를 지망하고 있거나 고교 졸업 후 대학교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이스포츠 업계에 종사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그룹당 한 시간 정도 이스포츠 역사&문화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창한 주제를 내걸고 있지만, 화자의 천성이 겜돌이인지라 멀쩡한 주제로 시작했다가도 결국엔 썰풀이와 만담으로 귀결이 되고는 하는데, 지난 주 수업 때 여느 시간과 다름없이 아이들에게 감독 시절 비하인드 썰을 방출하던 도중 문득, 다 까먹기 전에 언젠간 글로 정리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가볍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10인, 혹은 10인에 준하는 로스터가 커뮤니티에 화제가 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5인으로 진득한 찰떡호흡을 만드는 것이 낫다, 특정 포지션 서브를 포함한 6~7인이 최적의 구성이다, 10인의 장점을 잘 활용한다면 세계관 최강 아니냐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하기도 하고요. 당연히 당장 아무도 결론을 낼 수 없고, 수많은 표본을 가지고 누적된 결과가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어떤 의견의 손을 들어줄 순 있겠지만, 특정 경기 전날 엔트리를 제출하기까지의 수많은 서사를 쉽게 배제할 수 없겠죠. 애초에 10인 로스터를 제대로 돌려본 팀이 그렇게 많지 않기도 하고요.

제가 10인 로스터를 사용했던 이유는 좀 슬픈데, 역설적이게도 팀의 재정난 때문이었습니다. LCK에서 강등되던 시즌까지, 9위와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 10위라는 웅장한 페이롤 순위를 자랑했던 저희 팀은, 2018 LCK 서머에서 강등을 당한 이후 당연하게도 안 그래도 재정난에 시달렸던 팀의 존폐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강등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려있었기에 1년 더 팀을 맡기로 했는데, 당시 CK에도 LCK 진입을 노리고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하는 구단들이 있었고, 당시 CK에서 좀 친다는 선수들의 연봉은 지금 LCK 선수 연봉 하위권(최저연봉보다 높은)정도는 되었고, 당시 CK 최고의 페이롤을 가진 팀은 2021년 LCK에 그대로 워프시켜도 10위는 족히 면할 가능성이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주전 선수들이 대부분 이적한 저희 팀으로서는 대충 주판 튕겨봐도 난관이 예상되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찌저찌 접촉해본 선수들은 이미 저희 팀의 금전적 처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익히 알고 있어 영입마저 쉽지 않았습니다. 특단의 조치를 해야 했죠.

결국 강등 이후 유일하게 팀에 남은 정글러와, 뭔가 보여주기 위한 환상의 똥꼬쇼 끝에 어렵사리 데려온 미드라이너를 빼놓고 나머지 모두를 공고에 지원한 신인으로, 총 10인의 멤버를 구성하였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다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반만 사실이고 반은 위기의 구단을 구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래도 2016년에 LCK로 승격시키기 전 CK 할 때보단 나은 처우를 해당 CK에 참가하는 우리 팀원 모두에게 보장할 수 있었기에,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10인으로 멤버를 꾸렸으니, 이제 플랜을 가동해야 했습니다. 일반적인 1,2군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구국의 결단, 원대한 포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으므로, 매일 밤 내전 스크림을 돌렸고, 두 코치와 함께 풋볼 매니저식으로 매 경기 평점을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감점 사유를 체크하고, 가점 사유 역시 기록하고, 평가자 3인이 매긴 개인별 평점의 평균을 내어 확정합니다.

적당한 표본이 쌓인 뒤, 팀원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변수를 줄여보고자 평균 점수를 토대로 다시 팀을 섞고, 다시 평점을 기록하고를 매일 반복했죠. 이런 과정을 거쳐 신뢰할만한 데이터가 완성되면, 그때 주전이 정해지는 느낌으로요. 물론 이 과정들은 선수들에게 미리 공지하였고, 자신의 평점이 궁금해서 매 경기 끝나고 방을 기웃대던 선수들을 귀여워하면서도, 그런 모습이 승부욕을 비추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흐뭇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 리그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내부에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나름의 경쟁구도로 다음 경기 선발 명단이 바뀔 때, 지난 경기의 패배에서 몸소 배웠던 것들은, 결과적으로 다음 경기 선발을 위한 내부 경쟁에 패배하여 이번에는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선수들이 배운 것이기도 할 것이고, 해당 정책으로 인해 한 팀으로서의 플레이가 견고해질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고, 혹은 평점을 매기는 사람들이 부족해서(띵장병)였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특정 팀의 부진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조금 더 다양한 원인이 있으니까요.

물론 저보다 더 훌륭한 감독님들은 다인 로스터도 곧잘 구사하시곤 하죠. 저희 팀이 흔들렸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그런 분들의 팀에는 조금 더 무거운 균형추가 있겠지만, 제가 겪은 처음이자 마지막 10인 로스터는 즐거운 추억이기도 했지만 쓰라린 기억이기도 합니다. 아, 지금의 내가 그 때로 다시 돌아가서 하면 조금 더 잘할 수 있는데. 매번 이렇게 삶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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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02:07
수정 아이콘
권재환 감독님 맞으시나요?
한상용 감독님 유튜브에서 사정 듣고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앞으로는 좋은 일들의 연속이기를 빕니다 흐흐
21/10/19 02:10
수정 아이콘
떼인 급여는 이미 마음에서 지웠습니다 흐흐... 감사합니다.
버거킹맘터
21/10/19 02:28
수정 아이콘
갑자기 ptsd가 크크크 하여튼 말씀하신 사례처럼 거의 신생팀이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이점이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돌림판을 돌릴 객관적인 데이터가 e스포츠에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감코가 롤의 신이더라도 과연 강판당하는 모든 선수가 순순히 납득을 할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 안하고 결국 선수들이 이기려고 겜하기 보간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당하지 않기위해 겜할거라고 보기때문이죠
Davi4ever
21/10/19 02:3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저도 언젠가 제가 경험했던 걸 바탕으로 이스포츠 역사를 정리해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는데...
쉽지만은 않은 일이더라고요. 이스포츠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신다니 멋집니다.

아무래도 게임 중 선수교체가 되지 않는 현재의 롤 시스템상,
최적의 5인을 빠르게 찾아 고정하는 쪽이 더 낫다는 게 주류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메타-컨디션 등의 변수가 생기면 라인업을 교체하는 것이고요)
다만 플랜A가 문제없이 잘 돌아갔을 때 비주전 선수들이 놀아 버리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 게임게시판에 뎁스와 시너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물론 게임 중 선수교체라는 아이디어에 너무 꽃혀 글이 산으로 가기는 했습니다 크크)
글은 산으로 갔지만, 댓글에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아서 살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pgr21.net/free2/72504

저도 돌아보면 '아 그때 잘할 수 있었는데' 싶은 기억이 많아요. 흑역사도 많고...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지금도 그렇게 미친 듯이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언제나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했기에,
너무 많은 후회는 남기지 않고 앞으로 주어질 일들에 더 집중하자는 마인드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든 건투를 빌겠습니다!
욱상이
21/10/19 03:25
수정 아이콘
e스포츠계에 꽤 오랫동안 종사하신 분이시군요.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냥사람
21/10/19 03:4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전문적으로는 아니고 미국에서 한창 대학리그->아카데미->LCS테크가 유행할때 재학중인 대학이름으로 출전한 대학리그에서 나름 2년간 4강전력으로 지냈던 친구들의 팀을 맡아서 전력분석관+잡일꾼+서포터 서브로 지내본적이 있는데요(현재는 은퇴했지만 LCS도 두명정도 데뷔는 했던걸로) 아무래도 계약이랑 소속성이 없는 리그 특징으로 학교내에서 조금만 더 잘하는 사람 나오면 로스터가 휙휙 바뀌고는 했는데요.

개인적으로 느낀점은 (미국이라 피드백이나 비판이 더 휙휙 날라다녔겠지만) 팀 멤버 성격에 따라 안그래도 외부(다른팀들)과의 경쟁도 힘든데 내부에서까지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는 들여도 힘들어 하는 친구(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유약한 성격으로 어찌 이 살얼음판에서 살아 남을까 싶다가도 시즌중에 멤버바뀌면서 흔들리는건 또 팀입장에서도 손해인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한 6-7년전에 했었던걸로 아는데요..

연습생들이야 뭐 당연히 굴러야겠지만 일정이상이 증명된 선수들이라면 전체적인 경쟁 시스템 보다는 선수 성향에 따라 맞춤 피드백
(예를 들어 원딜이 백인이었는데 심각한 ADHD로 현재는 도핑으로 분류되어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면서 경기했었습니다 - ADHD는 약기운이 돌지 않을때 팀원들이랑 싸우거나 혼내면 그걸 피드백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서 힘들어 하더군요. 결국 벌어진 사이로 시즌4 챌린저 원딜을 팀에서 빼야하는 서러운 상황으로 갔습니다. 나중에 ADHD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집중적으로 보다보니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완전히 다른식으로 그 친구를 대했을것 같아요) 으로 진행하는게 더 옳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감독님 의견은 어떠세요?
21/10/19 04:02
수정 아이콘
사실 데리고 있는 선수들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감독이 시스템을 설계하는 경우는 잘 없을 겁니다. 특히나 예로 드신 검증된 선수라면, 성격이나 플레이스타일에 대한 선이해가 있는 상태로 맞이하게 될 테니, 정말 불가피하게 시급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개인을 시스템에 구겨넣을 이유가 없겠죠. 제가 미국에서 활동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많은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경쟁의 연속인 세계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결국 선수들은 사람이기에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에 있어서 개인을 잊어선 안됩니다. 개인이 망가지면 결국 시스템도 고장나기 마련이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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