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1이 페이커고 페이커가 T1이라고 외쳤던 팬들이 이제 FAker를 외치는 현 상황이 씁쓸하긴 하네요.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외침 같아서..

페이커는 모든 선수들이 리스펙할 만한 커리어를 갖춘 선수입니다. 인성적인 면에서 흠잡을 데도 없고요.

많은 사람들이 페이커를 좋아하고 환호했던 건 플레이 적으로 크게 2가지 능력 때문이라고 봅니다.
전성기를 상징하는 압도적인 피지컬과 후반기를 상징하는 클러치능력.

당시 페이커가 아니라면 도저히 픽 할 수 없는 챔프를 픽하고 또 이겨버리는 모습.
미드 마스터이, 미드 올라프.. 리메이크 전 미드 이렐리아를 픽하자 당시 상대 미드였던 쿠로가 ‘X친놈’을 외쳤던 기억이 나네요.
미드 리븐으로 2차 미드타워 앞에 카시 궁을 몸 돌려서 피하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입이 쩍 벌어졌죠.

또 하나의 능력은 ‘지고 있어도 왠지 질 것 같지 않은’ 압도적인 클러치 능력입니다.
경기가 길어지면 상대방이 아무리 유리하다 하더라도
운영상 미세한 틈새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비집어내서 기어코 균열을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역전 명경기가 계속 나왔고,
T9으로 추락했을 때만 해도 모든 상대 팀들이 끝까지 T1은 방심할 수 없다고 인터뷰를 했었지요.
그건 입바른 소리 소리가 아니라 진심 어린 경계였습니다.
어떻게든 올라와서 기어이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말지요.
그 저력에는 항상 페이커가 있었습니다.

네. 그게 바로 T1이었고 페이커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의 페이커에겐 저 두 가지 능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라인전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 정글 깊숙이 와드를 박아주지 못하며
챔프폭은 아지르 트페를 잡지 않으면 번뜩이는 면조차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페이커가 무슨 픽을 할까 라는 기대감은 이제 없습니다.
페이커가 요네를 픽해서 하드캐리한다? 미드 루시안? 이런 그림은 이제 머릿속으로 잘 상상이 되지 않네요.
피지컬을 필요로 하는 신 챔프라면 더더욱이요.

무작정 후반만을 바라보고 클러치능력을 발휘하기에 현재 시점의 롤은 상향 평준화되어 있을뿐더러
정글 캐리 메타인 현시점에 미드 주도권 상실은 게임을 쉽게 풀어나가기 힘든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트페와 아지르의 공통점은 라인 클리어가 좋고 미드 반반 가기 좋은 챔프라는 점이죠.
트페는 운영상 미세한 틈새에 균열 내기 좋은, 플레이메이킹에 능한 챔프이며, 아지르는 클러치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좋은 챔프이지요.
이 두 챔프를 잡았을 때야 후반기 능력의 페이커를 그나마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클러치능력만으로 월즈를 제패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월즈 우승은 벌써 5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그는 대단했습니다.
현재, 그는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제 DRX 미드라이너 ‘솔카’가 KT를 잡고 한 인터뷰 기사 제목은
“‘쵸비-쇼메’에 필적한 라이너 되고파”입니다.
페이커는 없지요.
현실은 그렇습니다.


T1은 어떨까요.

과거에 아무리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하더라도,
‘현재’의 월즈 우승을 노린다면, 과거의 영광에만 취해있을 순 없지요.

그래서 T1에서 모셔온 감독이 바로 18월즈 우승 감독 김정수, 20월즈 우승 코치(감독) 양대인 제파입니다.
월즈 우승을 노린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커리어를 가진 감독이 있을까요.
T1의 레전드 김정균 감독이 있지만, T1으로의 복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끝끝내 고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올해 로스터를 보면 김정수, 양대인 두 감독 모두 월즈 우승 구상에 페이커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감독은 페이커를 우승시켜주기 위해서 온 게 아니죠.
T1을 이끌고 우승하기 위해서 감독으로 온 것입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페이커 팬과 T1 감독간 생각의 괴리가 발생합니다.
물론, 감독이 무조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작년의 인터뷰 논란, 10인 로스터 문제 등..

하지만, 스프링 1위가 월즈에 진출 못 한 작년의 사례를 온몸으로 겪었던 T1 입장에선,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한 실험, 세대교체, 체질 개선을 위한 노력은 스프링 내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월즈 우승이란 큰 대업을 노리는 명문구단 T1의 입장에선 말이지요.

페이커가 T1에서 월즈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걸 보고 싶다는 ‘꿈’은
이제는 놓아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페이커의 실력으로도, T1의 방향성에서도 이젠 같이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황혼기를 맞이하는 페이커가 월즈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다른 팀에서 주전으로 뛰는 모습을 보든지
페이커 없는 T1이 명문구단의 재건을 위해서 빌드업하는 모습을 묵묵히 응원하든지

이제,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T1 팬이든
페이커 팬이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