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6/01/26 15:03:31
Name ohfree
Subject [꽁트] 그해 여름
그해 여름

  2002년 여름이었다. 야간 다른 말로 표현 하자면 붉은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던 여름이었다. 그때의 우리나라의 모습은
-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붉은티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으며
- 골을 넣을 때마다,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않은 남녀가 얼싸안았으며
-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4강에 진출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축제의 현장을 TV화면으로만 지켜 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야 ‘미래를 대비하는 선진 국군’ 바로 그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울면서 가던지 웃으면서 가던지 피할 수 없는 곳이 군대이지만 내가 선택한 시기는 썩 좋지 못하였다. 다행히 월드컵이 열리는 때쯤에는 침상에 배를 깔고 TV시청이 가능한 때이기는 하였지만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 희열의 순간을 내무반에서 국군장병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괴롭게 만들었다.

‘아마 내가 죽을때까지 월드컵은 다시 우리나라에 오지 않을 거야. 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거야.’
아침에 일어나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제초작업을 하면서도, 총을 닦으면서도 잠을 잘 시간에도 이러한 생각은 내 머리 한구석에 돌부처 마냥 자리 잡고 떠날 생각을 안 하였다. 그래서 결심하였다. 내 안의 악마를 잠시 동안만 깨우기로......
  월드컵 기간 즈음해서는 워낙에 많은 휴가자들이 몰려서 휴가 기간을 잘 조정해야 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휴가를 가면 휴가를 간 사람들의 빈 공간을 채우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마침 내가 휴가를 정한 기간이 여러 사람들이 몰릴 기간이었다. 악마를 깨우는데 성공한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용서치 않았다. 나의 악마는 승리를 거두었고 나는 기분 좋은 날에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룰루랄라 집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하였다.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였다. 은은한 향이 나는 비누가 나의 몸을 휘감았다. 너무나도 기분 좋게 온 몸 구석구석 씻고 머리를 감으려는 순간 샴푸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머 어때. 사제비누라서 냄새도 좋구만. 그냥 비누로 감자’
샤워가 끝나고 뜨거운 밤을 멋지게 보낼 장비들을 챙겼다. 약간 가슴을 열어 보이는 형의 셔츠, 제법 맵시가 나오는 형의 청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짧은 군인머리를 사회인의 머리로 바꾸어줄 젤까지......
완전무장을 한 나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걸음걸이로 시내를 활보하였다. 친구들을 만났다. 가슴 설레게 하는 여자들도 만났다. 사람들 속에 파묻혀 ‘대한민국’을 외쳐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문제될게 없어 보였다.

  휴가 나온 지 4일째 되던 날 아침, 화장실에서 씻으려던 나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엄마, 샴푸가 없잖아. 휴가 나온 날도 샴푸 없어서 비누로 감았는데......샴푸 좀 사다 놓으라니까는”
“샴푸 거기다 사서 넣어놨는데”
아니, 이 아줌마가 노망이 나셨나. 마지막 확인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아, 없어. 와서 직접 찾아봐.”
그러자 어머니께서 오셨다. 나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어머니를 호통 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오시더니 젤통을 들어 보이셨다.
“아나, 여깄다.”
“아 진짜, 엄마 이건 젤이잖아.”
“아! 이거 얼마 전에 엄마가 샴푸 사와서 여기에다 담아 놨어.”
난 여전히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고 어머니는 별 일 없다는 듯이 나가셨다 .하지만 바로 그때, 고개를 돌리고 나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씨익 웃는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랬다. 사실 우리집에는 샴푸가 아니라 젤이 없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는 막내아들이 머리에다 샴푸를 바르며 멋 부리는걸 쭈욱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말씀해 주셨다.
“얘야, 그건 젤이 아니라 샴푸아.”
친절하게도 3일이나 지난 후였다.
‘젠장! 어쩐지 냄새가 너무 좋더라니.’
난 이 사건 이후로 내 안의 악마는 어머니로부터 왔다고 믿고 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06/01/26 16:55
수정 아이콘
왠지...약간은 웃겨야 하는 내용인데...섬뜩하네요...악마라는 표현이 자주 들어가서 그런걸까?
메딕아빠
06/01/26 17:13
수정 아이콘
비가 안온게 천만다행이네요 ...
샴푸를 젤인 줄 알고 바르고 외출했는데 ...
만약에 비가왔다면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0570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8] kiss the tears3520 06/01/28 3520 0
20569 긴호흡이면 지루한가? [18] 술속에서3816 06/01/28 3816 0
20568 10부작 칼럼 - e스포츠가 스포츠로 거듭나기 위하여(3) [9] KuTaR조군4616 06/01/28 4616 0
20567 쉬지 않고 달려온 투신 박성준.. [14] 마동왕4321 06/01/28 4321 0
20566 병설리 [38] 글장5350 06/01/28 5350 0
20565 타이틀전 형식의 대회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0] KanRyu3643 06/01/28 3643 0
20564 프로게이머 병역특례에 대한 생각 [30] 김옥균3768 06/01/28 3768 0
20561 핵...어느정도 알고계십니까? [9] karoo3722 06/01/28 3722 0
20560 임요환 vs 최연성. 어제 경기는 봐준것이다? 경기보는눈을 키우자! [184] MaSTeR[MCM]7213 06/01/28 7213 0
20559 뉴스를 보다 씨름과 E-sprots의 유사점을 발견했습니다. [10] 박서야힘내라3819 06/01/28 3819 0
20558 이봐 머슴!!! [13] 정테란4310 06/01/28 4310 0
20557 esFORCE와 파이터포럼에 대한 비판 [17] EZrock4043 06/01/28 4043 0
20556 무념무상의 경지 [4] 낭만토스4324 06/01/28 4324 0
20555 나름대로 모범적인 임요환 vs 최연성 감상기. [12] 세츠나3722 06/01/28 3722 0
20554 추억의 WWF ..그리고 나의 우상이였던 "록커스" [17] red+5013 06/01/28 5013 0
20552 토고와 16강에 같이 가고 싶다... [13] 히또끼리4968 06/01/28 4968 0
20551 선수를 까는 사람들, 그들은 뭘 원하는가. [41] Nerovis3998 06/01/28 3998 0
20550 다시 쓰였으면 하는 맵 [53] 헤르세4276 06/01/28 4276 0
20549 스타리그 주간 MVP (2006년 1월 넷째주) [16] 일택3763 06/01/28 3763 0
20548 [스포일러] 전 나름대로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18] 영혼을위한술4419 06/01/28 4419 0
20547 신한은행 스타리그 8강 3경기 [임요환 vs 최연성] 관전평.. [12] 삭제됨3969 06/01/28 3969 0
20546 무극(스포일러 없음) [11] 웃다.3573 06/01/27 3573 0
20544 아니 경기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276] seed8066 06/01/27 806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