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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3/11/26 02:35:14 |
Name |
글곰 |
Subject |
[잡담] 일상사, 그리고 소설. |
눈을 뜬다. 아침을 먹는다. 출근한다. 그리고 퇴근한다.
네 개의 짤막한 문장만으로 서술할 수 있는 공익 근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내 생활이 시작된다.
TV를 켠다. 그렇지만 보는 프로그램은 얼마 되지 않는다. WWE RAW. 숀 마이클스는 에볼루션에 스윗 친 뮤직을 날려대고, 하이라이트 힐의 진행자 양반께서는 트리쉬와 바람이 나셨다. 이봐 당신. 몇 달 전에 아들 생겼잖아. 온게임넷. 오오 베르뜨랑 조정현 대단해! 옐로우를 밀어내고 동반 진출이란 말이지! 그런데 AMD 다른 맴버들은 왜 이래? 아이고. MBC게임. 장진남 또 졌네. 이거 몇패째야. 영장도 나왔다던데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가. 요즘 팀 분위기도 안 좋은데. 장진수는 승률은 그럭저럭인데 상금이 영 아니네. 에휴. 아 이대니얼 감독 얼굴 정말 안 좋다. 재계약 걱정이네. 오 계림의 황룡 까막눈 이덕화씨가 왜 저리 처져 있나. 당신은 도끼 들고 휘둘러 대야 제맛인데. 경대승은 멋있게 나오긴 한다만 어차피 요절할 운명이니 쯧쯧. 그나저나 미들급에서 반다레이 시우바를 꺾을 사람은 과연 없단 말인가? 이번 GP에서도 결국 우승했던데. 그랑프리도 방송해 주려나? 필름 들고 오려면 돈 깨나 줘야 할 텐데. 크로캅은 아깝게 되었구만. 거목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를 완전히 박살내기 일보직전에서 역전당하다니. 쥬짓수 매지션은 괴물 밥 샵도 이겼다는 걸 까먹었냐. 아 뉴스할 시간이네. 최병렬이 단식한다고? 얼마나 굶을지 궁금하네. 수능 언어영역 문제 때문에 시끄럽구만. 복수 정답 인정할 수밖에 더 있나. 어쩔 수 없지. 부안은 아직도 암울한 거 같군.
이제 슬슬 자리를 컴퓨터 앞으로 옮긴다. PGR, 스포츠투데이, 한겨레신문, 루리웹, FSN, BFG를 차례대로 찍는다. 음, 요즘은 PGR 귀여니 때문에 시끄럽군. 아아 귀여니 생각하면 속이 안 좋다. 흐음? 이런 토론도 이루어지고 있구나. 흥미있군. 오, 판타지 소설. 좋지. 요즘은 거의 포기했지만. 어, 이런 글은 삭제당하기 십상인걸. 그나저나 요즘 분위기가 좀 안 좋군. 항즐이님이나 호미님이 슬슬 칼을 갈고 있을 듯한데. 조심들 해야지. 얼래? 건담에 트라고스를 조합하면 건탱크가 나온다고? 신묘하구만. 역시 V2AB는 최강이란 말인가. 하지만 남자라면 건담 벨페골 개 50이다. 마크 길더 목소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군. 난 괜찮던데. 호오. 메달 45개를 모으면 모든 카드 달성이라. 그나저나 시본즈는 확실히 좋은 카드란 말이야. 캘피는 좋다고 해도 결국 대 CPU용이건만, 사람과의 대전에서 캘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스펠은 결국 홀리 워드 X가 최고야.
이젠 방에 들어온다. 가끔은 음악이 함께 해도 좋다. 베토벤 교향곡 6번, 9번. Queen의 Killer Queen, Bohemian Rhapsody, A kind of Magic. 신해철은 아버지와 나 Part 1의 징글징글하게 와 닿는 나레이션을 노래하고, 비틀즈는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며 거의 절규한다.
그러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내 컴퓨터를 켜고, 워드프로세서를 띄우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소설을 쓴다.
내가 소설을 고르는 기준은? 작가의 치열한 성찰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내가 써야 할 소설은? 나의 치열한 내부적 충돌이 녹아나야 한다.
하루키의 담담한 치열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관점
이청준의 가슴을 뚫는 듯한 표현과
김승옥의 날카로운 시대인식
J.R.R. 톨킨의 치밀한 배경지식 수집과 재해석과
아이작 아시모프의 통찰력.
그 모든 것들을 배우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걸신들린 듯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멈춘다.
플롯을 이렇게 전개시킬까? 아니, 너무 진부해! 앞부분을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래, 이런 이야기를 이곳에 넣으면 좋겠구나. 안돼, 너무 장황해져! 이곳에는 어떤 단어를 쓰지? 무척? 매우? 몹시? 아주? 참? 정말? 이 미묘한 뉘앙스를 어떻게 살리지?
글을 쓰면 쓸수록 내 글의 단점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왜 이리 묘사가 허술하지? 어째서 이렇게 뻔한 전개를 사용하지? 인과 관계가 왜 이리 어색하지? 쉼표를 왜 이리 남발하는 거야? 그러다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곰곰히 생각에 빠진다.
어제 갔던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뺴곡히 꽂혀 있는 이모티콘 잡탕 덩어리들과, 퇴고를 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대여점 전용 판타지들. 그런 책들을 뽑아 훌훌 넘겨보고 그 한심함에 쓴웃음을 짓다 보면 문득 가슴이 아파 온다. 이런 글자 나부랑이들도 책이 되어 나오건만, 과연 나는 죽기 전에 책을 한 권이라도 낼 수 있을까?
눈물이 나려 한다. 분해서일까, 부끄러워서일까. 바야흐로 대중 문화란 이런 부류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무척이나 담배를 피우고 싶지만, 다행히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담배를 피우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한 부분은 순수한 거짓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럼 내 글도 결국 거짓인가? 내 글 속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네가 좋다! 나는 외친다. 나는 네가 좋다! 미치도록 좋다! 환장하도록 좋다!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다! 내겐 네가 있어야 해!
내게 소설은 그런 존재기에.
그래서 나는 다시 소설을 쓴다. 늦은 밤, 멀리서 들리는 기차 소리만이 간간히 울리는 방 안에서 형광등조차 꺼 놓고 모니터를 주시하며 자판 위의 양 손을 부지런히 놀린다. 2줄을 쓰고 나면 1줄을 지우고, 퇴고를 하고 나면 원본이 반 이상 달라지는 힘든 작업이지만 소설을 쓰고 있을 때의 나는 정말 행복하기에, 나는 소설을 쓴다. 이 글들을 언젠가 읽어 줄 미래의 독자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나를 위해서.
-글곰 이대섭.
ps.여러분은 무엇을 불태우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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